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살아 돌아온 '발해’

  • 등록 2025.09.10 11: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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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우리 겨레의 역사
[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318]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우리 동포들이 많이 사는 중국 길림성 연길화룡지구에 가면 용두산이란 산이 있다. 조두남 선생이 만들어 우리 민족의 애창곡이 된 가곡 <선구자>의 2절은 용두산 자락 우물을 통해 이 땅에 살던 옛 조상들의 웅대한 기상을 소환한다. 이 용두산에서 1980년에 발해의 3대 왕 문왕(文王, 재위 737~793)의 넷째 딸 정효공주(貞孝公主, 757~792)의 무덤이 발굴되었다.

 

 

돌방 형식으로 만든 이 무덤에서는 묘실의 벽을 돌아가며 12명의 인물을 그린 벽화가 남아 있어 잊혔던 발해의 인물과 의상 등이 처음 역사에서 깨어났고 이 덕분에 근처에 흩어진 무덤들이 당시 문왕 가족의 묘원이었음이 드러났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돈화시 육정산에서는 1949년에 둘째 딸 정혜공주(貞惠公主, 737~777년) 묘임을 알리는 각종 유물이 대거 나왔고 여기에 발해를 상징하는 돌사자 조각도 출토되었기에, 이 일대의 발굴은 잃어버린 고대 왕국 발해를 되살리고 그 역사를 다시 연구하는 결정적인 계기기 된 바 있다.

 

 

그런데 정효공주 묘가 있는 그 용두산에 있는 3대 문왕의 황후 무덤 등 발해의 역사를 밝히는 귀중한 유물과 자료들이 이번에 처음으로 대거 공개되었다. 그동안 1997년에 발굴 소식이 알려졌고 그 뒤에 2004년에 3대 문왕의 효의황후(孝懿皇后, 726~775년)와 9대 간왕(簡王)의 순목황후(順穆皇后, ?~?)의 무덤이 발굴됐다는 소식이 있었는데 중국의 문화재 전문 출판사인 문물출판사가 지금까지의 발굴보고서를 종합 정리해서 ‘용두산(龍頭山) 발해왕실묘지: 1997, 2004-2005, 2008년 발굴보고’라는 제목으로 전체를 공개한 것이다.

 

효의왕후 묘비에는 “황후 울씨는 본래 하신향의 사람이다.(皇后欎氏者, 本夏神鄉人也.). 용천(상경 용천부)에 도읍을 정하고…황후로 세웠다.(定都龍泉, … 立爲皇后), 우리 황제의 성스럽고 밝은 교화… 우리 황후의 현명하고 지혜로운 계책(我皇聖明之化, …我后賢智之猷”, 보력 2년(775) 2월 5일 무진에 문사당 측침에서 돌아가시니, 춘추 50살이다 성스러운 주인께서 상심하시고 그해 겨울 10월 24일 갑신에 진릉대로 천장하니 예이다.(寶曆二年二月五日戊辰, 薨於文思堂側寢, 春秋五十愛… 聖主傷心, … 其年冬十月廿四日甲申, 遷葬於珍陵台禮也.)”이란 내용이 담겼다. 효의황후의 묘지(墓志)는 지난 2004년에 첫 발굴된 이후 최근 보고서가 출판되면서 처음으로 전문 981자가 공개됐다.

 

 

순목황후 묘비에는 “간왕의 황후 태씨다.(蕳王皇后泰氏也) 연평 2년(?) 4월 24일에 선비(거란) 불이산 언덕에서 돌아가셨다.(以延平二年四月卄四日崩, 殞于鮮卑不易山原) … 건흥 12년(829) 7월 15일에 ▨릉으로 옮겨 모시니 예이다.(建興十二年七月十五日, 遷安▨陵, 禮也. 부친의 이름은 흥절로 중대성 우상이다.(父諱興節, 爲中臺右相)”이란 내용이 있다.

 

발해의 역사를 우리 신라나 고려에서는 별로 기록하지 않았다. 발해의 건국자인 고왕(高王) 대조영(大祚榮)부터 13대 왕인 대현석에 이르기까지의 기록은 《신당서》 「발해전」을 통해서 알 수 있고 14대 왕인 대위해와 마지막인 15대왕 대인선이 통치했다는 사실은 확인하는 정도로 그 실상을 알기 어려웠다.

 

그런데 발해는 황제를 칭하는 나라였다. 1980년 발견된 문왕의 넷째 딸 정효공주의 묘비명에 792년에 공주가 사망하자 "황상께서 조회를 열지 않고 크게 슬퍼하시면서 잠자리에도 들지 않고 음악도 연주하지 못하도록 하였다"라는 귀절이 있다. 황상이란 말은 신하가 황제를 직접 부르던 호칭이므로, 이를 통해 문왕을 황제로 지칭했고 발해는 황제국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이번에 공개된 묘비에도 황후·붕(崩) 등 황제국 용어들이 확인되었다.

 

 

물론 발해가 황제의 나라였다는 증거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중국의 최고 통치자를 천자(天子)라고 하듯이, 발해도 '천손(天孫)'이라는 말을 임금이 직접 썼다. 문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에 보면 스스로 천손이라고 표기하였는데, 이 때문에 일본 조정의 항의를 받았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발해는 독자적인 연호를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사용한 국가였다. 이것은 우리 역사상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예다. 연호는 통치자의 통치 이념을 반영하는 것으로, 제2대 무왕부터 꾸준히 사용하였다. 무왕 때의 연호는 인안‘’이었고, 문왕 때에는 ‘대흥’, ‘보력’이었으며, 성왕은 ‘중흥’, 선왕은 ‘건흥’ 등의 연호를 썼다. 이런 연호는 원칙적으로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당나라에 대해서는 황제가 아닌, 왕국으로서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았다. 또한 임금이 죽은 뒤에는 황제의 칭호가 아닌, 임금의 칭호를 써서 문왕, 선왕 등의 이름을 올렸다.

 

이처럼 이중적인 체제를 사용했지만,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하는 우리 민족의 북방국이었는데 신라나 고려왕조 이후 조선조 중기까지 발해에 대해 제대로 대우하지 않았다. 조선왕조 정조 때 유득공(柳得恭1748~ 1807년)이 1784년 《발해고(渤海考)》를 펴내 발해를 우리 겨레의 나라로 규정하고 나서 비로소 우리 역사 속으로 들어왔고 우리 역사의 시각도 남쪽 위주가 아니라 남북국이라는 큰 개념으로 확대된 바 있다.

 

중국이 펴낸 보고서에 실린 발해 유물에는 실제로 고구려의 영향이 드러나 있다. 황후ㆍ붕(崩) 등 황제국 용어를 새긴 순목황후의 비문 141자, 효의황후의 비문 981자 전문, 새 날개 모양의 황금 머리 장식을 비롯해 발해 유물로는 처음 발견된 칠기 등의 출토품이 발해 멸망 천3백 년 만에 다시 우리 눈앞에 살아난 것이다.

 

용두산에서 발굴된 모두 17기의 발해 무덤은 고구려 전통의 석실묘가 주류를 이루고, 당의 영향을 받은 벽돌무덤이 일부 포함됐다. 발해 황실과 최상층이 고구려 문화를 기반으로 당 문화를 수용했다는 얘기다.

 

 

용두산 발해 황실 묘지에서 발굴된 금제 관장식이다. 식물 모양의 문양이 있어서 3개의 기다란 이파리를 표현한 것처럼 보이나, 전체적으로는 고구려 수도인 집안에서 출토한 새 날개 모양의 조우관(鳥羽冠)을 닮았다.

 

 

용두산 발해 황실 묘지에서 발굴된 세 가지 색깔의 진흙 인형들은 당나라의 매장 문화를 받아들인 증거물로 머리끝에서 발끝에 이르는 발해인의 다양한 복식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다.

 

중국이 수십 년 넘도록 공개하지 않다가 이번에 발해 황실을 공개한 것은 중국이 발해의 왕성이 있던 상경 용천부 유적와 함께 이 용두산 일대의 발해 무덤군을 유네스코에 발해 유물로 일괄 지정받음으로써 발해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점을 대내외에 확정 지으려는 의도인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우리 측면에서 보면 발굴 21년 만에 확인된 발해 왕실 유물은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우리 겨레의 역사라는 성격을 더욱 뚜렷하게 해주는 것이다. 중국이 발해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에 올리려고 하면 2004년 고구려 유산의 세계유산 등재와 맞먹는 역사적 갈등이 재연될 수 있다. 우리로서는 비록 현재의 우리 영토는 아니지만 역사적으로 또 남겨진 유물이 전하는 대로, 발해가 고구려에 이은 우리 민족의 웅대한 역사임을 세계에 알리는 노력을 포기하면 안 될 것이다.

 

발해 황실유물의 대거 공개 소식에 일찌기 발해역사를 우리 민족사로 끌고 들어온 유득공柳得恭:1748~1807)의 선견지명이 더욱 빛나게 되었고, 이를 통해 그 옛날, 이 일대를 달린 우리 겨레의 선구자들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일송정 푸른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꿈이 깊었나

 

용두산 우물가에 밤새소리 들릴때

뜻깊은 용문교에 달빛고이 비친다

이역하늘 바라보며 활을 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꿈이 깊었나

                                       ... "선구자" 조두남 시"

 

​발해왕국은 926년에 망했지만, 유민들은 신라로 남하한 것만이 아니라 그 땅을 차지한 거란족, 여진족, 몽고족을 통해 살아남아 중국의 역사를 만들었다. 이들 발해의 유민들이 중국에서 이룩한 역사도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봐야 할 부분이라는 깨우침을 준다.

 

 

이동식 인문탐험가 sunonthetre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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