‘이왕직아악부’는 현 ‘국립국악원’ 전신

2023.03.28 11:41:12

[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620]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 주는 춘천(春川)이라는 이름은 조선시대부터 써 왔다. 관찰부(觀察部) 행사는 정가 중심인 반면, 일반에서는 속요(俗謠)로 그 소리제는 경토리가 가미된 메나리조였다는 점, 속요에는 <노동요>, <상여소리>, <아리랑>류가 대표적이며 춘천의 옛 마을 이름과 특산물을 노래하는 「큰 애기 노래」에는 <장사타령>이나 <장타령> 등이 유명하다는 점, 그 외에 일반 민요로는 서울 경기의 <노랫가락>이나 <창부타령> 등도 포함되어 있다고 이야기하였다.

 

1930년대 기록에 춘천정악회(春川正樂會)라는 음악단체가 조직되어 조선악 연구발표회를 하였는데, 강연, 성악, 기악이 중심이었으며 그 음악적 성격은 정악(正樂)을 표방하고 있었다고 한다. 벌써 정악회라는 단체의 이름에도 그 음악적 색채가 잘 나타나 있다.

 

특히, 춘천의 정악활동은 일제강점기, 아니 조선이나 고려 이전으로 올라가 춘천의 역사와도 관련이 깊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삼국시대부터 이미 수많은 문사(文士)가 은거하거나, 경관이 빼어난 곳을 찾아서 춘천의 곳곳에 여러 작품을 남겼다는 점으로도 충분히 짐작된다. 더더욱 향교나 서원(書院)을 통해 유학의 인맥들은 명소를 찾아 문회(文會)를 즐기기도 했던 흔적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도 있다.

 

1945년 광복 직후, 미군정(美軍政) 시기에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가 춘천에서 공연을 한 바 있다는 소식도 있다. <이왕직아악부>란 현, 국립국악원의 전신으로 궁정의 보호를 받으며 궁정음악을 연주해 오던 음악기관이다. 여기서 잠시 <이왕직아악부>라는 이름에 관한 의미와 그 이름을 사용하게 된 배경을 짚어보기로 하겠다.

 

 

조선의 건국과 함께 몇 차례 국가 음악기관의 이름을 바꾸기는 했지만, 1897년에 <교방사>로 이름을 바꿀 때까지 약 400여 년 이상 이어온 국가 음악기관의 대표적인 이름은 <장악원(掌樂院)>이었다.

 

그러니까 이곳에서 궁중의 여러 행사에 따르는 제반 음악과 춤이 악공(樂工)이나 악생(樂生)들에 의해 연주되면서 국가의 주요 행사를 진행해 온 것이다. 그러다가 경술국치(庚戌國恥) 직후에는 아악대(雅樂隊)로 명칭을 바꾸었으나, 겨우 명맥만 유지해 왔고, 그러다가 <이왕직아악부>로 격하시켰다. 이 이름을 글자의 뜻으로만 풀어보면 “이(李) 씨가 왕(王)의 직을 수행하고 있는 식민지 나라의 음악기관”이라는 격하된 이름으로 조선으로서는 매우 불명예스러운 이름이 아닐 수 없다. 주권 잃은 약소국가의 백성들에겐 결코 잊어서도,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이름이다.

 

8·15 광복이 되면서 동 아악부는 <구왕궁아악부(舊王宮雅樂部)>로 바뀌었고, 1950년, 전쟁 중에 부산에서 <국립국악원>으로 개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아악부의 이름 문제를 놓고 이야기가 다소 길어졌으나 떳떳지 못한 과거사는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겠기에 정리해 두고자 하는 뜻이다.

 

광복 직후, 이 음악기관이 춘천에서 공연의 기회를 가졌다는 사실은, 당시의 사정으로는 매우 획기적이었다는 생각이다. 궁(宮) 안의 의식 관련한 춤과 음악은 신기할 뿐, 재미있거나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그런 류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도 민요나 판소리에 견줘 정악은 재미없는 음악으로 외면당하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춘천지방의 국악적 기반이나 지역민들의 관심, 그리고 전통음악을 대하는 열정은 대단해서 정악에 대한 반응이 생각 밖으로 뜨거웠던 결과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반응은 드디어 1962년 <춘천국악회>의 창립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창립 이후의 보급 사업으로 시조 경창대회를 여러 차례 열었다는 것이다.

 

1970년대는 무엇보다도 자주국방을 강조하던 시기였다. 민족의 주체적 확립이라는 기치 아래. 우리 것 찾기 운동으로 전통문화의 전승 사업이 본격적으로 펼쳐지기 시작했는데, 이에 편승, 국악 분야도 함께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다.

 

춘천지역의 대표적인 사업이 바로 강원도 내 초등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국악의 지도활동과 국악의 보급 활동이 추진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춘천 <상천초등학교>의 국악취타대, <소양초등학교>의 농악대, <부안초등학교>의 국악관현악단, 등이 국악의 계승이나 확산 바람을 타고 운영되기 시작한 것이다.

 

1981년, <춘천국악회>는 <한국국악협회> 강원지부의 창립으로 통합되었고, <강원국악연구원>을 설립하게 되는데, 이 연구원의 초대 원장이 바로 당시의 국악협회 강원도 지부장이었던 류무열이라는 분이다.

 

국악협회는 학생, 일반인을 대상으로 기악, 농악, 고전무용, 시조, 등의 강습을 열심히 전개했는데, 아쉬웠던 문제점이라면 바로 일반 대중이 가장 바라고 원하던 민요지도의 전문 강사를 확보하지 못한 점이었다고 한다. 어찌 보면, 국악의 보급이나 대중화에 있어 가장 큰 효과가 있는 분야가 민요 분야인데, 이를 지도할 전문 강사를 확보하지 못했다는 점은 국악협회 도 지부의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봉의산 아래에 있던 춘천문화원 부속건물에 <춘천국악원>을 목표로 성악, 관악, 현악, 농악, 무용반 등을 설치하였으나, 문제는 성악반의 가곡, 가사, 시조는 지역 자체로의 명맥이라든가, 또는 초ㆍ중등 교사 교육을 통해 어느 정도 교습이 가능했으나, 민요창 분야는 제대로 지도할 명창이 없어 난감해하던 차였다.

 

얼마의 기간이 지났을까? 이유라 명창이 춘천국악원에 나타나 인연을 맺게 되는 것이다. 그와 강원소리의 만남, 그의 강원소리 인생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다음 주에 계속)

 

 

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suhilkw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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