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의병장의 스승이었던, 남명 조식

  • 등록 2025.05.12 12: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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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 선생의 삶과 가르침》, 한국선비문화연구원 김경수, 글로벌콘텐츠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148)

선생이 사람을 가르칠 때는 각각 그 재능을 살펴서 그것을 도탑게 했다. 질문이 있으면 반드시 그를 위하여 의문 나는 뜻을 분석하여 말이 미세한 곳에까지 파고들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환하게 의문이 풀린 뒤에야 그만두었다.

 

1561년은 조선 교육계에 특별한 일이 일어난 해였다. 퇴계 이황이 이끄는 도산서당이 안동의 청량산 줄기에 세워졌고, 남명 조식이 이끄는 산천재가 산청의 지리산 자락에 세워졌다. 이 두 학교는 당대의 으뜸 사립대학으로 나라를 지킬 인재를 키워내는 산실이 되었다.

 

한국선비문화연구원 책임연구원인 김경수가 쓴 이 책, 《남명 선생의 삶과 가르침》은 조선 역사상 가장 성공한 교육자였던 남명 조식의 삶과 교육관을 조명한 책이다. 40년 가까이 남명학을 연구한 지은이는 사회에 남명 정신이 더 널리 퍼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간 공부한 내용을 쉽게 정리하여 책으로 펴냈다.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남명 조식(1501~1572)은 독보적인 학문적 경지를 이룩해냈다. 무엇보다 잘못된 정치를 비판하는 <단성소>, <무진봉사> 등의 상소를 올려 천지를 진동케 했고, 비록 벼슬에 직접 나아가지는 않았으나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여 나라와 조정에 이바지했다.

 

그의 교육이 빛을 본 것은 역설적으로 국난을 맞아서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0명이 넘는 제자들이 거병해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켰다. 이런 일은 인류역사상 찾아보기 어려운 특별한 경우라고 한다. 한 스승에게서 배운 제자 집단에서 이처럼 많은 의병장이 배출된 것은 스승의 가르침이 때를 만나 싹을 틔운 결과라고 볼 수밖에 없다.

 

남명의 제자로 가장 유명한 이들을 꼽으면 곽재우, 정인홍, 김효원, 정탁 등이 있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많은 활약을 한 곽재우, 정인홍, 김면이 모두 남명만을 스승으로 모신 제자들이다. 그 가운데 정인홍이 광해군이 즉위한 뒤 북인의 영수가 되었고,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축출되면서 남명의 제자들은 정권에서 배제되어 크게 빛을 보지 못했다.

 

비록 정계의 주류가 되지는 못했지만, 수많은 명제자를 배출한 남명의 교육관은 오늘날 보아도 울림이 있다. 남명은 우선 ‘마음속에 확고한 자아정체성을 확립하고(敬), 이를 토대로 불의에 맞서서 끝까지 싸우는 힘(義)’을 강조했다. 스스로 수양을 통해 단단해지고, 외부 현실을 바꿀 역량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남명이 제자들에게 크게 두 가지를 가르친 것으로 요약했다. 첫째는 벼슬에 나갈 때와 나가지 않을 때를 정확하게 판단하라는 것이었다. 진퇴의 때를 아는 것은 정쟁에서 패배하면 목숨까지 잃던 시절, 목숨을 보전하고 자신의 소신을 지켜내는 지름길이었다.

 

(p.154)

선비로서 위로는 천자에게 신하 노릇을 하지 않고, 아래로는 제후에게 신하 노릇을 하지 않는 자가 있었으니, 그들은 비록 나라를 나누어 주더라도 이를 조그만 물건처럼 가볍게 생각하여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품고 있는 포부가 크고 가지고 있는 능력이 무거워 일찍이 남에게 가벼이 자리를 허여하지 않았다. 용을 잡는 기술을 가진 사람은 희생*을 잡는 부엌에 들어가지 않고, 왕도*정치를 보좌할 수 있는 사람은 패도*정치를 하는 나라에 들어가지 않는 법이다.

 

* 희생 : 제사 지낼 때 제물로 바치는 산 짐승

* 왕동 : 임금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 패도 : 정도(正道)에서 벗어남

 

둘째는 기회가 되면 큰일을 할 수 있는 역량을 충분히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아갈 기회가 오면 명확히 나아가 세상에 자신의 역량을 펼쳐 보여야 한다. 좋은 기회를 만나도 스스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p.154)

대장부의 처신은 중후하기는 만 길 우뚝 솟은 산악처럼 하여, 때가 되면 자기의 경륜을 펼쳐 많은 일을 해야 한다. 비유하자면 삼만 근이나 나가는 큰 쇠뇌*는 한 방에 만 겹의 성벽을 깨뜨리지만, 생쥐 한 마리를 잡기 위해 쓰지 않는다.

 

* 쇠뇌 : 여러 개의 화살을 한꺼번에 쏘는 활

 

남명은 제자를 가르칠 때 반드시 타고난 자질을 보고서 순리대로 격려하는 장점도 있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약포 정탁이 36살에 진주에 부임하여 가장 먼저 산천재로 남명을 찾아 인사를 드리고 제자가 되었다. 1년 뒤 임기를 마치고 떠나게 된 그가 다시 인사를 드리러 오자, 남명은 “우리 집 뒤뜰에 소가 한 마리 있으니, 그것을 몰고 가게.”라고 하였다.

 

정탁은 가난한 스승이 소를 선물로 줄 리가 없다고 여겨 의아하게 생각하며 뒤뜰에 갔지만, 소는 없었다. 다시 돌아와서 소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자 남명이 “내가 소를 몰고 가라고 한 것은 자네의 성격이 급하여 항상 말을 타고 내달리는 것과 같이 행동하므로 소처럼 천천히 매사 처리하기를 바라서라네.”라고 하였다.

 

정탁은 이를 마음 깊이 새겼고, 그 뒤 40여 년의 벼슬살이에서 큰 허물없이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남명의 가르침 덕분이라고 술회했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이순신을 죽이려 할 때 간절한 상소를 올려 결정적으로 이순신을 구명했다.

 

남명 조식은 비록 퇴계 이황이나 율곡 이이와 견주면 오늘날 명성이 크지 않지만, 수많은 의병장을 길러낸 큰 교육자이다. 안으로는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지조를 지키며, 밖으로는 불의에 목숨을 걸고 저항하는 기개의 선비를 양성하는 교육을 했고, 자신도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제자들은 스승의 가르침을 잘 실천하여 결국 우리 역사에서 남명을 빛나는 교육자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다가오는 5월 15일, 스승의 날을 맞아 남명 조식과 같은 역사 속 훌륭한 스승의 삶을 되새겨보는 것도 좋겠다. 선생(先生), 곧 먼저 살다 간 이들의 삶 자체가 하나의 가르침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

 

 

우지원 기자 basicfor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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