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윤석열과 김건희 뒤에는 이들의 앞날을 예언해 주는 도사들이 있었다고 하지요? 특히 김건희는 윤석열과 혼인하기 전부터 점술에 취해있었던 것 같습니다. 12.3 불법계엄도 김건희가 날짜를 택했다는 설이 있지요. 주말에 비상계엄을 선포했으면 지역구에 내려가 있는 국회의원들이 많을 거라 그렇게 신속하게 국회에 모이지 못했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왜 굳이 화요일에 비상계엄을 선포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지요. 어떤 이는 명태균이 더 큰 것 터뜨리기 전에 계엄을 선포한 것이라는 설을 얘기하기도 하는데, 그보다는 김건희가 도사들에게 길일을 잡게 한 것이 12월 3일이라는 설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이렇게 김건희가 점술에 빠져있었다는 얘기를 듣다 보니, 민비와 무당 박창렬이 생각납니다. 임오군란이 터졌을 때, 민비는 충주로 도망갔습니다. 충주시 노은면 가신리 국망산 아래 이시영의 집에 숨어 살던 민비는 ‘언제나 환궁할 수 있을까?’ 답답해하며 하루하루를 보냈겠지요. 이때 알게 된 이가 무당 박창렬입니다. 이름이 남자 같은데 박수가 아닌 무당이니 여자입니다. 박창렬은 일찍 과부가 된 뒤 자신은 관왕(관우)의 신 내린 딸이라며 관운장을 모시는 무당이 되었다고 합니다. 무당 박씨는 답답해하는 민비에게 8월 보름에는 한양으로 올라가 다시 귀한 자리에 앉을 거라고 예언합니다.
임오군란이 실패하고 1882년 7월 13일 대원군이 납치되어 청나라로 끌려가면서 고종은 다시 정권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민비가 어디 있는지 찾아 모셔 오게 합니다. 이리하여 민비는 8월 1일 한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민비는 기쁜 마음에 자신이 머물던 집주인 이시영에게 음성 군수직을 내리고, 또 자신의 환궁을 예언한 박씨를 모셔 오게 합니다. 그리고 이후부터는 민비는 자신의 근심, 걱정을 모두 박씨에게 털어놓으며 박씨에게 조언을 구합니다. 이런 민비에게 박씨는 관왕이 내린 말씀이라며 마구 뻥을 쳤겠지요?
그런데 박씨를 마냥 궁궐에 모셔놓으면 말이 나올 것입니다. 그래서 민비는 고종에게 박씨가 관왕의 딸이라며 박씨가 관왕을 모실 수 있게 관왕묘를 짓자고 합니다. 고종도 이미 민씨를 통해 박씨에게 빠져들던 때라 고종은 흔쾌히 관우 사당을 짓게 하니, 이게 북관왕묘, 줄여서 북묘입니다. 북묘를 짓고 고종은 친히 비문을 짓고 민영환으로 하여금 글씨를 쓰게 하여 북묘 앞에 비를 세우기도 했지요. 그리고 고종은 무당 박씨가 진실로 영험하다고 진령군(眞靈君)이라는 이름도 하사하였습니다.
지금 지하철 6호선에 동묘역이 있지요? 이걸 보면 조선 시대에 한양의 동서남북에 관왕묘가 있었을 것을 짐작하게 합니다. 제일 먼저 임진왜란이 끝나고 1598년에 명나라 장수 진인에 의해 남대문 밖 남산 기슭에 남묘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1601년에 명나라 장수 만세덕에 의해 동대문 밖에 동묘가 세워졌고, 그다음에 세워진 것이 바로 이 북묘입니다. 그리고 하나 남은 서묘는 1902년에 서대문 밖에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동묘만 그 자리에 남아있고, 남묘는 1978년 재개발로 사당동 서달산 기슭으로 옮겨졌으며 나머지는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이전된 남묘도 수년 전에 재개발로 사라졌습니다.
고종과 민비가 이렇게 진령군을 총애하니 당연히 권력을 좇는 무리가 진령군에게도 접근하여 아부를 떨겠지요? 최순실이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비선 실세가 되었듯이, 진령군도 막후에서 인사에 개입하는 등 권력을 농단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갑오개혁 때 다른 탐관오리들과 함께 유배형에 처해집니다. 그 뒤 진령군은 역사 기록에서 사라져,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러시아 혁명 당시 니콜라이 2세 황제의 뒤에 라스푸틴이라는 점술사가 있었다는데, 역사를 보면 이렇게 점술사들이 뒤에서 국정농단을 부린 예가 많이 나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도 윤석열과 김건희 뒤에서 점술사들이 농단을 부리다가 나라를 말아먹을 뻔했는데, 다행히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다시 회복과 부흥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