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18세기 후반에는 돈이 돌면서 살만하니까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한양에는
수많은 의원과 사설약국들이 들어섰다고 합니다. 특히 오늘의 을지로 입구 ‘구리개[銅峴:
동현]’라고 불렀던 지역은 수많은 약재상이 몰렸습니다. 당시 민간의료는 철저한 의약분업 체계로 알려집니다. 의원이 환자를 진맥한 뒤 ‘화제’라는 처방전을 써주면, 이를 가지고 약국에 가서 약을 사서 달여 먹거나 환 따위로 만들어 먹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의원의 화제는 비싼 값에 팔리기도 하였고, 일종의 비방처럼 유행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당시에도 약의 오남용은 큰 사회문제이기도 했습니다. 의원에서는 강하고, 빠른
약효를 추구했고, 물론 환자들도 원했지요. 그러다 보니 시중에는 가짜 약재가 돌아다니고, 인삼ㆍ녹용ㆍ계피ㆍ부자의 네 가지 약재를 넣지 않으면 약을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