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의 김유정과 들병이

2024.03.10 10:59:54

[정운복의 아침시평 200]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춘천을 대표하는 문인 김유정의 본관은 청풍입니다.

10대조가 대동법 시행에 크게 공헌한 명재상 김육이고,

9대조는 명성황후의 아버지인 청풍부원군 김우명입니다.

집안도 춘천에서는 꽤 명망 있고 부유한 지주였지요.

 

그런데 형 유근이 집안의 재산을 탕진하여 가난에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병으로 인해 춘천으로 내려온 그는 들병이들과 어울리며 술에 빠져 살았다고 하지요.

김유정 대부분의 단편은 그 시절에 쓰입니다.

 

김유정은 박녹주라는 판소리 명창을 사랑했습니다.

이미 남편이 있었던 박녹주는 김유정을 받아 줄 수 없었지요.

요즘 스토커 수준으로 박녹주에게 애정을 갈구하고 편지와 혈서를 보내지만

사랑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김유정은 삶을 다할 때까지도 박녹주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29살로 요절했을 때 방안에는

'녹주, 너를 연모한다'라는 혈서가 벽에 붙어있었다고 하지요.

 

‘들병이’는 매춘부를 부르는 다른 이름입니다.

병을 들고 다니면서 잔술을 팔고, 뜻이 맞으면 매춘까지 이르는 비교적 천한 직업을 의미합니다. 먹고 살기도 힘들었던 삶이 팍팍했던 시절에는 자신의 의지와 다른 삶을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고 그 애환이 작품으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기생은 조선시대 직업 가운데 하나입니다.

잔치나 술자리에서 노래나 춤 또는 풍류로 흥을 돋우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여자를 의미하지요.

일패 기생은 매춘을 거의 하지 않았고

이패 기생은 음지에서 때에 따라 하였으며,

삼패 기생은 매춘을 거의 업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들병이는 삼패 기생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들병이는 늙은 퇴기(退妓)들이 마지막으로 발버둥 치는 막장입니다.

눈 아래 자글자글 잔주름이 지고 젖무덤과 엉덩이가 축 처져 한물가면

이패(二牌)가 됐다가 삼패(三牌가 되는 것이 그 세계의 불문율이지요.

어찌 되었거나 힘없고 가난했던 소시민들의 삶을

문학으로 승화시킨 것은 대단한 업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의 고향은 저 강원도 산골이다. 춘천읍에서 한 이십 리가량 산을 끼고 꼬불꼬불 돌아 들어가면 내닫는 조그마한 마을이다. 앞뒤 좌우에 굵직굵직한 산들이 빽 둘러섰고 그 속에 묻힌 아늑한 마을이다. 그 산에 묻힌 모양이 마치 옴팍한 떡 시루 같다고 하여 동명을 실레라 부른다."

수필 '오월의 산골짜기'에서 실레마을 풍경을 표현한 글입니다.

 

 

서울서 춘천 오는 길목 김유정역에 내려

그의 문학의 원류와 삶의 애환을 느껴보시면 좋을 것입니다.

강원도의 산과 계곡, 강과 호수를 따라 굽이치는 길 끝에

반짝이는 서민들의 삶이 녹아있는 곳이니까요.

 

 

정운복 칼럼니스트 jwb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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