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이 쓴 '기상새설’은 국수집 간판

  • 등록 2025.07.25 12: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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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세상에서 열린 세상으로 가는 길 ‘문명 보고서’ 5

[우리문화신문=안동립 기자]  

 

# 열하일기를 따라서, 답사 4일 차

일자 : 2025년 4월 22일(화요일), 이동 거리 214km

숙박 : 북진리펑호텔(北镇丽枫酒店, 锦州北镇店), 0416-666-6666

 

청나라의 심장, 심양고궁

심양은 동북 3성의 중심 도시답게, 출근 시간대에는 도심 진입이 어려워 일찍 서둘러 심양고궁(沈阳故宫)에 도착하였습니다. 간밤에 내린 비로 아침 공기가 차가운데, 입구 광장은 관광객이 인산인해를 이루며 사람들이 몰려 시끄럽고 분주했습니다. 2007년 방문했을 때는 이처럼 복잡하지 않았었는데, 현재는 안내 스피커 소리와 기념사진 찍느라 길을 막고 서 있는 사람, 특히 아무 데서나 피워대는 담배 연기에 정신이 없고 불편하였습니다.

 

가이드인 황일만 사장이 분주하게 다니며 입장권을 사서, 긴 줄을 서지 않고 입장할 수 있었습니다. ‘코로나19’ 이후 중국의 유명 관광지에 들어가려면, 문 입구에서 안면 인식기에 서서, 입장권과 여권을 보여주어야만 입장이 가능합니다. 심양고궁은 후금(청)의 태조 누르하치(애신각라-愛新覺羅), 태종 홍타이지가 사용했던 궁궐로, 그 화려함과 엄청난 규모는 감탄을 자아냈습니다.

 

나는 연암 박지원이 몰래 황궁 담을 넘어서 보았던 광경을 떠올리며, 화려한 황궁을 이리저리 둘러보았습니다. 특히 지붕 용마루 끝에 놓인 ‘어처구니’ 잡상에 대해 강계두 선생님의 상세한 설명은 흥미를 더했습니다. 서유기의 삼장법사,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을 비롯하여 용, 말, 범 등의 형상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내 재미있었습니다. 하지만 병자호란을 일으켰던 홍타이지의 어진이 왕궁 정전에 걸려 있는 모습에 복잡한 감정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연암의 재미있는 흔적을 찾아서

박지원은 1780년 7월 10일과 11일 이틀 동안 성경(심양)에 머물며 고궁을 몰래 넘어가 둘러본 일화와 재미있는 글을 남겼습니다. 황제가 살았던 고궁에 들어간 기록을 보면 “설사 사람을 만나더라도 쫓겨나기밖에 더 하겠습니까”라며 대담하게 고궁에 들어선 그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걸어서 전전(前殿)에 이르렀다. 현판에 숭정전(崇政殿)이라 하였고, 또 정대광명전(正大光明殿)이라는 현판도 붙어 있다. 왼편은 비룡각(飛龍閣), 오른편은 상봉각(翔鳳閣)이라 하였고, 그 뒤에는 3층 높은 다락이 있는데, 이름은 봉황루(鳳凰樓)이다. 좌우에 익문(翼門)이 있고 문 안에는 갑군(甲軍) 수십 명이 길을 막는다. 이 층 8각 집을 대정전(大政殿)이라 하였고, 태청문 동쪽에는 신우궁(神祐宮)이라는 건물이 있어서 삼청(三淸)의 소상을 모셨는데, 강희황제의 어필로 소격(昭格), 옹정황제의 어필로 옥허진제(玉虛眞帝)라 써 붙였다. 도로 나와서 내원을 찾아 한 술집에 들렀다. 어디 가서 함께 실컷 마시자는 것입니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연암은 고궁을 나와 예속재(藝粟齋)에서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쓴 ‘속재필담(粟齋筆談)’과 다음날 가상루(歌商樓)에서 ‘상루필담(商樓筆談)’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열하일기》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였습니다.

 

“저녁 뒤에 달빛을 따라 가상루에 들러서 여러 사람을 이끌고 함께 예속재에 이르렀다. 밤이 이슥하도록 이야기하다가 헤어지다. 장복 더러 혹시라도 나를 찾는 이가 있거든 뒷간에 간 것처럼 대답하라고 일러두었습니다.… 이미 술로 취하게 하고 또 덕(德)으로써 배부르게 했습니다. 라고 하니 여럿이 둘러앉아 듣다가 무릎을 치며 좋아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벌써 달은 지고 밤은 깊었는데 문밖에는 인기척이 끊이지 않는다. 모두 흥이 도도하여 다시 술을 더 데우고 안주를 다시 가져오게 한다.…”

 

“가상루 여러 사람이 마침 난간 밑에 죽 늘어서 있다가 나를 보고 모두 못내 반기며 상점 안으로 맞아들인다. 배생은 또 한 공첩(空帖)을 내어서 글씨를 청한다. 짙은 먹 부드러운 붓끝에 자획이 썩 잘 되었다. 나 스스로 이렇게 잘 쓰일 줄은 몰랐고, 다른 사람들도 크게 감탄하여 마지않는다. 한 잔 기울이고 한 장 써 내치고 하매 필태(筆態)가 마음대로 호방해진다”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조금 눈을 붙였다가 문밖에 사람 소리가 중얼거리기에 곧 일어나 사관에 돌아오니 아직 날이 채 밝지 않았습니다”

 

같은 글을 썼습니다.

 

저는 연암 박지원의 심양(성경)에서 기록한 글을 읽으면서, 그의 호방한 성격과 글재주, 넘치는 해학에 깊이 공감하며 웃음을 금치 못했습니다. 당시 연암 여러 편의 그림과 글을 써 주었다는데, 현재 중국에 남아있는지 알 길이 없어 아쉬웠습니다.

 

 

 

조선관을 찾아서

병자호란 당시 볼모로 잡혀 왔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효종) 일행이 8년 동안 머물렀던 조선관(朝鮮館)을 찾아 나섰습니다. 현재 정확한 옛터는 심양 고궁의 성벽 남동쪽(우측 하단) 모서리에 있는 경우궁(景佑宮) 터를 지나면 나타나는 아파트 자리로 추정됩니다. 이곳은 과거 조선 사신들이 성경(심양)에 오면 묵었던 장소였습니다. 옛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이 자리에서 8년 동안 지내야 했던 세자와 사신들의 고단했던 발자취를 떠올려봅니다. 다음에 다시 찾아오기 위하여 정확한 좌표를 기록해 두었습니다.

동경 E = 123:27:21.64, 북위 N = 41:47:31.41


 

 

요하를 건너 요서 지방으로

심양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서둘러 요서 지방으로 출발하였습니다. 요하(辽河) 중류에 있는 거류하(巨流河) 대교에서 요하를 바라보았습니다. 요하는 큰 강이지만 중류에서는 강폭이 좁고 물살이 없는 나루터였습니다. 이 강을 중심으로 동쪽은 요동 지방, 서쪽은 요서 지방으로 나누어집니다. 연암은 1780년 7월 12일 이 강을 건넜습니다.

 

성경에서 이틀 밤잠을 설쳐 말 위에서 창대와 장복의 부축을 받으며 한숨 자고 가는 도중에 생긴 일화는 《열하일기》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아까 몽골 사람이 낙타 두 마리를 끌고 지나가더라. 하기에, 나는 왜 내게 알리지 않았어. 하고 꾸짖었더니, 창대는 그때 코 고는 소리가 천둥이 치듯 하와 불렀사오나, 아니 깨시는 걸 어찌하오리까?”라고 대답했다. 이 일화를 통해 연암의 인간적인 면모와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었다.

 

전당포에 써준 국숫집 간판, ‘기상새설’

우리 버스는 끝없이 펼쳐진 대평원을 달립니다. 큰 산은 보이지 않고, 미루나무 방풍림 숲에 의지하여 사는 작고 아담한 마을이 이어진다. 이 지역은 수, 당과 고구려가 치열하게 전쟁을 벌였던 역사적인 현장이지만, 아쉽게도 그 흔적을 찾기는 어려웠습니다. 심양을 지키는 신흥 군사 도시로 건설된 신민둔역(新民站)을 찾아갔는데 조용한 도시였습니다.

 

《열하일기》에는 “신민둔의 시가나 점포가 요동보다 못지않게 변화합니다.” 하였고 전당포(典當舖)에 들어가 시를 써주었더니 주인이 간판을 써달라고 하자 ‘기상새설(欺霜賽雪)’이라 썼는데 글씨가 퍽이나 잘 되었다고 주변에서 칭찬하는데, 주인은 “이는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없어요”라고 했다고 합니다.

 

“다음날 북진묘를 구경하기로 되었으므로 일찍 돌아와서 일행 여러 사람에게 아까 일을 이야기하니 허리를 잡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 뒤로는 점포 앞에 ‘기상새설’이란 넉 자를 볼 때마다 이것이 반드시 국숫집이로구나 하였다. 이는 그 심지의 밝고 깨끗함을 이름이 아니요, 실로 그 면발이 서릿발처럼 가늘고 눈보다 희다는 것을 자랑함이다. 여기서 면발(麵)이란 곧 우리나라에서 이른바 ‘진말(眞末, 밀가루)’다.” 자신의 실수를 숨김없이 기록한 연암의 모습은 참으로 재미있고 인간미 넘칩니다.

 

 

팔기군 백기보 마을

연암은 1780년 7월 13일 백기보(白旗堡)에서 묵었습니다. 청나라의 군대조직인 팔기군(八旗軍)은 황기, 백기, 홍기, 남색기 등 여덟 가지 색의 깃발로 구성된 민간 부대로, 병민이 함께하는 군사 조직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백기보는 이러한 백색 깃발 아래 집결되는 마을 단위의 이름입니다. 평상시에는 농사를 짓고 군사 훈련을 받았기에, 집집이 군사와 장비가 있었습니다. 넓은 밭 사이로 방풍림인 미루나무를 심어 사람들은 숲에 기대어 마을을 형성하고 살아가는데, 낮은 일자 가옥(무량 가옥)이 많이 보였습니다. 중국집의 특징은 대들보를 걸치지 않아 지붕 모양이 평상 같은 일자(一字)로 서까래가 없습니다.

 

답사단이 일정상 소흑산 역참은 통과했습니다. 하지만 1780년 7월 14일, 말복(末伏)날 연암이 소흑산에서 묵으며 남긴 기록을 보면 “일행 하인들이 으레 이 소흑산에서 돼지를 삶아서 서로 위로하므로 장복, 창대 역시 밤에 가서 얻어먹겠다고 여쭙는다.… 연암은 한 점방에 들어가 그 중 한 사람이 탁자를 차지하고 ‘신추경상(新秋慶賞)’이란 넉 자를 쓴다. 붓놀림이 매우 간삽하여(꺼칠꺼칠한) 겨우 글자 모양을 이루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저 필법을 보매 저토록 옹졸하니, 내가 정작 한번 뽐낼 때로구나’ 하였다.

 

아직 탁자 위엔 남은 종이가 있기에 내가 걸상에 가 앉아서 남은 먹을 진하게 묻혀 시비를 가리지 않고 커다랗게 ‘신추경상’이라 써 갈겼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내가 쓴 글씨를 보더니 뭇사람에게 소리쳐 모두 탁자 앞으로 달려왔다. 내가 처음 들어올 땐 반가워하지 아니할뿐더러 본체만체하더니, 이제 내 글씨를 본 뒤에 그 기색을 살펴보매 너무 분에 지나치게 반기면서 급히 차 한 잔을 내오고, 또 담배를 붙여 권한다.” 이처럼 연암은 자신의 학문적 기량을 자랑하면서도, 당시 사람들의 반응을 재치 있게 묘사했습니다.

 

 

기자묘 서쪽은 조선 땅

우리는 의무려산 산신을 주신으로 모시는 사당인 북진묘(北鎭廟)를 찾아갔으나, 아쉽게도 늦은 시간이라 문이 닫혀 외관만 보고 발길을 돌렸습니다. 시내로 이동하여 북진고루(北镇鼓楼)를 찾았습니다. 이곳은 명나라의 요동 방어 총사령관 이성량(李成梁, 이성량(李成梁) 장군의 아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로 조선에 파견되었던 이여송(李如松)의 아버지) 장군이 지키던 곳으로, 거란족인 누르하치의 아버지는 죽이고 누르하치는 목숨을 살려주어 훗날 청나라가 일어났습니다.

 

1780년 7월 15일 북진묘를 구경하려고 20리 돌림길을 돌아 신광녕에서 묵었던 기록을 보면 “광녕은 본시 기자(箕子)의 나라여서 옛날에 기자의 우관이 쓴 소상이 있더니, 명(明) 가정(嘉靖) 연간의 난리 통에 타버렸다.… 자네 이번 걸음에 제일 장관이 무엇이던고. 그 제일 장관을 뽑아서 이야기해다오. 하니, 그들은 제각기 본 바를 좇아서 입에 나오는 대로 예기하는데, 저 기와 조각이나 똥 무더기가 모두 장관이니”라고 하였는데, 지금은 연암의 보았던 것을 찾을 수 없었고 화장실만 보았습니다.

 

광녕성의 야경과 활기찬 밤

고구려 안시성으로 추정되는 광녕성(廣寧城) 표석은 북진고루 거리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찾아간 시간이 늦어서 광녕성 옛 거리는 으스름한 조명으로 운치를 더했는데, 여러 무리의 사람들이 시끄러운 음악을 사방에서 틀어놓고 장르에 따라 광장무를 추는 모습이 분주하고 활기 넘쳤습니다. 또 큰 붓으로 바닥에 물을 묻혀 글을 쓰는 이도 있었는데, 그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주민들이 활기차게 살아가는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춤을 추는 사람 가운데는 젊은 여성도 있지만, 나이 드신 주부들이 화려한 복장으로 광장에서, 아침저녁으로 춤을 추는데 문득 살림살이는 어떻게 하는지 궁금해지기도 했습니다. 우리 일행도 옆에서 같이 덩실덩실 춤을 추며 옛 거리를 지나갔습니다.

 

 

조평규 선생이 답사 신청 기간을 놓쳐 낸 벌금으로, 양 한 마리(2,000위안(40만 원) 바비큐를 하루 전에 주문했는데, 기름을 바르고 전기로 정성스럽게 구워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했으며, 양 특유의 냄새까지 나지 않아 정말 맛있게 먹었습니다. 고기의 양이 많아 식당 직원 10여 명과 나누어 먹고도 남을 정도였습니다. 현지인들에게도 특별한 날이 아니면 맛보기 어려운 음식이라 뜻깊은 시간이라고 했습니다.

 

호텔에 도착하니 공안이 직접 나와 여권 검사를 하고 상부에 보고한다고 하여 로비에 내려가 상황을 지켜보았습니다. 30여 분 뒤 여직원이 여권을 가지고 와서 주기에, 저는 여권을 건네받으며 ‘커피 있어요?’ 물어보니, 그녀는 웃으며 호텔 직원이 아니고 ‘공안’이라고 답하였습니다. 잠시 뒤 여직원이 ‘이 호텔에는 커피가 없다’라고 말해, 저는 웃으며 ‘세셰(谢谢)’ 하였습니다. 알고 보니 정복을 입은 공안 남자 세 명과 퇴근 뒤 사복을 입은 여자 공안 두 명이었습니다. 최근 중국 호텔에서 커피를 제공하는 곳이 많아진 것을 생각하면 재미있는 뒷이야기였습니다.

 

 

안동립 기자 emap4u@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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