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그리고 최근의 일들을 보면 정사에서는 옛날 법을 변경하고 인재를 취하는 데에는 나약한 사람만을 채용하고 있습니다. (중간 줄임) 이제 만약 전하의 총애만 믿고서 본분에 지나친 것을 삼가라는 경계와 복이 지나치면 재앙을 당한다는 교훈을 생각하지 않고 벼슬 반열에 끼어 따라다니고 길가에서 떠들어대며 의기양양하게 자족하면서 아무것도 꺼리는 바가 없이 처신한다면 또한 사람들의 드센 비방과 무엄하고 불경스럽다는 주벌이 잇따라 일어나게 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 때문에 신이 머뭇거리고 주저하면서 달려 나가고 싶어도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는 고종실록 10년 (1873) 10월 25일 기록으로 올바른 소리를 거침없이 하던 최익현 선생의 정치 폐단 시정 요구 상소문의 일부입니다. 이에 고종황제는 답하기를, “그대의 이 상소문은 가슴속에서 우러나온 것이고 또 나에게 경계를 주는 말이 되니 매우 가상한 일이다. 감히 열성조(列聖朝)의 훌륭한 일을 계승하여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제수한다. 그리고 이렇게 정직한 말에 대하여 만일 다른 의견을 내는 사람이 있다면 소인이 됨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라고 하지요.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1833-1907) 선생은 나라가 기울자 을사오적의 죄가 아비나 임금을 죽인 것 보다 더 크다는 상소를 올려 나라를 팔아먹은 이들을 처단 할 것을 주장하며 호남으로 떠나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하는데 이때 나이가 74살의 고령이었습니다.
▲ 보물 제1510호 면암 최익현 초상(문화재청 제공)
면암 선생은 1833년에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나 스물 두 살 되던 해인 185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나 대원군의 잘못된 정치에 대해 상소하고 관직을 삭탈당하기도 하였지요. 그러다가 동부승지로 재 등용되지만 대원군의 서원 철폐와 한일 통상을 반대하는 ‘척사소(斥邪疏)’를 올렸으며 그 뒤 전라도 순창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전하다가 체포되어 대마도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삶을 마감하게 됩니다. 조정에는 바른 말을 거침없이 했으며 일제에는 추호도 흔들림 없는 자세로 의병을 일으켜 구국정신을 실천한 최익현 의병장! 오늘은 1906년 면암 최익현 선생이 의병을 일으킨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