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시사 합작시 66. 강진의 영랑시인 생가

  • 등록 2026.03.22 11:4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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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강진의 영랑시인 생가

 

   기다리기만 하면 모란 피나 (돌)

   기다리지도 않으면 안 피나 (빛)

   때 되면 피고 때 되면 지거늘 (초)

   꽃이 피고 지던 저 세월 넘어 (달)

 

                                 ... 24.12.29. 불한시사 합작시

 

 

 

 

세모의 바람이 스산하던 날, 남도의 끝자락 강진에 이르러 우리 불한시사 다섯 벗들은 고요한 한옥 한 채 앞에 섰다. 그곳은 김영랑의 숨결이 아직도 머물러 있는 생가였다. 담장은 낮고, 뜰은 비어 있었으며, 모란은 아직 깊은 겨울 속에 잠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 적막한 빈 뜰에는 이미 한 편의 시가 조용히 피어 있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오래된 시비는 마치 오랜 벗처럼 우리를 맞이하며, 보이지 않는 꽃의 시간을 가만히 들려주고 있었다. 겨울의 침묵 속에서도 꽃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기다림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영랑의 시는 기다림의 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시간을 견디는 기다림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절정이 다가오기를 향한 내면의 미묘한 떨림이며, 동시에 그 절정이 스쳐 지나갈 것을 미리 아는 상실의 시대 예감이기도 하다. 모란은 단지 한 송이 꽃이 아니다. 피기 전에는 설렘으로 가슴을 적시고, 피어나는 순간에는 눈부신 황홀로 번지며, 지고 나면 말없이 남는 슬픈 여운으로 마음을 비운다. 이렇듯 한 송이 꽃을 통해 삶의 전 과정이 드러난다. 기다림과 도래, 그리고 소멸의 순환 속에서 인간의 마음은 흔들리고, 희비의 흔들림 자체가 곧 시가 된다.

 

초가집 생가는 화려하지 않고 소박했다. 낮은 처마 아래 단정한 마루가 놓여 있고, 넓지 않은 뜰은 겨울빛 속에 조용히 숨 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단순한 공간은 설명할 수 없이 깊었다. 아무것도 없는 듯한 그 빈 뜰에서 오히려 보이지 않는 모란이 더욱 또렷하게 우리들 가슴에 다가왔다. 꽃은 눈앞에 없어도 이미 마음속에 피어 있다는 듯, 그 자리는 시간보다 더 오래 머무는 감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곳은 기다림이 머무는 집이었고, 시간이 숨 쉬는 세월의 자리였다.

 

때를 기다려 피는 꽃은 억지로 열리지 않는다. 기다림은 결코 수동이 아니라 존재를 스스로 익혀가는 시간이다. 그러나 기다리지 않는다고 하여도 꽃은 때가 되면 피어난다. 자연의 이치는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스스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피고 지는 일 또한 슬픔만이 아니라 순환이다. 사라짐은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을 준비하는 또 다른 길목이다. 꽃은 져도 향기는 남듯, 시 또한 그러하다. 시인의 육신은 사라져도 그의 언어와 울림은 세월을 넘어 흐른다. 눈앞의 꽃은 지더라도 마음속의 꽃은 지지 않는다. 영랑의 모란은 자연의 꽃이 아니라, 사라지지 않는 심물의 꽃이다.

 

그날 우리는 모란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어쩌면 모란보다 더 깊은 것을 보았는지도 모른다. 피지 않은 꽃의 시간, 지지 않은 마음의 떨림, 아직 끝나지 않은 기다림의 결을 우리는 그 빈 뜰에서 함께 느끼고 있었다. 돌아서는 길, 겨울바람이 옷깃을 스칠 때 문득 알게 되었다. 모란은 단지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기다림 속에서 이미 피어나고 있다는 것을. (신의주 건너 단둥에서 라석)

 

불한시사(弗寒詩社)는 문경의 불한티산방에서 만나는 시벗들의 모임이다. 여러 해 전부터 카톡을 주고받으며 화답시(和答詩)와 합작시(合作詩)를 써 왔다. 합작시의 형식은 손말틀(휴대폰) 화면에 맞도록 1행에 11자씩 기승전결의 모두 4행 44자로 정착되었다.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정형시운동으로 싯구를 주고받던 옛선비들의 전통을 잇고 있다.

 

 

김영조 기자 pine996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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