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단군배향’이나 ‘남향봉사’는 ‘사자성어’라기보다 ‘사자용어’일 수 있으나 세종의 정치에서 ‘자주’ 정신을 살피는 뜻에서 알아보고자 한다.)
세종은 나라를 운영하며 조선의 특이한 점을 찾고 드러내고자 노력했다. 그 가운데는
가) 집현전 설치와 학문 진흥
조선 고유의 학문과 문화, 과학 발전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을 찾고 연구하기 위해 집현전을 확충해 나갔다. 그 대표적인 연구물은 《훈민정음》의 창제(세종 25년, 1443년; 반포 1446년)다. 비록 세종대왕이 창제하였다고 공식적으로 실록에 되어 있지만 그 전후의 언어체계 연구에서는 많은 사람의 도움은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나) 공법제정
조선 고유의 공법(貢法) 제정이 있다. 조세 제도를 백성의 토지 생산력에 맞춰 합리적으로 조선 고유의 제도로 개편했다.
다) 조선 고유의 음악정리와 정간보(井間譜) 창안과 측우기 등
그 밖에도 측우기, 고유의 활자 그리고 자주성을 내세운 국방 외교정책으로서 외세(여진ㆍ명)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주적으로 ‘4군 6진을 개척’했다. 특히 이때 외교에서 사대와 교린의 균형을 취해 명나라에는 예를 갖추되(형식적 존중), 일본·여진 등에는 교린(실리적 외교)을 통해 자율적으로 운영하며 국익을 확보했다.
이런 가운데 세종의 자주성 정신의 하나로는 조선의 뿌리인 단군사당을 정리한 것이다.

세종이 단군사당(檀君祠堂)을 세운 행위는, 조선의 고유한 역사와 정통성을 중시하며, 중국 중심의 세계관(중화사상)에서 벗어나려는 자주정신의 표현일 것이다. 곧 존화주의(尊華主義)를 극복하고 주체의식(主體意識)을 강조한 것이다.
사온서 주부 정척(鄭陟)이 글을 올리기를, "지난 신축년 10월에 〈중국〉 조정에 보낼 말을 점고(點考)하라는 명을 받들어 의주에 가서 말 점고하는 일을 마치고 다음 해 2월에 돌아오다가 평양에 들러서 기자 사당(箕子祠堂)을 찾아뵈웠습니다. 그런데 기자 신위는 북쪽에서 남쪽을 향해 있고, 단군(檀君) 신위는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있었습니다. 신이 평양부의 교수관 이간(李簡)에게 물으니,... 나라에서 기자 사당을 문묘(文廟) 동편에 세우라고 명하였고, 또 단군으로 배향(檀君配享) 하라는 영이 있었으므로, 지금까지 이와 같이 하여 제향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 단군은 요(堯) 임금과 같은 시대에 나라를 세워 스스로 국호를 조선이라고 하신 분이고, 기자는 주(周) 나라 무왕(武王)의 명을 받아 조선에 봉(封)하게 된 분이니, 역사의 햇수를 따지면 요임금에서 무왕까지가 무려 1천2백 30여 년입니다. 그러니 기자의 신위를 북쪽에 모시고, 단군의 신위를 동쪽에 배향하게 한 것도, 실로 나라를 세워 후세에 전한 일의 선후에 어긋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이 또 들으니, 기자 사당에는 제전(祭田)이 있고 단군을 위해서는 없어서, 기자에게는 매달 초하루와 보름마다 제물을 올리되, 단군에게는 봄가을에만 제사한다 하옵니다. 현재 단군 신위를 기자 사당에 배향하게 되어서 한 방에 함께 계신데 홀로 단군에게는 초하루·보름 제물을 올리지 아니한다는 것은 또한 미안하지 않을까 합니다. 신의 생각에는 단군의 사당을 별도로 세우고, 신위를 남향하도록 하여 제사를 받들면 거의 제사 의식에 합당할까 합니다.“ 하니, 이 글을 예조에 내리어 그대로 이행하도록 명하였다. (⟪세종실록⟫ 7/9/25)
또 다른 실록 기사가 있다.
”신이 살펴본 바로는, 단군은 요(堯)임금과 같은 때에 임금이 되었으니, 그때부터 기자에 이르기까지는 천여 년이 넘습니다. 유사(攸司)에 명하여 도읍한 곳을 찾아내어 그 의혹을 없애게 하소서." (⟪세종실록⟫10/6/14)
더불어 단군이 도읍한 곳을 찾아보자는 노력도 기울이고 있다.
세종이 단군 사당을 정비한 것은 단순한 종교나 제사 차원을 넘어서는 면이 있다. 첫째는 나라 정통성의 강화다. 세종은 단군 사당을 정비함으로써 조선의 뿌리를 민족 고유의 시조에게 두고 유교적 정통성을 세우려 한 것이다. 둘째 유교적 제례 질서의 정비를 체계 안에 넣어 제사의 혼란을 막으려고 했다. 셋째 지역 세력과 사상을 통합하려 했다. 단군 신앙은 특히 평안도 지역에서 강했는데 이러한 지역 문화를 중앙 통치 안에 넣고자 하는 뜻도 있었을 것이다, 곧 토착적 신앙을 끌어안음으로써 사회 통합을 이루려는 뜻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단군배향’은 단순히 단군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민족의 통합을 강화하려는 뜻이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