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시는 ‘사자예각’, 나는 ‘누에고치’

  • 등록 2026.03.21 10:3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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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에서 평화로운 노년을 보내는 ‘누에고치’와 ‘사자예각’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전화기에 부인의 이름 대신 별칭을 입력해 놓은 남자들이 더러 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친구 몇 사람에게 전화 걸어 물어보니 처, 마누라, 00엄마, 내사랑, 여왕벌 등 여러 가지 호칭이 등장한다. 나는 각시의 이름 대신 ‘사자예각’이라는 네 글자를 입력해 놓았다. 사자예각은 사자성어 같은 느낌을 주는데 “사랑스럽고 자랑스럽고 예쁜 각시”라는 표현에서 앞 글자 네 개를 뽑아내어 내가 만든 별칭이다.

 

사자예각의 뜻을 묻는 사람들은 대부분 두 번째 글자 ‘자’에 대해서 “무엇이 자랑스러운가?”라고 궁금해한다. 나는 사람들에게 우리 각시는 세 가지가 자랑스럽다고 대답한다. 하나씩 설명해 보자.

 

첫째로, 술 잘 먹는 것이 자랑스럽다. 나는 술 마시는 분위기는 좋아하지만, 술을 많이 먹지는 못한다. 소주 3잔이 최대 주량이다. 소주 3잔을 넘으면 나는 장소를 불문하고 쓰러져서 잠을 잔다. 나의 이러한 기행을 몇 번 본 친구들은 절대로 3잔 이상은 권하지 않는다. 그런데 각시는 놀랍게도 소주 2병까지 마실 수 있다.

 

믿기 어렵겠지만 각시는 50살이 될 때까지는 술을 전혀 마시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해에 새로 이사 온 옆집 아파트의 동갑내기 친구가 술을 잘 먹는 여자였다. 각시는 그녀의 권유로 우연히 술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요즈음, 각시에게 술을 가르친 친구는 건강 챙긴다고 술을 조금만 마신다. 그러나 각시는 주량이 점점 늘어 소주 2병에 도달했다. 제자가 스승을 추월한 셈이다. 문자 써서 표현하면 ‘청출어람’이다.

 

내 주변에서 보면 나이 70이 넘자 이런저런 이유로 술을 줄이거나 아예 술을 끊는 친구들이 많아졌다. 친구들은 의사의 권유를 따라서 건강을 이유로 술을 마시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아직 소주 3잔은 마실 수 있다. 내가 옛날 대학 시절에 소주 3잔을 마시면 친구들은 나를 ‘술새우’라고 놀렸다. 술고래의 반대말이 술새우다. 요즘 술자리에서 내가 여전히 소주 3잔을 마시면 친구들은 나를 ‘술고래’라고 부르며 부러워한다. 내 주량은 변함이 없는데 평가가 변하였다. 나는 건강이 받혀주니까 아직 소주 3잔을 먹고 술고래 소리를 듣는 것이다.

 

각시가 술 두 병을 마신다는 것은 숨기거나 부끄러워할 일이 절대 아니다. 건강하니까 술 두 병을 마실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술 잘 먹는 각시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미래 어느 날, 의사의 지시에 따라 각시가 술을 먹을 수 없는 날은 분명히 올 것이다. 그러나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즐겁게 술을 마시는 것이 건강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미국 심장학회의 2021년 연구 결과를 보면 적당한 음주는 뇌의 스트레스 신호를 완화해 심혈관 질환 발생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의학계는 이러한 이득이 음주자의 생활 습관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과도한 음주가 암 발생 위험을 높인다는 것은 이미 의학적으로 증명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요즈음 나는 각시에게 술을 끊으라고 말하는 대신 주량을 줄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요즘 부인들이 남편 말을 안 듣는 것이 유행인가보다. 나의 충언을 각시는 귀담아듣지 않는다.

 

둘째로, 각시는 욕을 잘한다. 나는 욕 잘하는 각시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각시는 조폭영화에 나오는 깡패들의 쌍소리 같은 저급한 욕을 하는 것이 아니다. 각시는 욕쟁이 할매 식당에서 들을 수 있는 구수하면서도 정겨운 욕을 잘하는 것이다.

 

사람이 욕하는 것은 나쁜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욕은 품성의 문제가 아니라 억눌린 삶에서 쌓인 감정을 풀어내는 표현 방식이다. 욕을 하는 사람과 욕을 듣는 사람 사이 친밀감을 나타내는 수단이다. 욕은 불편한 진실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방편이다. 욕을 하려면 작지만, 용기가 필요하다. 욕하면 심리적인 스트레스가 풀린다.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한 외지인이 “왜 이곳 사람들은 욕을 그렇게 많이 합니까?”라고 묻는다. 대답은 “그게 전라도라는 뎁니다. 전라도 사람들은 욕 많이 하는 걸 탓하면, 욕도 못하면 무슨 수로 사느냐고 맞섭니다.”

 

내가 옆에서 볼 때에 각시가 시도 때도 없이 욕을 남발하는 것은 아니다. 적절한 때에 적절한 수준의 욕을 곁들이는 것이다. 음식 위에 고명을 뿌리듯이 말이다. 평생 욕 한번 안 하고 고운 말만 쓰면서 세상을 살아온 순한 사람은 역경에 부딪히면 부서지기 쉬울 것 같다. 욕을 안 하는 사람은 착하기는 하겠으나 강하지는 못하지 않을까?

 

사람들은 가끔 나에게 묻는다. 각시가 욕하는 것을 왜 말리지 않느냐고.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욕하는 우리 각시가 인간적이지 않으냐고. 그래도 각시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다면 제발 손자들 앞에서는 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셋째, 각시는 돈을 잘 쓴다. 그렇다고 무슨 유산을 물려받거나 로또 복권에 당첨된 것은 아니다. 각시는 통장에 돈이 들어오자마자 “무엇을 살까?” 궁리한다. 대학교수라는 직업이 돈을 많이 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각시가 쓸 수 있는 돈이 많지는 않다. 각시는 생활비를 받으면 다음 봉급날 훨씬 전에 다 써버린다. 그리고서는 봉급날을 눈이 빠지도록 기다린다.

 

예전에는 시장이나 백화점에 가야 물건을 살 수 있었다. 요즘에는 홈쇼핑 광고를 보면서 손말틀(휴대폰)로 주문하면 이튿날 택배로 어떤 종류의 물건이든지 배달된다. 돈 쓰기에 편리한 세상이 되었다. 견물생심이라고, 텔레비전에서 예쁜 아가씨가 나와서 맛있는 포장 음식 또는 편리한 물건을 반복 설명하면 십중팔구 각시는 전화번호를 누르기 시작한다.

 

예전에는 자식에게 유산을 물려주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요즘 친구들을 만나보면 유산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술자리에서 하는 건배사 중에 ‘쓰죽’이 유행이다. 내가 번 돈을 유산으로 물려주지 않고 “쓰고 죽자.”라는 뜻이다. 쓰죽 건배사가 나오기 훨씬 이전부터 각시는 쓰죽을 실천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돈을 절약하지 않고 잘 쓴다는 것은 국가 경제 측면에서 보면 소비가 늘어난다는 뜻이다. 과소비는 문제가 되겠지만 적당한 소비는 국가 경제가 잘 굴러가게 하는 원동력이다. 소비를 진작시키기 위해서 정부에서는 여러 가지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소비 쿠폰을 나누어주기도 하고 지역 화폐를 발행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거시적으로 본다면 각시가 돈을 잘 쓴다는 것은 탓할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각시에게 말한다. 당신이 돈을 잘 쓰니 국가 경제가 잘 돌아간다고. 당신이 애국자라고.

 

 

각시 전화기에는 내가 어떻게 입력되어 있을까? 네 글자로 ‘누에고치’라고 입력되어 있다. 무슨 뜻일까? 각시에게 물어보니 나는 누에처럼 언제 어디서나 틈만 나면 졸고 밤이 되면 잠만 잔다고 한다. 요즘에는 잘 모르는 것은 인공지능(AI)에게 물어보면 답이 나온다. 인공지능에게 누에는 잠을 얼마나 자느냐고 물어보았더니 다음과 같이 나온다.

 

“누에나방과에 속하는 곤충인 누에는 애벌레 기간인 약 25일 가운데서 4번 허물을 벗을 때마다 잠을 잔다. 4번 잠자는 시간을 합하면 약 100~200시간 정도로서 애벌레 기간의 약 20%를 잠자는 데 사용한다. 애벌레는 고치를 짓고 고치 안에서 번데기가 되어 나방으로 변하는 약 12~15일 동안도 일종의 긴 잠(휴면)으로 볼 수 있다. 어쨌든 누에는 잠을 많이 자는 곤충임에는 틀림이 없다.”

 

강원도 평창에 있는 시골집에서 ‘누에고치’와 ‘사자예각’은 평화로운 노년을 보내고 있다.

 

(계간 《문예운동》 2026년 봄 169호에도 투고하였습니다.)

 

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muusim2222@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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