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이효석문학관에서 해설사로 근무하는 황병무 선생에게 다리외 사진과 관련하여 질문을 해보니 <향수>라는 글에 단서가 있다고 한다. <향수>는 효석이 1939년 9월에 발표한 단편소설이다. 소설의 내용은 평양의 도시 생활에 지친 아내가 모처럼 경성의 시골집으로 쉬러 떠나는 이야기이다. 효석과 아내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소설에서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혼자 내빼구 집안은 어떻게 하려구.”
그러나 마침 일가 아이가 와 있던 중이었고 아내의 시골행 결심도 사실은 거기에서 생겼던 까닭에 이것은 하기는 헛걱정이기는 했다.
“나 혼자 남겨 두구 맘이 달지 않을까.”
“에이구 어서 없는 새 실컷 군것질 해두 좋아요. 얼마든지 하라지. 지금에 시작된 일인가 머. 이제 다 꿈만 하니.”
“큰소리 한다. 언제 맘이 저렇게 열렸던고. 진작.....”
소설에서 아내는 남자의 바람기를 흥미롭게도 ‘군것질’이라고 비유하였다. 아내인 이경원은 미술학도로서 여고 졸업 작품 전시회에서 효석을 처음 만났다. 집안이 부자였던 그녀는 미술 공부하러 동경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효석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혼인하고 애를 낳고, 결국은 유학의 꿈을 접었다.
그러므로, 예술을 이해하는 아내는 작가인 효석이 외국 여배우의 사진을 응접실에 걸어놓아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또 한 가지. 1930년대의 조선은 유교가 중심인 사회로서 남성 중심 또는 남존여비의 사회였음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에서는 남자가 바람을 피우거나 첩을 두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효석의 부인 이경원은 보기 드물게 너그러운 여자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제 답사기로 돌아가자. 평창강 따라 조금 걷자, 백리길 표지판이 나타났다. 표지판은 다음 목적지가 ‘후평뜰’이라고 알려준다. 표지판을 따라 경사가 제법 있는 고갯길을 힘들게 올라갔다.
한참 올라가다가 염소를 기르는 집이 있는 삼거리에서 왼쪽 길로 접어들었다. 곧 산길이 나타났는데 조금 가다가 길이 끊어진다. 덤불과 잡목을 헤치며 20여 미터 올라가도 길의 흔적이 없다. 나는 당황했다. 평창군에서 발행한 소책자에 진한 실선으로 표시되어 있는 백리길 제5-1구간이 어디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후손들이 찾지 않아 황폐해진 무덤을 두 개나 지나도 길은 보이지 않는다. 전문 산악인인 김수용 선생과 함께 맨 앞에 서서 아무리 찾아보아도 길은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 말했다. 산에서 길을 잃으면 되돌아가는 것이 원칙이라고. 그래서 오던 길을 되돌아가 염소를 기르는 집에 다시 도착했다. 시계를 보니 10시 40분. 걷기 시작한 지 1시간이 넘었다. 우리는 나무 그늘 밑에서 잠시 쉬기로 했다.
여러 사람이 간식을 준비해 와서 먹을 것이 풍성했다. 우리는 삶은 달걀, 군고구마, 오이, 토마토, 샌드위치, 단호박, 사탕 등을 먹으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의 주제는 시골 생활의 즐거움, 텃밭 이야기, 잡초와의 전쟁 등 도시 사람들의 주요 관심사인 경제(돈)와는 관련이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간식을 먹고 나서 커피까지 마시니 모두 만족한 표정이다.
다른 사람들은 잠시 기다리고, 김수용 선생과 내가 다시 길을 찾아 나섰다. 아무리 찾아도 길을 찾을 수 없었다. 11시경에 우리는 길 찾기를 포기하고 올라왔던 고갯길을 다시 내려갔다. 용항리 경로당에 주차한 차를 타고 31번 도로를 따라서 작은재(주: 카카오맵에 작은재라고 표시되어 있음) 너머 남쪽에 있는 후평뜰로 갔다.
후평리(後坪里)는 평창읍에서 북쪽으로 국도변에 접해 있는 마을이다. 본래 평창군 북면의 지역으로서 평창 뒤쪽 들에 있는 마을이므로 뒷들이라 하였다. 예로부터 논을 경작하는 농가가 읍내에서 가장 많은 마을이 후평리다. 아직 후평리에는 논이 많다. 이날 후평뜰에는 모내기는 이미 끝났고 벼는 물속에서 튼튼하게 자라고 있었다. 최근 들어 평창소방서와 상하수도사업소가 후평리에 들어와 있다.
해가 비치면서 조금씩 기온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땀이 날 정도는 아니다. 시계를 보니 11시 45분이다. 후평리 중간에 있는 버스정류장에서 잠시 쉬었다.
평창군에 사는 향토사학자 정원대 선생이 발표한 <평창의 동학농민군 전적지 고찰>이라는 글에 따르면 1894년 11월 2일 평창읍 후평리와 중리에서 전투가 있었다. 동학농민군이 민보군(民堡軍: 유림 세력으로 이루어진 군대)과 순중군(巡中軍: 원주에 있던 순무영에서 파견된 군대) 그리고 일본군으로 이루어진 반농민군과 맞붙어 싸웠는데, 동학군은 1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서 정선으로 물러났다. 전투가 끝난 뒤 동학 접주 이문보 등 5명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고 한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서 깊이 감동하였다. 지금부터 130년 전에 강원도 깊은 산골 마을인 평창에서 농민들이 동학에 가담하고 일본군과 싸웠다니! 가족과 집을 떠나 동학군에 가담한 농민 전사의 고뇌와 숭고한 희생에 저절로 고개가 숙어진다.
우리는 버스 정류장에서 10분 정도 쉬고서 다시 출발하였다. 평창군 상하수도사업소와 소방서를 지나 평창읍의 북쪽으로 진입하였다. 평창읍의 북쪽에 진산(鎭山: 도읍의 뒤쪽에 있는 큰 산을 말함)인 노산(魯山, 해발 386m)이 있다. 노산에 있는 성곽을 노산성, 또는 노산고성이라고 부른다. 《신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성의 둘레가 1,364척(414m) 높이가 4척(1.32m)이며 샘이 솟는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 선조 초에 김광복 군수가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성곽을 고쳐서 쌓았다고 전해진다.
노산을 오르는 길 중간에 활터가 있다. 취미로 활쏘기하는 김수용 선생의 설명에 따르면 국궁의 표적은 거리가 145m라고 한다. 활터(평창정)는 석회암이 빗물에 녹아 내려 푹 꺼진 커다란 돌리네(Doline)에 있어서 활터로 안성맞춤이었다. 활터를 지나자 흙길이 구불구불 이어졌다.
성곽 흔적이 곳곳에서 보였다. 한참 오르다 보니 효석문학100리길을 알리는 조형물이 두 개 나타났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문학길의 제1구간에서는 조형물과 돌비석이 여럿 있었는데, 제2구간부터는 표지판 말고는 조형물이 없었다. 구간마다 창의적이고 특색 있는 조형물을 만들어놓으면 좋을 것 같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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