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립중앙박물관 서예실에 비석 한 기(基)가 서 있습니다. 몸체가 둘로 깨어져 위아래를 붙인 이 비석은, 모습도 표면도 세월의 흔적에 닳아 있습니다. 천년을 넘어간 세월을 지낸 이 비석의 이름은 <태자사 낭공대사비(太子寺郎空大師碑)>입니다. 원래 이름은 ‘태자사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太子寺郎空大師白月栖雲塔碑)’이며, 세상 사람들은 ‘백월비(白月碑)’라고도 부릅니다.
<태자사 낭공대사비>는 남북국시대(통일신라와 발해가 있던 시대) 낭공대사(郎空大師, 832~917)의 탑비입니다. 태자사와 탑은 이미 오래 전에 없어졌고 오로지 대사의 생애를 기록한 비석만이 남아있습니다. 나라와 백성의 존경을 받았던 국사, 큰 스승 낭공대사는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비석에는 그의 85년의 인생, 불가의 연과 수행자로서, 학승으로서, 그리고 정신적 지도자로서의 61년의 승려로서의 삶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석의 글은 낭공대사의 입적(入寂) 한해 뒤에 최치원의 동생이자 신라 말 고려 초 최고 문장가 최인연(崔仁㳘, 868~944)에 의해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비석이 세워진 것은 고려 광종 5년, 낭공대사가 죽은 뒤 37년 후였습니다. 당시 남북국 시대 말기의 상황이 너무도 어지러워 대사의 탑과 비석을 세울 수 없었던 까닭입니다. 이 같은 사연은 낭공대사의 문하법손(門下法孫) 순백(純白)이 기록한 비석 뒷면의 후기에 담겼습니다.
남북국시대 이뜸 명필, 김생
오늘날 이 비석을 빼면 모든 흔적은 사라졌지만, 낭공대사를 기리는 사업은 아마도 거대한 사업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바로 비문 글씨입니다. 글씨는 고려의 이름 높은 명필이 아닌, 남북국시대의 서예가 김생(金生, 711~791)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이뤘습니다.
김생은 남북국시대 으뜸 명필이자 승려로, 우리나라 신품사현(神品四賢)의 첫 번째로 꼽는 서예가 입니다. 신품은 글씨가 빼어나 그 경지가 가히 신의 반열에 놓아도 손색이 없는, 으뜸 경지를 일컫습니다. 그러나 김생이 허구의 인물이 아니었음에도 그의 삶에 대해서는 전설처럼 전해질뿐입니다. 그의 삶이 구체적으로 어땠는지에 대한 기록이 드물고, 무엇보다도 현재 남아있는 필적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열전 김생조에 따르면 그는 평생을 서법(書法)에 매진한 인물로, 그의 글씨는 모두 입신(入神의 경지였다 하였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중국 송 휘종 대에 고려 사신 홍관(洪灌, ?~1126)이 가져간 김생의 행초서첩을 보고 중국의 한림대조(翰林待詔) 두 사람은 그 생동감 있는 글씨를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로 여기며 신라 김생의 글씨로 믿지 않았다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원대 조맹부는 김생이 쓴 창림사비(昌林寺碑) 비문 글씨에 대한 깊은 인상을 그의 「동서당집고첩발東書堂集古帖跋」에 ‘동국필법(東國筆法)의 으뜸’이라 남겼습니다. 고려, 조선의 역대 문인들은 김생의 글씨에 대한 찬사와 감동을 기록했습니다. 이규보, 서거정, 허목, 홍양호, 김정희 그리고 이 자리에서 언급하지 못하는 수많은 문사들과 금석학자, 서예가, 그리고 서예에 감동할 줄 아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김생은 신격(神格)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김생의 글씨를 묵적이든, 비문이든 실견(實見)할 수 있었던 것은 고려 전기 정도까지로, 이미 조선이 되면 김생의 글씨는 귀해져서 그의 글씨를 마주하는 하늘이 내린 기회는 진정 신을 마주하는 기회만큼 어려워집니다.
무릇 글씨에서의 깨달음은 모양의 닮음을 넘어 글씨의 예술성과 정신성의 본질을 깨달음에 있습니다. 그는 동아시아 서예 역사 속에서 과거의 서예 업적들, 그리고 당시 국제 문화로 상징되는 당(唐)에 이르는 서예의 양상과 문화의 요체를 공부하고 수용했고, 이것을 김생이 생존하던 8세기 당시의 신라국과 그 이전의 이 땅의 글씨들을 발판으로 시대와 문화를 자신의 글씨에 포용하고 녹였습니다.
김생의 글씨에 대해 마치 왕희지가 신라에 환생한 듯 묘사되곤 하지만, 이는 달리 말하면 김생이 왕희지의 글씨의 모양을 넘어 깊이와 본질을 이해했음을 뜻합니다. 김생은 이렇게 역대 서예의 업적들을 바탕으로 자신의 글씨를 완성했습니다.
글씨의 표현은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구현하는 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적어도 존경어린 경건함을 바탕으로 써내려 가야 할 비석의 글씨는 아마도 왕희지 서풍의 품격을 바탕으로 표현하였을 것이고, 활달한 기상을 표출할 때는 용이 나는 듯 호랑이의 기세를 뿜어내듯 붓으로 쏟아 부었을 것입니다.
여러 글자를 모아 만든 집자 비문
다시 낭공대사비의 김생 글씨 집자(集字)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집자는 단어 그대로 글자를 모아 짜 맞추는 작업입니다. 이 작업은 말처럼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일단 김생의 필적을 모은 뒤 글자의 크기를 조절하는 작업이 이뤄져야 합니다. 여기에 글 원고와 이 글씨들을 맞추면서, 각 글씨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이뤄지도록 같은 글자를 수백, 수천 번을 대조하여 연결, 조정하는 작업이 진행됩니다.
그리고 이를 비석에 새겨짐에 있어 글씨의 흐름을 잘 이해할 수 있는 뛰어난 각수(刻手)의 손을 통해 이뤄짐으로써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 작업은 최소 몇 년에서 몇 십 년에 이르는 오랜 정성과 끈기를 통해 진행됩니다.
태자사 낭공대사비의 글씨는 흘림기가 약간 있는 행서체입니다. 그때까지 전해오던 김생의 귀한 여러 작품들 가운데서 추려냈기 때문에 비석 하나에 몇 작품이 녹여져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비석 글씨는 각 글자가 2.5~3cm 정도의 높이에 불과하지만, 각 글씨는 각 획의 변화가 크고, 근육의 기운을 느끼게 합니다. 힘차고 생기가 있는데, 훨쩍 뛰듯 활달하면서도 듬직한 무게감이 있습니다.
얼핏 균형이 어그러진 듯하다가도 위아래의 글씨들이 받쳐주어 조응 하면서 자연스럽게 행을 이루고 비석 문장의 흐름을 이어갑니다. 이 자연스러움이 여러 글씨들을 집자해서 이뤄졌다는 것 또한 놀랄 따름입니다. 이것은 이 비석의 집자를 완벽하게 이룬 단목(端木) 스님의 뛰어난 역량 덕분입니다. 집자비의 매력은 집자한 것인 줄 모르다가, 나중에 집자를 했음을 발견했을 때의 놀라움과 감동에 있습니다.
단순히 글씨를 모아 정리하는 것 이상의 가치를 지닌 집자. 대가의 글씨를 모아 정리하는 정성된, 그리고 매우 어려운 작업과정을 거쳐 이 땅에서 가장 뛰어난 서예가 김생의 글씨를 고려시대에 새롭게 탄생시켰습니다. 고려 광종 5년 954년 갑인(甲寅)년 칠월 십오일의 일이었습니다.
전설로 남아있던 비석을 조선 중종 5년 이항이 다시 발견해
사람의 인생을 알 수 없듯이, 이 비석에도 변화가 있었습니다. 어느덧 태자사는 없어지고, 비석의 자취를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김생의 집자비는 전설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 비석이 다시 삶을 되찾은 것은 16세기 초, 정확히 1509년 조선 중종5년 당시 영주 군수였던 이항(李沆)에 의해서입니다. 이항은 어린시절 보았던 안평대군이 명필의 글을 엮은 법첩인 《비해당집고첩(匪懈堂集古帖)》에서 김생의 글씨를 봤던 감동 어린 기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글씨에서 어린 이항은 용이 나는 듯하고 호랑이가 뛰는 기세를 느꼈고, 김생의 글씨를 다시 만나고자 하였으나 마주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영주 군수가 된 뒤 시간이 될 때마다 이곳에 있었다는 태자사의 비석을 찾았고, 드디어 이 비석을 발견, 비석을 귀하게 모시기 위해 경북 영주의 자민루(字民樓)로 옮겨왔습니다. 이 사연을 그는 낭공대사비 왼쪽 옆면에 당시 명필 박눌(朴訥)의 정중한 글씨로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는 이 비석을 발견한 감동을 당대에 발견된 석고(石鼓-돌북)를 발견한 감동을 빌려, 미래를 알 수 없는 인생에 견주며, “큰 집으로 옮겨져 세상에서 가장 큰 보물이 되었다.”고 표현하였습니다.
그 뒤 세월이 흘러 비석은 이 보물의 값어치를 알고 있던 중국 사신에 의해 중국으로 반출되는 상황을 맞았습니다. 그렇지만 비석이 크고 무거워 결국 비석을 가져가던 도중에 포기, 버려졌습니다. 그 이후 여러 차례의 곡절을 겪으며 비석은 1918년 경복궁으로 옮겨졌습니다. 경복궁 회랑에 설치되었던 비석은 다시 박물관 수장고로 옮겨져 오랜 기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이후 비석은 국립중앙박물관을 용산에 새로 지으면서 드디어 다시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천삼백 년 전 사람 김생의 글씨는 914년 비석으로 환생하였고, 풀숲 속에 묻혀 지낸 이 큰 돌은 16세기 초 이항을 통해 세상에 다시 나왔습니다. 21세기 천 년을 지나고 이제 칠십 년을 바라보는 오늘, 이항의 말대로 낭공대사비석은 국립중앙박물관이라는 큰 집에 옮겨져 ‘세상에서 가장 값진 보물’이 되었습니다. 너무도 훌륭했기에 천여 년의 순탄치 못한 삶을 보낸 이 태자사 낭공대사비는 이제 소중히 여겨지며, 영원한 삶을 보낼 것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박성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