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의 소통, 박근혜정부의 소통

2013.05.14 13:57:27

[실록으로 배우는 소통 2]

[그린경제=김기섭 기자] 정도전을 모르면 조선 전기를 이해할 수 없고, 율곡을 모르면 조선 후기를 알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대로 율곡 이이는 정치가와 학자, 그리고 교육자로 그가 끼친 영향력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큽니다. 그런 율곡에게 선조 16년(1583년) 6월에 일어난 전마 사건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혹독한 시련을 안겨줍니다. 사건의 발단은 니탕개가 이끄는 여진족 2만명이 함경도 종성을 포위하면서 시작됩니다. 당시 병조판서였던 율곡은 보고를 받은 즉시 신속하게 대책을 세웁니다. 서울에서 활 잘 쏘는 사람 1만여 명을 뽑아 보내는 한편, 군자감의 면포를 군사들이 쓸 의복자료로 주고, 백관의 녹봉을 줄여 군사의 처자들을 먹이도록 합니다. 또한 국가에 곡식을 바치는 사람들을 모집하여 곡식을 변방으로 보내 식량으로 지급합니다.  

그런데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율곡은 3등 이하 군사 중에서 말을 바치는 자에게 북변으로 가는 것을 면제해주는 조치를 취합니다. 율곡으로서는 30여 년 전 을묘왜란 당시 군사들이 전장에 나갈 말을 구하지 못하자 서울에서 말을 약탈하여 타고 간 일을 상기하여 발빠르게 조치한 것입니다. 그러나 임금에게 미리 알리지 않고 단독으로 시행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뒤늦게 임금에게 계(啓)를 올려 "황공하다"라는 뜻을 표하고, 직접 임금을 알현하기 위해 궁궐에 들어가다가 도중에 그만 현기증이 일어나 승정원에 도착하지 못합니다. 승지가 이 일을 선조에게 알리자 임금은 내의(內醫)를 보내 율곡의 병을 치료하고 물러가 조리를 하도록 명합니다.  

일은 이렇게 무마되는 듯싶었으나 사헌부와 사간원이 파직 상소를 올리면서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흘러갑니다. 눈엣가시와 같은 율곡을 이참에 곤경에 빠트리려는 대간들의 건의에 이어 홍문관까지 가세하면서 탄핵의 강도가 높아집니다. 그들은 율곡의 과실만이 아니라 삶 전체를 비난하면서 무군(無君)이니 나라를 그르친 소인[誤國小人]이니 하면서 규탄하고 나선 것입니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일의 정황상 임금을 무시했다고 할 수 있으나 당시 율곡은 병조판서이자 비변사 당상으로서 군정 개혁을 전장하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건강이 나빴던 점을 고려하면 십분 이해하고도 남을 일이었습니다. 
 

혹독한 시련 안겨준 율곡의 소통법 

   
▲ 율곡 이이 영정
여하튼 선조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서인이 나서 율곡의 행위를 변호하자 이에 질세라 동인들이 율곡에 대한 인신공격의 수위를 높여 나가는 릴레이가 이어집니다. 그렇게 되자 이 문제는 동서 양당의 전면적 대결양상으로 치닫게 됩니다. 사건이 일어난 지 두 달이 지난 8월에도 율곡에 대한 인신공격은 끊이지 않습니다. 율곡은 이미 병조판서를 사직하고 파주와 석담으로 내려가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중 대사간 송응개의 상소는 비난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율곡은 동인을 무너뜨릴 계책만을 생각하고 고향에 물러나 있을 때도 뇌물과 재물을 탐하는, 왕안석보다 더 나쁜 인물이라고 무참하게 깎아내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송응개의 상소는 유생들의 반발이 잇따르고 선조도 송응개의 지적이 사실이더라도 이제 와서 말한 것은 불충이라며 그를 파직시킵니다. 하지만 율곡으로서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율곡의 절친한 친구이자 동료인 성혼이 상소를 통해 율곡을 옹호하고 나섭니다. 《선조실록》 16년 7월 15일 기사에서 성혼은 이이의 사람됨이 소통(疏通)·명민(明敏)하고 천성이 매우 고매하다며 그의 장점을 언급하고, 이어 율곡은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며 오직 나라가 있는 것만 알고 자신이 있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며, 국가의 일을 구제하는데 급급한 나머지 자신의 온포(溫飽) 따위는 생각지 않는 일생을 살았다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성혼은 율곡이 가진 한계도 그냥 넘기지 않고 지적합니다. 그의 지적은 매섭고 날카롭습니다. “(율곡은) 너무 소통(疏通)했기 때문에 소탈한 병통이 있어 침착하고 치밀한 기풍이 적습니다. 그리고 그 성품이 결백하며 정직하고 오활한 만큼 진실하기 때문에 겉모양을 꾸민다거나 남의 뜻을 맞추려고 하는 태도는 전혀 없고, 뜻이 큰 만큼 미세한 일에는 소략하며, 스스로를 믿어 시속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친구인 성혼은 율곡을 사랑하는 자가 적고 비웃는 자가 많으며, 걱정하는 자보다는 미워하는 자가 많은 건 이 때문이라고 본 것입니다.  

한마디로 율곡의 소통(疏通)은 기릴 만한 장점도 있지만 한편으로 흠이 되기도 한다는 것으로 요약됩니다. 과단성 있게 자신의 뜻을 막힘없이 전달하는 율곡의 소통 방식은 좋지만 이러한 방식이 오히려 다른 사람의 뜻을 배려하지 않는 심각한 병폐를 낳는다는 것이지요. 이이의 이 같은 소통방식은 전마사건에서 출발한 문제가 율곡의 삶 전체를 매도하는 양상으로 나타나는 데에도 기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율곡 이이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우호적입니다. 《선조수정실록》 17년 1월에 실린 율곡의 졸기가 좋은 예입니다. “그가 건의했던 각종 편의책(便宜策)들이 다시 추후에 채택되었는데, 국론과 민언(民言)이 모두 ‘이이는 도덕과 충의의 정신으로 꽉 차 있어 흠잡을 수 없다.’고 칭송하였다.” 

박근혜 정부가 방미 중 일어난 윤창중 성추행 의혹 문제로 온 국민의 질타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정권 출범 전부터 문제시돼 온 수첩인사에 대한 집착이 낳은 결과입니다만 후유증치고는 태풍급입니다. 자신의 인사철학과 코드에 맞는 인사를 뽑은 일은 소통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국민의 눈높이와 동떨어지고 심지어 여당까지 우려를 표한 인사의 중임은 결과적으로 재앙을 가져왔습니다. 한국의 품격을 떨어트리고 정권의 동력마저 약화시키는 악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곧 있을 인사개편에서는 율곡의 교훈에서 배우길 고대합니다. 

 

   
 
 ** 김기섭(세종연구가/한국형리더십교육센터 대표)

 세종대왕의 능(영릉)이 있는 여주에서 태어나, 경희대 대학원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하고 세종의 의사결정 연구로 학위를 받았습니다. 오래 전부터 일선 학교와 교육청에서 교육토론과 고전읽기지도법을 강의하고, 조선왕조실록을 읽으며 한국적 회의와 소통문화, 한국형 토론과 리더십을 개발하고 보급하는데 온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김기섭 기자 youlight3@hanmail.net
Copyright @2013 우리문화신문 Corp. All rights reserved.


서울시 영등포구 영신로 32. 그린오피스텔 306호 | 대표전화 : 02-733-5027 | 팩스 : 02-733-5028 발행·편집인 : 김영조 | 언론사 등록번호 : 서울 아03923 등록일자 : 2015년 | 발행일자 : 2015년 10월 6일 | 사업자등록번호 : 163-10-00275 Copyright © 2013 우리문화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pine996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