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익’ 주장, 불법으론 안 된다

2013.06.27 09:10:18

[실록으로 배우는 소통 8]

[그린경제=김기섭 기자]  조선시대 문과 시험문제, 즉 책문은 임금이 정치에 관한 계책을 묻고 그에 대한 답을 적는 시험을 이릅니다. 국가의 비전에 대한 젊은 선비들의 참신한 아이디어를 듣는 소통의 시간입니다. 예컨대 인재쓰기, 경제위기의 해결책, 국정운영의 방책 등을 임금이 물으면 젊은 인재들은 그에 따른 대책을 제시하는 열정적인 대화의 자리인 셈입니다.

 

태종 7년 4월 태종은 책문을 내리며, 다음과 같은 출제 배경을 밝힙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창업한 지 오래되지 않았고 법제 또한 갖추지 못했다. 또 천도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아 역사(役事)가 그치지 않는다.---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소강(小康)을 이루려고(중략) 정사를 듣는 틈틈이 책을 보고 그 뜻을 강구하지만 힘을 쓰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러니 태종의 주문은 소강(小康)을 이루는 방책을 적어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소강은 ‘작지만 강한 나라’로 태종이 꿈꾸는 조선의 미래상입니다. 따라서 이번 책문은 태종의 고민과 비전이 함께 담긴 시험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작지만 강한 나라’, 태종이 꿈꾼 조선의 비전

그런데 소강을 이루려면 명나라와의 안정적인 외교관계는 필수적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태종은 지성사대라는 외교전략을 구사합니다. 중국황제는 본래 큰 것을 좋아하고 공(功)을 기뻐하니 만일 우리가 사대의 예를 잃으면 반드시 군사를 일으켜 합당한 죄를 물을 것이라고 태종은 경계합니다. 그런 까닭으로 “한편으로는 지성으로 섬기고, 한편으로는 성을 튼튼히 하고 군량을 저축하는 것이 오늘날의 급선무”라고 신하들에게 전합니다.(07/04/08) 건국한 지 15년을 갓 지난 조선이 소강을 이루려면 겉으로는 지성사대를 통해 안정적인 대외관계를 형성하고, 안으로는 내실을 다지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태종의 이 같은 전략은 세종으로 이어지면서 외교원칙으로 굳어집니다.

 

이런 가운데 조정에서는 중국 황제의 딸과 세자의 혼인 이야기가 오갑니다. 처음에는 태종은 물론 사신으로 온 황엄도 그렇게 되면 다행이라고 환영합니다. 그런데 황엄이 다시 사신으로 왔는데도 이에 대한 언급이 없자 왕은 곧 후회하고 전 총제 김한로의 집과 정혼을 합니다. 태종 7년 다시 황엄이 오자, 태종은 “세자가 이미 장가를 들었으니, 신을 대신하여 조현(朝見)하게 하려고 한다.”고 하자 황엄은 매우 반깁니다.

 

이 때 또다시 조정대신들 사이에서 세자와 황녀의 혼사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거론됩니다. 당시 통역관이었던 통사 이현과 훈친(勳親, 나라에 공이 있는 임금의 친척)이면서 재상인 조박이 세자의 외할아버지인 여흥부원군 민제의 집으로 찾아가 자신들의 계책을 전합니다. 이를 계기로 다른 대신들과도 활발한 논의를 펼칩니다. 통사 이현은 “‘지난번에 일이 많았기 때문에 전하의 말씀을 잘못 전했고, 세자께서 지금까지 아직 혼인하지 않았다.’고 (사신에게) 말하겠다.”며 나섭니다. 즉, 세자가 장가를 들었다고 한 왕의 말은 잘못 전해진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일은 뜨거운 감자가 되어 민제와 민무구․민무질 형제를 비롯, 삼정승에게까지 이르게 됩니다. 당시 좌의정이었던 하륜은 한술 더 떠 황제의 딸과 결혼하면 여진족이 침략하지 못하고 조선 안에서도 모반이나 난(亂)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감히 황제와 사돈을 맺었는데, 누가 감히 권력을 넘보려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급기야 조정대신들의 논의는 태종의 심복인 이숙번에게 전해지고, 태종의 귀에까지 들어갑니다. 얘기를 전해들은 태종은 불과 같이 화를 내며 이들 모두를 옥에 가두고 국문(鞫問)하라고 명합니다.

“중국과 결혼하는 것은 나의 소원이었다. 다만 염려되는 것은 부부가 서로 뜻이 맞는 것은 인정(人情)의 어려운 일이고, 또 반드시 중국의 사자(使者)가 끊이지 않고 오면 도리어 우리 백성들이 소요(騷擾)하게 될 것이다.---지금 조박 등이 사사로이 모여 이 같은 큰일을 의논하고, 과인으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였으니, 내가 누구와 더불어 다스리겠는가? 하물며 내가 황엄에게 이미 세자가 장가들었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오히려 시간이 지나 이를 고칠 수 있는가?”

말을 마친 태종은 눈물을 뚝뚝 흘립니다. 그러자 이숙번과 다른 신하들도 모두 땅에 엎드려 우는 진풍경이 벌어집니다.

 

그 뒤 조정대신들은 국문장에서 한결같이 “나라를 위해서 한 일이지 다른 뜻은 없었다.”고 진술합니다. 태종은 이들을 사면하지만, 처음 이야기를 꺼낸 조박에게는 사사롭게 일을 도모하고 의논한 행위를 꾸짖고, 통사 이현에게는 “말을 고쳐 네 뜻대로 중국과 혼사가 이루어지면 우리나라에 이익이 될 것이 얼마나 되겠느냐?”며 질책합니다.(07/06/08) 이 사건은 조박이 곤장을 맞고 양주(楊州)로 내쫓기는 선에서 마무리됩니다. 이번 사건을 겪은 태종의 심정은 착잡하고 복잡합니다. 6월 22일자 기사는 그 같은 심경을 잘 보여줍니다.

 

“이미 사신에게 세자가 이미 혼인했다고 말했는데, 다시 중국과 혼인하려고 하면 내가 먼젓번에 한 말은 거짓말이 된다. 그리고 세자가 아직 성혼하지 않았는데 사신에게 급하게 성혼했다고 한 것은 중국과 혼인을 두려워한 때문이다.”

 

태종의 염려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실제로 혼사가 성사되었을 경우, 신부가 황제의 친딸이 아니거나, 비록 친딸이라 해도 말이 통하지 않아 세력만 믿고 교만 방자해져 시부모를 멸시하고 또 투기라도 하면 중국과의 사이에 틈이 생길 수 있고, 또 외척인 민씨 가문이 세자를 믿고 행세하면 제재하기 어려워진다는 혼잣말의 내용이 그것입니다.(07/06/22)

 

국정원의 정치개입은 민주주의 한계선 침범하는 행위

결국 이 사건은 헤프닝으로 끝이 납니다. 다만, 임금이 정한 일을 사사롭게 뒤집고 알리지 않은 불경죄 외에 생각해볼만한 문제가 많습니다. 먼저 연루된 신하들이 한결같이 황녀와의 혼인은 나라를 위한 일이라고 대답했다는 점입니다. 이 말은 국익을 위해서는 세자의 정혼조차 무시하고 임금을 거짓말쟁이로 만들어도 된다는 논리가 숨겨 있습니다. 명나라와의 관계를 긴밀히 하여 내외적으로 불안정한 조선을 굳건히 하겠다는 그들의 충성스러운 뜻은 모르지 않지만 그렇다고 임금을 허수아비로 만드는 게 타당한 일인가는 따져보아야 합니다.

 

둘째, 비록 나라를 위한 건설적인 모의라고 해도 그로 인한 부작용을 고려하지 않은 신하들의 식견은 평균 이하입니다. 태종이 염려하듯이 황녀와의 혼인은 실익보다 폐해가 더 클지도 모르는 노릇입니다.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한쪽 입장만을 고수하는 편협한 시각은 국정의 파탄을 불러올 공산이 큽니다.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음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최근 국정원의 정치개입 의혹에 대한 믿을만한 정황이 사실로 드러나면서 서울 시내 곳곳에서는 시국선언과 함께 촛불시위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민주국가의 국기를 뒤흔든 이번 일은 쉽게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이들의 정치개입은 민주주의의 한계선을 침범하는 행위로 보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엄정한 조사가 있어야 하고, 조사결과 목적이 어디에 있든 간에 국가기관의 소임을 넘어선 이들의 행위가 불법이라면 처벌이 뒤따라야 합니다. 나라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황녀와 혼인을 꾸미려한 태종의 신하들이 저지른 잘못은 지금도 유효한 교훈입니다. “국익을 위한 행위”라 하여 다 인정받고 용서되는 것은 아닙니다.

 
 
** 김기섭(세종연구가/한국형리더십교육센터 대표)

세종대왕의 능(영릉)이 있는 여주에서 태어나, 경희대 대학원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하고 세종의 의사결정 연구로 학위를 받았습니다. 오래 전부터 일선 학교와 교육청에서 교육토론과 고전읽기지도법을, 기업에서는 세종리더십을  강의 중입니다. 최근에는 조선왕조실록을 읽으며 한국적 회의와 소통문화, 한국형 토론과 리더십을 개발하고 보급하는데 온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김기섭 기자 youlight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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