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여인 굴씨와 소현세자

2023.10.01 11:18:48

굴씨의 일생과 소현세자와의 사랑 이야기를 더한 소설이 나왔으면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240]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지난번 고양시 대자동 건자산 자락에 있는 경혜공주와 정종의 무덤을 답사하였었다. 답사 뒤 글을 쓰면서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건자산 건너편의 대자산 자락에는 소현세자의 아들 경안군과 손자 임창군, 증손자 밀풍군의 무덤이 모여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흥미로웠던 것은 밀풍군 무덤과 같은 산등성이 상에서 불과 4~50m 정도 떨어진 곳에 명나라 출신 굴씨 여인의 무덤이 있다는 것이다. 단순히 명나라 여인이 조선 땅에 묻혔다는 것만으로 나의 흥미를 끈 것은 아니다. 굴씨 여인은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던 소현세자를 모시다가, 소현세자를 따라서 조선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소현세자가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의문의 죽음을 – 나는 소현세자의 돌연한 죽음에 아버지 인종이 관련되어 있다는 강한 의심을 떨칠 수가 없다. - 당했을 때도 돌아가지 않고 일생을 마치고 조선 땅에 묻혔다.

 

오직 소현세자만을 바라보고 낯선 조선까지 따라온 명나라 여인이 이곳에 묻혀있다니, 어찌 나의 흥미를 끌지 않을 수 있으랴. 더군다나 근처에 묻혀있는 소현세자의 아들, 손자, 증손자 모두 순탄치 못한 삶을 살지 않았는가?

 

지난번처럼 차를 관산25통 마을회관 앞에 세운다. 그리고 지난번과 반대쪽으로 발길을 놓는다. 대자산에서 뻗어 내려온 야트막한 능선으로 다가가니 기슭에 경안군과 임창군 무덤이 먼저 나타난다. 경안군은 소현세자의 셋째아들이다. 소현세자가 불모 생활을 청산하고 1645년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 소현세자에게는 석철(10살), 석린(8살), 석견(4살)의 세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귀국한 해에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임을 당하고, 다음 해에는 어머니 강빈마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한 후에, 어린 3형제는 제주도로 유배된다. 어린 것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머나먼 제주까지 유배를 보내나? 더구나 자기 손자들을! 인조라는 인간, 참으로 비정하다. 졸지에 부모를 잃고 낯설고 물선 제주에 유배되어 온 아이들이 제대로 살 수 있을까? 결국 1648년 9월에 병으로 석철이 먼저 죽고, 석린은 12월에 죽어, 막내 석견만 살아남는다. 석철과 석린은 인조가 죽였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1649년에 즉위한 효종은 그다음 해에 석견의 유배지를 강화도로 옮겨주었다가, 6년 뒤에 귀양에서 풀어준다. 그러나 석견은 어려서부터 마음고생, 몸 고생이 심하였는지 1665년에 불과 22살의 나이로 형들을 따라간다. 다행히 그사이 1659년 복권되어 경안군으로 봉해지고, 이어서 분성군부인 허 씨와 혼인하여 그사이 아들 2명을 낳아 후손은 이어갈 수 있었다.

 

경안군 바로 아래에 묻혀있는 임창군은 경안군의 첫째 아들이다. 그런데 임창군 역시 순조로운 삶을 살 수 없었다. 만약에 효종이 임금이 되지 않았다면 임창군은 왕이 될 수도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소현세자가 죽은 뒤에는 그의 아들이 세손으로 왕세자가 되어야 할 것이고, 큰아버지 석철, 석린이 죽었으니 아버지 경안군에 이어 임금이 될 수도 있었던 것 아니겠는가?

 

그러나 인종은 소현세자가 죽었을 때 그의 큰아들 석철 대신 소현세자의 동생 봉림대군을 왕세자로 봉했다. 석철이 어리다는 이유를 댔지만, 왕세자가 되는 데 10살이란 나이는 전혀 결격사유가 될 수 없다. 그렇기에 왕위 계승이 잘못되었다는 얘기가 돌면 임창군은 자신의 진의와는 상관없이 자칫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었다. 왕위를 위협하는 요소이니 제거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상소가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1679년(숙종 5) 결국 일이 터졌다. 강화도에서 임창군이 왕실의 종통이니 그를 보위에 올려야 한다는 흉서(凶書)가 나돈 것이다. 당시 숙종은 한양 방위를 위해 강화도에 많은 돈대를 쌓게 했는데, 그러기 위해선 백성들의 경작지를 강제수용해야 하고, 또 축성공사에 백성들을 동원해야 했다. 그러니 이에 불만을 품은 여론을 타고 흉서가 나돈 듯하다. 그런데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숙종은 임창군 형제를 제주도로 귀양 보내는 것에 그쳤다. 그리고 1685년(숙종 11)에는 유배를 풀어주고 직첩도 돌려주었다.

 

임창군 무덤을 지나 나지막한 능선 위로 오르면 바로 밀풍군의 무덤이 나온다. 그런데 임창군의 아들 밀풍군은 결국 그런 화를 비켜나지 못했다.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이 발생하였는데, 이들은 밀풍군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밀풍군을 임금으로 추대하였다. 임창군 때는 단순히 흉서만 나돈 것이지만, 이번에는 직접 반란이 터졌으니, 일은 더 커진 것이다. 결국 밀풍군은 영조가 자진할 것을 명하여 목숨을 잃는다.

 

왕조국가에서 왕자의 자리는 이렇듯 영광스러운 자리이기도 하지만, 자칫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수도 있는 자리다. 세종 때 그의 형 양녕대군이나 성종 때 그의 형 월산대군도 자칫 목숨을 잃을 수 있었다. 세종이나 성종이나 형을 제치고 임금이 된 것이니, 위험요소를 사전에 없애야 한다는 신하들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형제애가 두터운 세종과 성종은 형들을 보호하였고, 양녕대군이나 월산대군도 일체 정치 쪽에는 눈길을 돌리지 않고 풍류 속에 세월만 낚은 것이다.

 

드디어 제일 궁금하였던 궁녀 굴씨의 무덤 앞에 왔다. 비석에는 ‘소현세자 청국(淸國) 심관(瀋舘) 시녀 굴씨지묘’라고 새겨져 있다. 굴씨는 명나라 강소성 소주 지방 양인 출신의 딸로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의 황후를 모시는 궁녀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명나라가 멸망할 때 청나라에 잡혀 심양에 끌려왔다가, 소현세자의 시녀가 되었다. 그리고 소현세자가 조선으로 돌아갈 때 굴씨도 계속 소현세자를 모시기 위해 조선으로 따라온 것이다.

 

비석에 새겨진 ‘심관’이란 소현세자가 심양에 머물 때 거주하던 공관을 말함이리라. 그런데 소현세자는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의문의 죽임을 당하니, 굴씨는 졸지에 자신이 모시던 상전을 잃었다. 무덤 앞의 안내문에 따르면, 이후 굴씨는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를 모셨으며, 소현세자의 손자인 임창군을 보살펴 주며 여생을 보내다가 70살에 죽어 여기에 묻혔다고 한다.

 

 

굴씨는 죽을 때 유언하길, “청나라 오랑캐는 나의 원수요. 내 생전에 청 오랑캐의 멸망을 보지 못하고 죽게 되었지만, 행여라도 그럴 기회가 있다면 내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볼 것이오. 허니 내가 죽거든 청나라로 가는 길가 서쪽 교외에 묻어다오.”라고 했다나?

 

그리고 굴씨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미미하니 전하는 얘기에는 ‘청 태종의 아들이 그녀를 보고 구애하였으나 굴복하지 않았다’, ‘비파를 잘 연주하고 새와 짐승을 기르는 신비로운 재주가 있었다’, ‘명나라 예법을 전해주고 청나라와의 외교 마찰 완화, 공녀의 인원을 줄이는 데도 이바지했다’라는 등 조미료가 가미되었다. 소설가라면 이런 야담 같은 이야기도 버무리고 문학적 상상력을 펼쳐, 격랑에 휩쓸려 들어간 굴씨의 일생에 소현세자와의 사랑 이야기를 더하여 멋진 소설 하나 지어냄직도 하겠다.

 

굴씨 여인의 무덤을 바라본다. 안내문대로 불그스름한 무덤에는 풀도 별로 없다. 굴씨 여인의 한이 지금도 밖으로 발산되고 있기에 풀이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것인가? “이름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명나라 여인이시여! 당신 얘기 듣고 찾아온 후생은 이제 물러가나이다. 편히 쉬소서.” 나는 조용히 굴씨 여인을 향해 묵념을 올리고 능선을 내려간다.

 

이제 내가 여기 오고자 한 답사 목적은 달성하였다. 그러나 저번에도 경혜공주와 정종의 무덤을 답사하고는 그 위의 건자산으로 향했는데, 오늘도 그냥 돌아가서는 안 되겠지? 더구나 대자산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고양누리길의 일부 구간이기도 하지 않은가? 하여 나는 차로 향하던 발길을 돌려 대자산 정상으로 향한다. 도중에 고양누리길 옆에 있는 최영 장군의 무덤도 돌아볼 생각을 하면서...

 

 

양승국 변호사 yangaram@lawlogo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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