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은화, 양금으로 한판의 굿을 하다

  • 등록 2025.12.26 12: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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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EC 국빈만찬 무대 연주자 윤은화의 <五굿 : 경계를 여는 소리>
양금으로도 굿판을 열 수 있다고 증명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한국 양금계를 대표하는 연주자 윤은화가 그제(12월 24일) 저녁 7시 30분 김희수아트센터 SPACE1에서 단독 콘서트 《五굿 : 경계를 여는 소리》를 열었다. 최근 경주 APEC 한ㆍ중 정상회담 국빈만찬 무대 연주를 비롯해 세계적 활동을 이어온 그가, 이번 공연을 통해 굿의 장단과 양금의 울림을 결합한 새로운 의례 음악을 처음으로 관객 앞에 선보였다. 같은 날 디지털 싱글음반 ‘윤은화류 양금 산조’도 함께 발매되어 본 공연의 음악적 맥락을 음원으로 확장했다.

 

윤은화는 중앙대학교에서 음악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세계양금협회(CWA) 이사, 한국양금협회 회장, 국제양금예술연합회ㆍ아시아양금협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또한 한국양금앙상블 대표, 밴드 동양고주파 단원으로 활동하며 나라 안팎의 다양한 프로젝트를 이어가는 중이다. 미국 링컨센터, 포르투갈 WOMEX, 스페인 MMVV 등 세계 음악축제에서 무대를 올렸고, 2021 수림뉴웨이브 대상, 2015 전주세계소리축제 소리프론티어 대상 등 다수의 수상 경력이 그 행보를 증명한다. 전통, 창작, 연주, 연구, 교육을 동시에 아우르는 활동은 한국 양금계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사례로 평가된다.

 

 

 

공연 — 《五굿 : 경계를 여는 소리》

양금이 제단이 되고, 소리가 문이 되는 밤

 

굿은 본디 닫힌 길을 두드려 여는 의례다. 막힌 삶의 길, 신과 인간의 길, 이승과 저승의 길을 소리로 다시 여는 행위다. 윤은화의 공연 《五굿 : 경계를 여는 소리》는 바로 그 의례적 본질에서 출발했다. 서양에서 바다를 건너와 한국에 뿌리내린 양금, 두 세계의 경계에 선 이 악기는 윤은화 자기 삶과 겹치며 ‘경계의 악기’로 다시 호명된다.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했던 흔들림과 서러움, 그 시간을 통과한 끝에 그는 이제 양금의 소리로 스스로 경계를 두드리고 빛을 향해 나아간다.

 

공연 중 윤은화는 설명한다.

 

“《五굿》은 이러한 개인적 서사와 전통 의례가 만나는 지점에서 탄생했다. 작품의 제목인 ‘五굿’은 다섯 개의 굿이자, 동시에 양(揚, 시작)ㆍ양(洋, 서양-이동ㆍ양(兩, 홀로)ㆍ양(養, 융화)ㆍ양(陽, 빛)이라는 다섯 개의 ‘양(陽)’의 서사를 품는다. 서쪽에서 건너온 악기, 두 세계를 잇는 존재, 성장과 양육의 시간, 그리고 마침내 빛으로 향하는 길. 이 다섯 경계의 의미는 황해도굿, 동해안별신굿, 서울굿, 경기도당굿, 제주굿이라는 서로 다른 의례의 성격과 겹치며, 닫혀 있던 경계를 두드려 여는 현대적 의례 음악으로 재구성했다. 이 무대에서 양금은 더 이상 단순한 연주 악기가 아니다. 제단이자 문이며, 경계를 여는 두드림 그 자체다.”

 

 

 

그에 따라 공연은 다섯 개의 장면으로 구성됐다.

첫 번째 장 〈양(揚)〉은 ‘시작’의 장으로, 누구도 대신 열어줄 수 없는 첫 번째 문을 연다. 거친 북쪽의 찬 공기 속에서 양금의 첫 울림을 만났던 어린 윤은화의 기억은, 삶의 첫 두드림으로 다시 태어난다.

두 번째 장 〈양(洋)〉은 ‘이동’의 장이다. 삶이 바다를 건너는 일과 같듯, 양금의 울림은 바람과 파도가 되어 새로운 땅으로 건너온 이의 심장을 울린다. 두려움과 기대가 교차하는 순간, 소리는 흔들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세 번째 장 〈양(兩)〉은 ‘홀로’의 시간이다. 복잡한 도시 한가운데서 맞닥뜨린 고립 속에서 개량 양금이 태어났던 순간, 누구도 닦아놓지 않은 길을 스스로 두드려 만들어야 했던 시간이 무대 위에 펼쳐진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외로움 속에서 끝내 곁을 지킨 것은 양금의 소리였고, 그 소리는 다시 윤은화를 일으켜 세웠다.

 

네 번째 장 〈양(養)〉은 ‘융화’의 장이다. 양금은 개인의 소리를 넘어 공동체의 울림으로 확장된다. 철현의 두드림은 함께 연주하는 연주자들과 관객, 무대와 객석, 과거와 미래 사이의 경계를 허물며, 길은 더 이상 혼자의 것이 아닌 모두에게 열린 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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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장 〈양(陽)〉은 말 그대로 ‘내일’과 ‘빛’을 향한다. 떠나보내야만 비로소 맞이할 수 있는 것들, 삶의 물길을 따라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무대의 공기가 바뀌고, 오래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이 조용히 열린다. 견뎌온 어둠의 시간을 보내고, 그 시간을 버텨낸 자신을 끌어안은 채 윤은화는 흔들림 없이 따뜻한 양지, 빛을 향해 나아간다. 함께 한 타악(북, 장구, 징, 꽹과리, 운라)과 피리ㆍ대금 그리고 걸쭉한 구음은 한편의 몽롱한 꿈을 꾸는 기분이다.

 

공연장을 가득 메운 청중들은 꼼짝 못 하고, 양금이 빚어내는 굿의 향연에 몰입한다. 연주 중간중간 큰 손뼉을 쳐내기에 정신이 없다. 아! 이렇게 양금으로도 굿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윤은화는 그냥 이루어낸 성과에 만족하질 못한다. 또 하나의 세계로 발돋움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동시에 ‘오굿’을 통해 윤은화의 삶 전체를 드러내 보였다. 동시에 앞으로 나아갈 시대를 향한 의례를 하고 있다. 윤은화는 이 공연을 통해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하나의 빛이 되기를 소망한다.

 

이번 공연은 윤은화가 예술감독을 맡았으며, 연출은 박범태, 기획은 설현주(국설당 대표), 구성은 한윤지가 담당했다. 타악과 소리는 박범태와 조한민, 타악에는 이창현과 이종섭, 피리는 박준구, 대금은 윤석만이 함께하며 무대를 완성한다. 본 공연은 서울특별시와 서울문화재단의 후원으로 진행됐다.

 

 

공연 도중 윤은화가 의상을 갈아입을 동안 소리와 타악을 연주하면서 공연 연출에 힘을 보탠 박범태는 “굿 음악을 공연하려는데 도와달라고 연락이 와 만났을 때는 윤은화가 굿 음악을 처음 하는 사람이라 어려울 것으로 걱정했는데 무려 8곡 가운데 6곡을 신곡으로 준비하면서도 혼신을 다했기에 오늘의 공연을 할 수 있었다. 의상뿐 아니라 무아지경으로 연주하는 것을 보면 그가 거의 만신이 다 된 것 같다.”라고 너스레를 떨어 청중은 큰 손뼉으로 화답했다.

 

이날 공연에 다른 성탄절 행사를 마다하고 왔다는 두현정(47) 씨는 “윤은화의 양금 연주는 여러 번 들었지만, 양금으로 굿을 한다는 얘기에 깜짝 놀라서 한걸음에 달려왔다. 어떻게 이렇게 양금과 타악기 그리고 구음이 만나 굿 한판을 만들어낼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감탄만 절로 나왔다. 성탄절 이브에 이렇게 우리 문화를 만끽하는 공연 한판을 본 것은 내게도 색다른 꿈을 꾸게 만든다.”라고 말했다.

 

공연이 끝난 다음 날 통화를 한 윤은화는 “오굿에 자신을 대입하여 음악을 만들고 연습하는 동안 혼자였던 시절 생각이 나 왈칵 설움이 북받쳐와 한바탕 울기도 했다. 어떻게 음악을 만들고 연주했는지 나 자신도 모를 만큼 푹 빠졌다가 헤어져 나오니 이제 빛을 만난 기분이다. 공연의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해준 박범태 연출님과 성심을 다해 공연 기획을 해준 (주)국설당 설현주 대표님께 깊은 고마움을 드린다.”라며 말하면서 공연을 끝나고 돌아와 열 몇 시간을 잔 듯하다고 말했다. 이제 그에겐 공연의 마지막 곡 제목처럼 빛만 남지 않았을까?

 

                                                                                                사진 임정호 작가 제공

 

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pine996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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