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듣는 감동하게 하는 그 이름, 경복궁

2023.12.18 12:28:23

《시가 흐르는 경복궁》 글ㆍ사진 박순, 한언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34)

천하의 일이 부지런하면 다스려지고

게으르면 망하는 것은 필연의 이치입니다.

작은 일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정사(政事)와 같은 큰일은 어떠하겠습니까?

 

천하의 일이 부지런하면 다스려지고 게으르면 망한다…자못 모골이 송연해진다. 군주에게 부지런하게 일해야 한다고, 게으르면 망한다고 ‘돌직구’를 날리는 정도전의 기개가 매섭다. 심지어 건물 이름도 ‘부지런하게 정치하라’는 뜻의 ‘근정전(勤政殿)’이니, 거기서 정사를 보는 임금은 자신도 모르게 태도가 엄정해지지 않았을까?

 

조선왕조는 문치 국가였다. 과거에 합격한 인재들은 모두 시작(詩作) 능력이 출중했다. 시 짓는 솜씨가 문재를 판별하는 주요 기준이었으니, 어릴 때부터 시를 쓰며 자라난 이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필수 교양으로 시를 쓰고 읊었다.

 

조정에 출사한 최고의 문사(文士)들이 임금 곁에 머물며 늘 바라보는 장소가 경복궁이었던 만큼, 이들이 경복궁에 대해 지은 시문도 많이 남아 있다. 한문학자인 지은이 박순이 쓴 이 책, 《시가 흐르는 경복궁》은 경복궁을 주제로 옛 문인들이 쓴 글과 시에 지은이의 독창적인 관점을 덧붙인 책이다.

 

 

책에 실린 글이 모두 깊이 음미할 만하지만, 그 가운데 역시 심금을 울리는 것은 조선왕조의 설계자, 정도전의 글이다. 그가 남긴 글을 보면, 정도전이 단지 일신의 영달을 위해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지 않았으며 백성을 위하는 지속 가능한 시스템을 만들고자 했던 의지가 느껴진다.

 

(p.20)

신(臣)은 생각하건대, 궁궐이란 임금이 정사를 다스리는 곳이요, 사방이 우러러보는 곳이요, 신민들이 다 나아가는 곳이므로, 제도를 장엄하게 해서 존엄함을 보이고 이름을 아름답게 지어 보고 듣는 자를 감동하게 해야 합니다.

 

지은이는 정도전이 이름을 지을 때 ‘조선의 국시인 성리학의 깊은 뜻을 담아내야 한다.’라거나 ‘나라의 안녕과 부강함을 지향하는 이름을 붙여야 한다.’라고 하지 않고, ‘보고 듣는 자를 감동하게 해야 한다’라고 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궁궐의 이름은 무릇 백성을 감동케 하는 것이 으뜸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감동’의 힘을 알았다.

 

(p.28)

그러나 『춘추(春秋)』에 이르기를, ‘민력을 중히 여기고 토목 공사를 삼가라’고 하였으니 어찌 인군으로서 한낱 백성들만 부지런히 일하도록 하여 자신을 받들게만 할 것입니까? 편안하게 넓은 집에서 살 때에는 가난한 선비들을 보호할 것을 생각하고, 서늘하게 전각에서 살 때에는 맑은 그늘을 나누어 줄 것을 생각하여야 만민들이 받드는 의의를 저버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울러 말씀드렸습니다.

 

지은이는 ‘서늘하게 전각에서 살 때는 맑은 그늘을 나누어 줄 것을 생각하라’는 짧은 문장이 시선을 오래 머무르게 한다고, 그만큼 진심이 담겨 있다고, 아름다운 문장이라고 썼다. 임금은 넓은 집에서 추위와 더위를 모르고 살더라도 ‘가난한 선비들을 보호할 것을 생각하고 맑은 그늘을 나누어 줄 것을 생각하는’ 마음을 반드시 새겨야 한다. 그래야 만민들이 떠받드는 의의를 저버리지 않을 수 있다.

 

정도전의 ‘부지런함의 기술’에 대해서도 설파한다. ‘인군이 부지런해야 하는 것만 알고 부지런해야 하는 까닭을 알지 못한다면 끝내 그 부지런함은 번잡하고 까다롭게만 될 뿐이므로 볼만한 것이 못될 것이다’라고 했다. 실로 맞는 말이다. 무엇을 어떻게 부지런하게 해야 할지 잘 알고 행하지 않으면 ‘번잡하고 까다롭게만 될 뿐’이니, ‘설치는 것’과 ‘부지런함’의 차이는 여기서 온다. 그렇다면 정도전이 생각하는 ‘부지런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p.35)

선유(先儒)들이 말하기를, “아침에는 정사를 행하고, 낮에는 어진 이에게 묻고, 저녁에는 명령할 일들을 가다듬고, 밤에는 편안히 쉰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인군의 부지런합니다. 또 말하기를, “현명한 이를 구하는데 부지런하고, 현명한 이에게 정사를 맡기는 데 편안히 한다.” 하였습니다. 신이 이러한 말들을 올려 청할 따름입니다.

 

인재를 구해 자문을 얻는 데 부지런해야 하고, 또 밤에는 편안히 쉬는 것 또한 임금의 책무이니 쉬는 것에도 부지런해야 한다는 것이다. 밤에 편안히 쉬어야 낮에 집중하여 나랏일을 돌볼 수 있으니, 잘 쉬는 것 또한 임금의 중요한 일과다. 그래서 정도전은 임금의 침전을 건강과 안녕을 비는 뜻을 담아 ‘강녕전’이라 이름 지었다.

 

이렇듯 경복궁의 이름에 얽힌 글과 시문을 하나하나 읽다 보면, 정도전이 원했던 바대로 감동이 일어난다. 이 책에 실린 다른 글과 시문도 많지만, 경복궁의 이름에 담긴 백성을 위하는 마음, 그것이 가장 마음을 움직이는 것 같다.

 

경복궁에 살다 간 임금들 가운데는 가난한 선비를 보호하거나 맑은 그늘을 나누어 주지 않은 이들도 많았다. 그러나 조선왕조 개국 당시의 엄정한 기상은 맑고도 높았다. 경복궁을 찾을 때마다 이런 기상을 되새겨 보면 좋겠다. 특히 나랏일을 하는 이라면 두고두고 읽으며 음미할 만한 책이다.

 

 

우지원 기자 basicfor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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