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세걸(曺世傑, 1636~1705 이후)의 와룡담(臥龍潭)ㆍ농수정(籠水亭)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곡운구곡도첩(谷雲九曲圖帖)》에 실린 그림입니다.
‘곡운구곡(谷雲九曲)’은 지금의 강원도 화천 용담리 일대의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방화계(傍花溪), 청옥협(靑玉峽), 신녀협(神女峽), 백운담(白雲潭), 명옥뢰(鳴玉瀨), 와룡담(臥龍潭), 명월계(明月溪), 융의연(隆義淵), 첩석대(疊石台)를 일컫는 지명입니다. 화첩을 그리게 한 주인공인 유학자 김수증(金壽增, 1624~1701)은 일찍이 6곡인 ‘와룡담’ 골짜기에 숨어 들어가 정자를 짓고 살았습니다. 농수정은 그 정자의 이름이며 <농수정> 그림은 ‘와룡담’ 계곡과 정자를 근경에서 자세하게 그린 그림입니다.
곡운은 김수증의 아호이기도 하고, 화천군 용담리 일대의 원래 명칭인 사탄(史呑)을 주희(朱熹)가 머문 무이산(武夷山)의 ‘운곡(雲谷)’을 따라서 ‘곡운(谷雲)’으로 김수증이 바꿔 부른 것입니다. ‘와룡담’은 구곡 가운데 제6곡으로 가장 뛰어난 절경으로 손꼽히며 김수증은 화룡담 상류가 모이는 귀운동 골짜기에 7칸짜리 띠풀 집을 짓고 곡운정사(谷雲精舍)도 운영하였습니다. 정사는 서원(書院)으로 발전하기 전 학당을 말합니다. 이곳은 실로 학문을 닦는 선비의 보금자리였습니다.
<와룡담>과 <농수정> 그림을 보면 산들이 겹친 강원지역 특유의 지형을 사실대로 그렸고 녹색으로 산 몸통을 바리고[渲染] 가느다란 가지의 소나무들을 규칙적으로 그려 담은 것이 눈에 띕니다. 각이 진 나무와 바위의 윤곽선에서는 조선 중기부터 유행했던 절파화풍(浙派畫風)*이 보이고, 산봉우리의 피마준(披麻峻)**과 호초점(胡椒點)***에는 남종 화법이 구사되어 있어 18세기에 유행한 정선 등의 진경산수화 초기 모습이 엿보입니다.
* 절파화풍(浙派畫風) : 명초 절강성(浙江省) 출신의 대진(戴進)을 시조로 하며, 그와 그의 추종자들, 그리고 절강지방 양식의 영향을 받았던 화가들의 화풍을 집합적으로 부르는 화법
**피마준(披麻峻) : 마(麻)의 올을 풀어서 늘어놓은 듯이 약간 구불거리는 실 같은 선들을 엮어놓은 모습을 하고 있으며 다소 거친 느낌을 준다.
***호초점(胡椒點) : 동양회화에서 나뭇잎을 그리는 기법으로 후추알같이 작고 둥그스름한 묵점(墨點)을 조밀하게 찍는다.
<와룡담> 그림의 중간에는 작은 띠풀집이 하나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앞을 오가는 선비의 모습도 보입니다. 이 작은 띠풀집은 주인공인 선비의 것이 틀림없어 보이네요. 아마도 김수증의 모습 같습니다. <농수정>을 들여다보면 제법 건물들이 많이 들어차 있고 소를 모는 모습도 보입니다. 김수증은 나중에 당쟁이 격화되자 일가를 이끌고 이곳에 들어와 정착했다고 하니 그 모습인 듯합니다.
실제로 화가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본 시점으로 그려져 있어서 화가의 사실적인 접근 방식이 잘 드러납니다. 그림은 언뜻 보아 다소 서투른 것 같은 느낌도 들지만, 산과 소나무를 그린 솜씨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이처럼 《곡운구곡도첩》은 조세걸이 그렸지만 이를 요청한 김수증의 인생관과 창작 의도가 짙게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수증이 자신의 사는 곳을 그림으로 남기게 된 내력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이 화첩에 발문(跋文)을 쓴 조카 김창협(金昌協)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 그림을 그리게 한 것은 때때로 산을 떠나 이 구곡을 늘 안중에 담아둘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쓰임새는 산을 떠날 때 보기 위해서다”
이것은 실상 조선시대 많은 지식인의 실경산수에 관한 생각과 일치합니다. 아울러 김수증의 이곳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잘 보여 줍니다.
김창협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곡운 노인(김수증)이 화사(畵師) 조세걸을 계곡 현장에 데려가서 매곡마다 실제 경치를 보고 그리도록 하되, 거울에 비친 물상(物像)을 취하듯 하였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이 화첩이 구곡의 아름다운 경치를 사진 찍듯이 실경으로 남겨두고자 그려졌다는 사실입니다.
《곡운구곡도첩》은 이처럼 김수증이 평양을 중심으로 활약한 화원화가 조세걸에게 1682년에 그리게 한 것으로 <와룡담(臥龍潭)>, <농수정(籠水亭)>을 포함한 ‘곡운구곡’의 실경(實景)을 열 폭 비단 위에 그렸습니다. 조세걸은 어진 도사에 참여하는 등 인물화, 산수화에 두루 능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거기에 당시의 여러 문인이 그림에 대하여 발문을 썼고, 그림에 제화시(題畵詩)를 붙였습니다.
김수증은 1671년에 먼저 유학의 영수(領袖) 송시열(宋時烈, 1607∼1689)에게 《곡운정사기(谷雲精舍記)》를 쓰게 하고, 다른 여러 문인과 같이 「무이구곡도가(武夷九曲櫂歌)」에 차운(次韻)한 시를 짓게 하여 모아 놓았던 것 같습니다. 이어 그의 조카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이 쓴 발문에 따르면 10년 뒤 곡운 자신과 두 아들 창국(昌國)ㆍ창직(昌直), 창집(昌集)을 비롯한 다섯 조카, 외손까지 합한 아홉 사람이 나이 순서에 따라 무이도가에 차운하여 곡운의 모든 골짜기를 묘사하는 칠언절구의 시를 지어 <곡운구곡도> 화첩을 완성하였습니다. 당대의 문인이 지은 시와 궁중화가의 그림이 만난 합작품으로 《곡운구곡도첩》의 값어치는 매우 큽니다.
권력에서 은둔으로 이어진 삶 - 김수증과 곡운구곡
그럼 김수증의 생애와 ‘곡운구곡’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김수증(金壽增, 1624~1701)은 원래 명문가의 후예이기에 순탄한 벼슬살이를 하였습니다. 김수증은 영의정을 지낸 수흥(壽興, 1626~1690)과 수항(壽恒, 1629~1689)의 친형입니다. 본래 자연을 좋아했던 그는 나이 45살 때인 현종 9년(1668)에 춘천을 거쳐 평강 현감으로 부임하면서 화천에 은거하고자 하는 뜻을 굳혔으며, 1670년 47살 때 운둔할 수 있는 곳으로 화천의 ‘곡운구곡’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는 화악산 북쪽에 있는 춘천도호부의 사탄내면(현재의 화천군 사내면) 곡운(현재 용담리와 삼일리)에 들어와 이곳을 주자의 ‘무이구곡(武夷九曲)’과 견주어 ‘곡운구곡’으로 정하고 각각 이름을 붙였습니다.
구곡의 연원은 주자(1130~1200)의 무이구곡가에서 찾습니다. 주자는 1183년에 중국 건녕부 오부리 무이산 아래 30리 되는 곳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이듬해 1184년에 12수의 무이구곡가를 지었습니다. 이후 이러한 주자의 행적은 자연스레 주자학을 국학으로 삼은 조선왕조 선비들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리고 율곡 이이(1536~1584)의 ‘고산구곡가’에 이르러서 ‘구곡’은 우리의 장르로 정착하게 됩니다.
김수증은 1670년 3월 곡운에 들어왔고 1675년에는 가족과 함께 이주하여 제6곡 와룡담(臥龍潭) 위에 곡운정사(谷雲精舍)와 농수정(籠水亭), 가묘(家廟), 외양간, 부엌을 지었습니다. 1680년 서인이 재집권을 하게 되자, 1681년 지병과 출사를 위해 서울로 가게 되었습니다. 은거지를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곳을 마음속에 담아두기 위해 1682년에 이를 그리게 된 것입니다. 김수증의 그림 제작 동기는 이처럼 그의 생애와 맞닿아 있습니다.
이후 영의정까지 지낸 그의 두 아우가 당쟁으로 희생당하자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화음동정사(華陰洞精舍)’를 짓고 성리학을 탐구하면서 탈속의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조선조 선비들의 순례지였던 ‘곡운구곡’은 오늘날 화천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구곡도 전통과 곡운구곡도
곡운구곡도 이전에 조선의 구곡도 전통은 중국의 주제를 그대로 그린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와 이것이 조선화 된 고산구곡도(高山九曲圖)가 있었습니다. 16세기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가 황해도 고산에서 구곡을 경영한 것은 후학들에게 주자의 도학적 삶을 따르는 모범이 되었습니다. 이에 견줘 김수증의 구곡 경영은 당시 사화와 당쟁으로 인해 은거지로 들어가면서 시작된 것이고, 일정 기간은 가족을 데리고 와서 살았던 것으로 보아 고산구곡의 원래의 경영 배경과는 같지 않습니다.
김수증이 유거지 주변에 구곡을 설정한 것은 이와 같은 전통을 따르고 있지만 유거지인 농수정 그림에 따로 화면을 할애한 점 등은 결국 성리학적 자연관을 따르기 위한 구곡경영 그림이라기보다는 성리학자로서의 나의 공간을 그린 그림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그림은 조선시대 구곡도라는 의미도 있지만 조선시대에 자연 속에 있는 개인의 거주지를 산수화로 제작한 사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으로서 의미가 더 큽니다. 또한 이른 시기의 실경산수 양식을 보여주는 자료적 값어치도 큽니다.
지금도 화천의 곡운구곡을 찾아가 보면 너른 흰 바위에 청량한 바람이 불고 구불구불한 물길을 따라 과거의 선비들이 노닐던 자취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당시 선비들의 으뜸 꿈은 벼슬길에 올라 뜻을 펼치는 출사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바쁜 벼슬살이 중에서도 자연과 함께 숨 쉬며 학문을 닦고 조용히 살고자 하는 정반대의 바람을 품고 살았습니다. 그들의 두 번째 꿈은 때로는 시와 그림으로 해소되기도 하였습니다.
김수증이야 말로 선비의 두 번째 꿈을 완벽하게 이룬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농수정에 노니는 김수증은 그림 속의 주인공이 되어 지금도 곡운구곡에 머물러 있을 것만 같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전인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