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계속 산길을 가는데, 왼쪽 바위틈에 토종벌통 3개가 보인다. 벌통의 나무 색깔로 보아서 최근에 만들어놓은 것 같다. 농약으로 인해 요즘 벌들이 수난을 당하는데, 토종벌들은 무사한지 걱정이 된다. 지리산에서 벌을 키우는 친구에게 전화 걸어서 물어보니, 토종꿀은 1년에 단 한 번 늦가을 서리가 내린 뒤에 수확하기 때문에 더 귀한 꿀로 간주한다고 한다. 이에 견줘 양봉꿀은 한 해에 많게는 세 번까지 수확할 수 있다. 최근에 지구온난화로 인하여 봄이 되면 꽃이 순차적으로 피지 않고 일제히 피기 때문에 꿀을 많이 수확하기가 더 어려워졌다고 한다.
산길을 따라 계속 걸어가는데, 아주 예쁘게 꽃밭을 가꾼 시골집이 나타난다. 정원에는 으아리, 장미, 황금낮달맞이꽃 등이 예쁘게 피어있다. 내가 시골에서 살아보니 외딴집에 사는 것보다는 이웃이 있는 마을에서 함께 사는 것이 더 좋다. 외딴집은 경치가 좋고 또 조용하므로 살기 좋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막상 시골에서 살아보면 이웃이 있는 집에서 사는 것이 좋다. 사람은 무리 지어 함께 사는 동물의 한 종(種)일 뿐이다. 산속 깊은 곳에서 혼자서 살 수는 있으나 이웃이 없으면 사는 재미는 줄어든다.
우리는 뱃재에서 내려오는 31번 도로를 작은 터널로 가로질러서 옛 도로와 다시 만났다. 지도에는 서동로라고 표시되어 있다. 길 입구에 보현선원이라고 큰 간판이 서 있다. 우리가 내려온 산길 근처 어딘가에 선원이 있나 보다. 아직 보현선원에는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서동로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접어들어 마을길로 들어섰다. 나타나는 집들이 모두 근사하고 정원도 잘 가꾸었다. 농사짓는 토박이 집이 아니다. 아마도 서울 부자가 여름에만 사는 별장이거나 은퇴한 뒤 귀촌해서 사는 사람의 집일 것이다. 마당에 주차되어 있는 차도 모두 좋은 차들이다. 예쁜 집과 함께 예쁜 꽃들을 계속해서 만났다.
마을 안쪽으로는 맑은 개울물이 졸졸 소리를 내며 흐른다. 여기저기 감자밭 옥수수밭이 보인다. 길가에 심은 뽕나무에는 검게 익은 오디가 달려 있다. 보리수나무에는 발갛게 익은 보리수 열매가 달려 있다. 벚나무에는 검은 버찌가 익어가고 있다. 우리는 모처럼 소년, 소녀 시절로 되돌아갔다. 이빨이 검어지는 줄도 모르고 오디와 버찌를 따 먹었다.
우리는 상촌교를 서쪽으로 건너서 다시 둑길을 따라 남쪽으로 걸어갔다. 둑길 양쪽으로 큰금계국이 노랗게 피어있다. 큰금계국은 꽃은 예쁘지만, 번식력이 좋아서 2~3년만 지나면 원래 그 자리에서 자라고 있던 토종식물을 모조리 고사시키고 자리를 차지한다고 한다. 국립생태원은 2018년에 외래 식물 정밀조사를 통해 큰금계국을 ‘생태계 위해성 2급 식물’로 지정했다. 꽃이 예쁘다고 일부러 심을 식물은 아닌 것 같다.
꽃길 따라 조금 내려가니 오른쪽에 주진리 게이트볼장이 나온다. 시골 마을에 이처럼 근사한 실내 경기장이 있다니, 우리나라가 생활 수준이 많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최근에 체육시설 측면에서 도농 격차가 많이 줄어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길가에 큰 돌을 얹은 비석이 서있다. 돌에는 주나루라고 쓰여 있다.
비문을 읽어 보니 다음과 같다.
주나루란 나룻배로 강을 건너다니던 뱃터 거리를 말하는 이곳의 옛 지명입니다. 주변에는 선사시대부터 선조들의 주거지로 추정되는 유물인 토기, 돌연모, 고인돌 등이 산재해 있고 앞산 용산(龍山)의 용산정(龍山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던 곳인데 용산정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이여림(李汝霖)이 100리 밖 횡성에서 왜병과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하자 그의 애마가 주인의 수구를 물고 와서 슬피 울다 주인을 따라 용담(龍潭)에 뛰어들어 죽으니 이 뜻을 기리고자 부락인 우필규(宇弼奎), 이원일(李元逸) 씨 등이 기금을 모아 용산정(龍山亭)을 건립하였으나 6·25전쟁 때 불에 타 현재는 흔적만 남아있다.
이렇게 긴 비문은 한 줄짜리 짧은 문장과 6줄이나 되는 긴 문장으로 쓰여 있다. 문장이 짧을수록 좋은 글이 되는데 이 비문을 쓴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으나 국어 공부 좀 더해야 할 것 같다.
주나루 비석이 있는 곳이 평창강의 북쪽인 주진리이다. 주진리는 본래 평창군 북면의 지역으로서 《조선지지》와 《평창읍지》에 ‘舟津里’라고 표기되어 있다. 나루 둘이 있으므로 ‘두나루’라고 하던 것이 변하여 주나루가 되었다고 한다. 1934년에 현대식 콘크리트 다리인 주진교가 놓이기 전까지 하촌(下村) 배터거리에서 강 건너까지 사람과 우마차 등을 실어 날랐다. 그러므로 초등학생이었던 효석은 평창강을 이곳에서 나룻배를 타고 건넜을 것이다.
주나루를 지나 바로 만나게 되는 평창강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평창읍에 상수도를 공급하기 위하여 작은 보를 막고 취수장을 만들었다. 이 지역이 상수원보호구역이라고 알리는 큰 간판이 보인다. 이 일대의 평창강은 녹색 산, 파란 하늘과 어울려 아름다운 경치를 보여준다.
우리는 멋진 경치를 바라보며 둑길을 걸었다. 둑길의 왼편, 강 쪽으로 야간에 불을 밝히는 기둥을 연이어서 세워놓았다. 밤에 이 길을 걷는다면 멋진 야경이 펼쳐질 것이다. 용항교를 만나 다리를 건너갔다.
다리 건너 평창강의 남쪽이 용항리(龍項里)이다. 마을 남서쪽에서 뻗어 내린 산자락이 마치 용의 목처럼 생겼다고 해서 ‘미르목’ 또는 ‘용항’이라 하였다. 대부분이 완만한 산지를 이루는 마을로 평창강이 곡류를 이루며 마을을 감싼다. 우리는 다리 건너 오른쪽에 있는 용항리 경로당에서 이날의 답사를 마쳤다. 시계를 보니 12시 40분이다.
효석문학100리길 제4구간 10km를 8명이 걸었다. 시간은 3시간 10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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