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 손금 정주영이 큰 부자가 된 까닭은?

2014.10.12 06:59:58

새롭게 보는 한국경제 거목 정주영(1915~2001) <23>

[그린경제/얼레빗=감영조 기자]  고 정주영 회장에 대해 22회에 걸쳐 그의 인생 전반을 다루는 과정에서 그는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한 일화를 수없이 달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버지의 소 판 돈을 훔쳐 가출했던 소년이 나중에 소 1000마리를 가지고 판문점을 넘어 고향을 방문한 사건은 세기의 뉴스거리가 되었고, 20세기 봉이 김선달이라 할 정주영이 황량한 미포만 사진 한 장으로 조선소를 짓고 26만 톤 유조선을 만든 일화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20세기 최대의 역사 주베일 항만공사를 수주하고 10층 빌딩만 한 구조물 89개를 인도양 건너 운반한 상상초월의 일이라든지, 23만 톤 유조선을 바다에 가라앉혀 서산간척지를 완성하고 한반도 지도를 고친 것도 보통 사람이라면 해내기 어려운 일이라 할 것이다. 망신만 당하지 말라던 올림픽 유치전에서 당당히 일본 나고야를 누르고 88올림픽을 따낸 일도 그의 진가를 여실히 증명하고도 남을 일이다.

그런가하면 위기를 극복한 오뚝이 일화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만한 이력을 지닌 사람이 정주영 회장이다. 어렵사리 차린 자동차수리공장이 궤도에 오르기도 전에 화재를 만나 빚더미에 올랐을 때도 그는 절망하거나 주저 않지 않았다. 오히려 위기의 순간이야 말로 정주영에게는 새로운 사업의 기회이기라도 하는 양 그는 주저앉지 않고 당당히 폐허를 딛고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차렸던 것이다. 수많은 난관에 부딪치고 험난한 파도가 몰아쳐도 결코 굽히지 않았던 정주영의 뚝심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정주영 회장의 일자 손금 

한자말로는 수상(手相)인 “손금”은 관상술(觀相術) 가운데 팔‧손‧손가락‧손톱 따위 생김새나 길고 짧음‧살집‧혈색‧빛깔 등과 손바닥의 무늬(掌紋)와 손금의 모양‧점‧지문(指紋) 따위를 관찰하여 그 사람의 성격은 물론 과거와 현재를 판단하고 그것으로 미래를 예측하여 앞으로의 생활에 대처케 하려는 방법을 말한다. 여기서 갑자기 손금을 얘기하는 까닭은 정주영 회장의 손금이 일반인들과 달리 아주 독특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그의 손바닥을 들여다보면 선명한 일자(一字)손금이다. 

일자 손금은 원숭이 손금 또는 막쥔손금이라고도 하는데 1000명 가운데 한 명 정도가 나타난다고 하며, 이런 일자 손금을 가진 사람은 아이디어가 넘치고 대쪽 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이 대부분이다. 일 할 때는 확실하게 하고, 100이면 100 모두 손에 쥘 수 있다고 하여 “백악”이라고 부른다. 일본에선 천하통일 손금이라 하여 풍신수길, 덕천가강이 그랬고, 레이건 미국 대통령, 천하장사 이만기 등도 일자손금이라고 전한다.

현대 과학문명이 발달한 지금 이러한 손금 이야기에 대해 시큰둥할 사람도 있겠지만 이러한 손금을 가진 사람이 경제 감각이 탁월하고 다른 선과 조화를 이루면 대성할 수 있는 손금이라 하니 정주영과 전혀 무관한 얘기는 아닐 듯싶다. 
 

나이지리아 방문단 녹인 기쁨조 정주영의 구수한 입담 

정주영에게는 또 이런 일화도 있다. 1979년 여름 정주영 회장을 단장으로 하는 20여명의 한국 경제 사절단 일행이 약 일주일 동안의 나이지리아 방문 일정을 마치고 출국을 위하여 라고스 공항에 도착했을 때 이야기다. 일주일 동안 호텔 냉방장치가 제대로 가동이 안 되고, 냉장고도 작동이 안 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치안 문제로 호텔 안에서 감옥을 살다시피 했던 일행은 출국한다는 자체만으로도 기쁨에 들떠 있었다. 하지만, 비행기가 5시간이나 더 기다려야 출발할 것이라는 안내방송이 나왔고, 이 소식에 모두 놀라 어찌 할 바를 몰랐다.

그러나 이 5시간 동안 정주영은 19금 농담 '돌쇠와 아씨' 이야기로 방문단을 녹였다는 이야기다. 자신의 체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방문단을 어떻게 하면 지옥 같은 5시간에서 해방시켜줄 것인가를 고민한 정주영 회장의 살신성인이 아닐까? 어쩌면 그의 이런 입담도 천하의 정주영이 될 수 있었던 하나의 큰 재주였을 것이다.
 

큰 부자가 된 비결

 

   
▲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서울의 한 초등학교에서 어머니회 모임이 열렸는데 정주영은 특별초대 손님으로 나와 특강을 하고, 어머니들과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어머니들뿐만 아니라 초등학생들까지 함께 한 자리로 이때 한 초등학생 3학년 아이가 정주영 회장에게 질문을 했다. “정주영 할아버지는 어떻게 해서 큰 부자가 되셨어요?” 

이 아이는 정주영 회장이라는 사람이 한국에서 가장 큰 부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강의를 들으면서 어쩌면 당연히 궁금했을 질문이었을 게다. 하지만 아무리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온 큰 부자 정주영이라 하더라도 이 말에 답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물론 이 질문은 그 아이뿐만 아니라 어쩌면 당시 청중 모두가 궁금했던 질문이었을지 모른다. 이때 정주영은 먼저 그 아이에게 질문했다.  

“학생, 등산해본 적 있어요?”  
“네, 북한산에 아버지 따라서 가본 적 있어요.” 
“아, 그래요? 나도 시간이 되면 손자들 손잡고 북한산에 올라가지요.” 

그렇게 두 번의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은 뒤 정주영은 말했다. 

“높은 산에 오를 때는 까마득히 높게 바라다 보이는 산꼭대기만 바라보고 올라가면 힘들어서 도중에 포기하기 쉽지요. 가도 가도 저 꼭대기가 그저 높이 있기만 하면 ‘저 높은 데까지 언제 올라가나?’ 하는 생각에 미리 지쳐버리는 거지요. 그러나 한 발짝 한 발짝씩 꾸준히, 그리고 서두르지 않고 발밑만 내려다보며 올라가다 보면 어느 새 산꼭대기는 내 것이 되겠지요?

우리 집이 원래 부자도 아니었고, 또 공장을 하다가 불이 나서 몽땅 날려먹고 새로 시작한 일도 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큰 부자가 되겠다는 생각은 꿈조차 꿀 수도 없었지요. 늘 열심히 일하고 그때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정성을 쏟아가면서 살다보니까 조금 부자가 된 것이지요. 학생도 꼭대기만 쳐다보지 말고 매일 매일 열심히 살아가면 틀림없이 성공할거예요.”  

정말 정주영다운 그리고 그날 강의를 들었던 청중들에게 감동적인 이야기였으리라. 

큰 부자 정주영은 평소 어떤 삶을 살았을까? 전 삼성전자 부사장이었던 고인수 씨는 그의 누리집에 “정주영의 구두”라는 글을 올려 정주영 회장의 검소한 삶을 소개했다.

그에 따르면 “입고 다니는 옷은 춘추복 한 벌로, 겨울에는 양복 안에 내의를 입고 지냈다. 그의 등산바지는 재봉틀로 깁고 기운 지게꾼 바지와 다름없었다. 또 구두가 닳는 것을 막으려고 굽에 징을 박아신고 다녔다. 계속 굽을 갈아가며 같은 디자인의 구두를 30년 넘게 신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유물 중에 구두가 공개됐는데 구두 양쪽 엄지발톱 위치에 각각 구멍이 나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정 회장이 30년 넘게 살아온 청운동 집 거실의 가구들을 보면 소파 가죽은 20년 넘게 쓴 나머지 낡아버렸고, 의자와 탁자 나무들은 칠이 벗겨져 수리한 자국들을 여기저기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또 그 흔한 장식품 하나 없었고, 텔레비전도 요즘 흔히 쓰는 대형 브라운관이 아니었고 17인치에 불과했다니 한국의 큰 부자 정주영의 검약 정신은 상상 이상임을 알 수 있다.

청빈한 삶으로 유명한 법정스님이야말로 종교인이었기에 그렇다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큰 부자 정주영의 삶이 이런 정도라면 경악을 금할 수 없을 정도다.  

이렇게 정주영에 관한 일화는 수없이 많다. 그가 그만큼 큰 인물이었음을 웅변적으로 얘기해주는 것이리라. 정주영. 이제 그는 가고 우리 곁에 없다. 그러나 그가 이룩해 놓은 것들과 그의 일화는 영원히 우리 곁에 남아서 우리를 풍요롭게 하지 않을까? 그의 끝없는 일화의 세계로 다시 들어가 보자.(계속)

 

김영조 기자 pine996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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