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국군의 정통성 신흥무관학교에서 찾아야

  • 등록 2011.06.24 06:4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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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의 청년동지 여러분! 지금 우리는 나라를 빼앗겼습니다. 우리가 추운 땅 만주에서 무관학교를 세우고 소정의 교육을 받는 것은 조국을 다시 찾겠다는 군인 정신의 총화라고 생각합니다. 참고 견디는 고된 훈련을 통해 강인한 체력과 인내심을 길러 무관으로서의 기백과 담력을 키우자는 것입니다.” 위 내용은 신흥무관학교 초대교장을 지낸 이동녕이 조회 때 신흥무관학교 생도들에게 들려준 말입니다.

신흥무관학교는 올해로 세운 지 100돌이 됩니다. 신흥무관학교는 어떠한 곳이며, 누가 세웠을까요? 1910년, 한일강제병합이 되자 돈과 권력을 모두 버리고 망명길을 택했던 이회영을 비롯한 여섯 형제(건영, 석영, 철영, 회영, 시영, 호영)들이 바로 신흥무관학교의 창립자들입니다. 강제병합 직후 많은 양반 귀족들이 자신들의 기득권과 재산을 지키려 일제에 협력하고, 일제 역시 독립운동은 ‘상놈’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선전하던 때 이회영은 만주 서간도 지역을 둘러보고 돌아온 뒤, 가족회의를 열어 가문의 집단 망명계획을 논의했습니다. 이들 여섯 형제는 집안 대대로 나라와 운명을 같이하는 신하였는데 대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지언정, 집안이 왜적 치하에서 노예가 되어 생명을 구차하게 도모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뜻을 모으고 집단 망명에 합의한 것이지요.

이들 여섯 형제의 10대조는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항복을 비롯하여 대대로 영의정을 배출한 최고 명문가 집안 후손으로 이들은 얼음과 눈길을 뚫고 압록강을 건넜으며 그곳에서 가장 먼저 서간도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여 일제와 무장 투쟁을 벌이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듬해인 1911년 6월 10일 세워진 것이 바로 신흥무관학교입니다. (개교 당시 명칭은 신흥강습소)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 지역 추가가 마을의 한 허름한 옥수수 창고에서 열린 개교식 이후 10여 년 동안 이곳에서 배출한 3,500여 명이 넘는 졸업생들과 교관들은 청산리전투를 비롯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뿐만 아니라 만주와 노령 및 중국 관내의 조선혁명군, 한국독립군, 고려혁명군, 한국광복군 등에서 핵심적인 일을 해냈지요. 특히 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낸 지청천, 청산리전투를 지휘한 이범석, 고려혁명군 장군을 지낸 김경천 등이 모두 신흥무관학교 교관 출신입니다. 이제 신흥무관학교 100돌을 맞아 우리는 학교를 세운 이회영 여섯 형제와 이 학교에서 훈련을 받은 뒤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 걸고 항일투쟁을 한 이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 우리나라 헌법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명시하고 있음을 생각한다면, 대한민국의 육해공군 사관학교의 역사는 신흥무관학교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독자 방학진 /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

방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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