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반구대 암각화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을 지나는 태화강의 지류 대곡천의 암벽에 새겨진 암각화다. 신석기시대 후기~청동기 시대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암각화는 선사시대 고래를 비롯해 야생동물의 수렵 그림들, 거기에다 여러 가지 신비한 무늬와 기호 등 고대인들의 생활문화를 전하는 귀중한 유적이기에 얼마 전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 선사유적은 1970년대 동국대학교 문명대 교수가 이를 발견해 널리 알리지 않았으면 물에 잠기거나 씻겨가 그 귀중한 유산이 자칫 없어질 수 있었지만, 드디어는 세계유산으로까지 지정, 보호받게 된 것이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울주군 언양 땅에도 이같이 잊혀져 없어질 위기에 있는 한 일본 여성의 지극한 한국사랑이야기가 묻혀있다. 그 여성의 이름은 구와바라 다키(桑原多貴), 1890년 일본 큐슈 가고시마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경찰관인 구와바라 다케오(桑原隆夫 1887~1943)와 결혼을 했고, 남편이 일제시대에 울산경찰서장에 부임을 하자 그를 따라 울산에 와서 살았다고 한다.

남편이 정확히 언제 부임했는가 하는 기록은 남아있지 않은데 남편은 울산에서 경찰서장이란 직위를 이용해 불법으로 돈을 많이 모아 전답을 많이 사 모았다고 한다. 이런 사건이 전해진다. 울주군 언양읍 구수리를 흐르는 대암천에는 1968년부터 1969년 사이에 생활용수를 얻기 위해 높이 27미터, 길이 318미터의 댐을 만들었는데, 댐을 만들기 전에는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축선사라는 오래된 절이 있었다.
1929년에 근처에 살던 신 씨라는 한 주민이 절의 탑 부근 황무지를 개간하다가 땅속에서 석곽을 발견했는데 그 안에서 오색찬란한 곡옥이 가득 들어있었다. 당시 마을사람을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된 울산경찰서 삼동 주재소는 이를 울산경찰서에 보고했고 이때 경찰서장인 구와바라가 이 보물들을 욕심내 신 씨를 문화재 도굴 혐의로 구속시키고, 신 씨가 발견한 보물들을 자신이 가로챘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그는 언양 일대에 많은 전답을 소유하게 되었다.
구와바라는 경찰서장에서 퇴직한 이후에는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언양에서 정미소와 양조장을 운영하면서 다른 한국 여자를 구해 딴 살림을 했다. 이에 다키 여사는 남편과 함께 살지 않고 울주군 삼남면 진장마을에서 혼자 사람들을 많이 고용해 누에를 키우며 생활했다. 그런데 남편 구와바라가 해방되기 전인 1943년에 중풍으로 세상을 뜨자 남편이 모아놓은 많은 재산이 다 다키 여사의 소유가 되었다.
다키 여사는 이렇게 많은 재산을 가진 뒤 곧 광족이 되었지만, 그녀는 남편의 산소가 있는 언양에서 살겠다며 일본으로 가지 않고 누에를 키웠다. 다키 여사가 누에를 키웠던 집은 삼남면 진장 언덕에 있었다. 집은 일자형 건물이었고 건물이 길어 방이 많았다. 이 집을 중심으로 주위에는 뽕나무가 많았다. 다끼 여사는 집에서 키운 누에를 모두 언양공판장에 내다 팔았는데 그때 받은 돈의 액수가 언양 사람들에 비해 훨씬 많았다. 그녀는 이 돈 가운데 인건비와 관리비를 공판장에 준 뒤 나머지 돈으로 언양 노인들에게 식사대접을 하는 등 선행을 베풀었다고 한다.

다키 여사는 남편이 모은 재산이 결국에는 언양 사람들의 재산을 빼앗아 모은 것이라 할 수 있으니만큼, 이 재산을 언양의 발전을 위해 써야 하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녀가 누에를 키워 번 돈을 유용하게 썼던 때가 광복 3년 뒤 1948년 언양에 중학교가 세워질 때다. 언양중학교는 1926년 4월 울산에 세워졌던 울산공립농업보습학교가 그 전신이다. 울산공립농업보습학교는 지금 학성아파트가 있는 울산 중구 학성동에 2년제로 세워졌는데 1933년 폐교와 함께 울주군 삼남면 가천리로 옮겨간다. 이사 온 뒤에 학교 이름도 울산공립농림전수학교로 바뀌었다. 2년제로 수업을 시작했던 이 학교에는 임과ㆍ축산과ㆍ원예과가 있었다. 이 학교는 이후 10여 년이 지난 뒤 다시 언양 어음리로 오게 되었다.
이때 다키 여사는 학교가 언양으로 옮겨 가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이에 언양 유지들이 다키 여사 집으로 찾아가 그녀를 설득했고 결국 농림전수학교를 언양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때 다키 여사는 현 학교 터와 자신이 정성 들여 개간했던 진장의 뽕밭을 학교 재산으로 내어놓았다. 당시에 그녀는 이사비용으로 100만 원이라는 큰돈을 내었다. 당시 울산의 내로라하는 부자들이 10만 원을 내놓을 때였다.
언양중학교는 이 밭을 학생들의 실습지로 사용했다. 다키 여사는 이후 일본에 있었던 그녀의 친정 조카를 언양으로 데리고 와 이 학교 교사로 활동하도록 하였다. 해방직전 농림전수학교 학생으로 학교 실습시간에 다키여사 농장을 자주 드나들었던 최석윤(2021년 작고)씨는 "농림전수학교 재학시절 뽕잎을 따기 위해 다키끼여사 집에 자주 갔는데 일반가정에서 보기 힘든 꿀물을 타주셨다. 우리를 볼 때마다 친구를 보려면 얼굴을 보지 말고 성격을 보라고 말했다"라고 회고했다고 한다. 그녀는 그렇게 베푸는 삶을 살았다.

광복 뒤 우리나라에 실시된 농지개혁으로 다키 여사는 그동안 갖고 있던 많은 농지를 다 나라에 내놓아야 했다. 숙식을 해결할 집마저 없어 언양중학교 기숙사에서 살았다는 얘기가 있는가 하면, 학교 부근에서 가난하게 살았다는 얘기도 전해 오고 있다. 그래도 다키 여사는 언양중학교를 찾아와 자신이 상북면 명촌 마을에서 따온 녹차를 교사들에게 선물로 주기도 했다. 명촌 마을에는 지금도 녹차밭이 있다. 그때만 해도 언양중학교 교사들이 녹차를 어떻게 마셔야 하는지를 잘 몰라 다키 여사가 주고 간 녹차를 난로 위에 물을 붓고 끓인 후 당원을 넣어 마셨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다키 여사는 학교에 오면 당시 교무주임이었던 이백수씨를 만나곤 했는데 이 주임은 그녀가 올 때마다 쌀을 조금씩 주었고 다끼 여사는 이 쌀로 끼니를 이어가곤 했다고 한다. 말년의 그녀는 문장수 교장 집에서 지냈으며 한동안 몸이 아파 힘든 시간을 보내었다고 한다. 1950년대 중반 그녀는 세상을 떠나면서 언양중학교가 보이는 곳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언양중학교 동창회는 이런 그의 유지를 받들어 장례식을 학교장으로 치른 뒤 다키 여사가 학교 실습지로 내어놓았던 진장 언덕에 묻었다. 당시만 해도 언양읍에는 큰 건물이 들어서지 않아 이곳에서 보면 언양중학교가 잘 보였다.
그런데 산소가 있던 이곳에 1970년대 중반 경부고속도로 나들목이 들어서는 바람에 언양중학교 동창회는 다끼 여사의 무덤을 정리해 유골을 화장한 뒤 상북면에 있는 보헌사에 다시 모셨다.
다키 여사가 땅을 희사했던 언양중학교는 오래전 대송리로 이사를 가고 지금은 이곳에 언양고등학교가 들어섰다. 울주군 삼남면 진장마을에 있었던 다끼 여사의 농장 건물은 1990년대 말까지만 해도 남아있다가 2000년대 이곳에 골프장이 들어서면서 사라졌다. 2017년에 경상일보 장성운 기자(현 울주문화원 이사)가 마치 반구대 암각회를 발견해 알린 문명대 교수처럼 다키 여사의 행적을 처음 취재해 보도한 바 있다. 그러나 학교가 옮기고 바뀌고 하는 바람에 언양중학교에도 언양고등학교에도 다키 여사를 아는 교사는 이제 없다고 한다.

현재 옛 언양중학교가 있었던 언양고등학교에는 정문 입구 왼쪽에 언양중고등학교 사적비가 있다. 이 비가 세워진 것은 1962년으로 다키 여사가 사망한 지 7년이 된 해였다. 울산의 향토사학자인 이양훈 씨가 최근 이 비석을 읽어보니 거기에 학교 이사할 때의 기부자 명단에 다키 여사 이름이 나온다고 전해준다. 기부액수도 적혀있단다. 일본인으로 척박한 언양 땅에 교육의 씨를 뿌렸던 다키 여사, 사람이 돈을 벌면 그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교훈으로 남긴 이 분에 대해, 말년에 당시 학교 선생님들이 온정을 나누긴 했지만, 전 재산을 언양 교육에 쏟아부은 것을 생각하면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비문에 있는 한두 마디 문장뿐이다. 그녀가 묻혔던 보현사도 폐사되었다고 한다. 자취가 아주 없어진 것이다.
올해가 한일 수교 60돌이다. 지난 8월 15일은 일제의 통치가 끝난 지 80년이 되는 날이었다. 과거 일본이 우리에게 행한 아픈 역사가 여전히 남아있지만, 그 속에는 옳은 일로 우리를 위로해 주고 도움을 준 친구들이 있었다. 그들을 기억해 주는 것이 그 친구들이 우리에게 준 마음에 감사하는 방법이 아닐까? 달랑 사진 한 장이 남은 구와바라 다키 여사, 그냥 방치하면 역사 속으로 묻혀 사라질 그녀 일생의 행적과 선행을 기리는 작은 돌비석이라도 학교 근처에 세워놓고 그녀를 기억해 주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