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박물관, 아는 만큼 보이는 박물관

2021.03.08 12:16:27

[서평] 《박물관 보는 법》, 황윤 글‧ 손광산 그림, 유유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박물관은 그 자체로 하나의 훌륭한 작품이다. 전시를 보기 위해 박물관을 찾는 경우도 많지만, ‘박물관’이라는 공간이 주는 특유의 느낌이 좋아 즐겨 찾는 이들도 많다. 그러나 박물관이 갖는 존재감만큼, 그 공간의 묵직한 역사를 친절히 짚어낸 책은 흔치 않다. 박물관 마니아를 자처하는 저자 황윤이 공들여 집필한 이 책 《박물관 보는 법》은 한국에서 박물관이 어떻게 탄생했고, 어떻게 발전해왔으며, 눈여겨보아야 할 박물관에는 어떤 곳들이 있는지 진중하고도 쉽게 설명해준다.

 

 

한국에서 박물관의 역사는 일제에 의해 반강제로 시작되었다. 일제는 고종의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 삼아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킨 이후, 전국에서 반일 여론이 들끓자 국면 전환용 이슈로 왕실박물관 건립을 꺼내 들었다. 왕실박물관 건립을 조선의 근대화 업적으로 내세워 조선왕조를 낡은 ‘전근대’로 보이게 함과 동시에, 새롭게 즉위한 순종이 창덕궁 내 박물관 건립을 주도하게 함으로써 일제는 조선의 근대화를 추진한 선진국으로 홍보하고자 했다.

 

“어찌 시체와 함께하던 물건들이 궁궐 내에 전시되어야 한단 말이오?” 1907년, 순종 황제 앞에서 여러 대신이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고종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퇴위 되고 그를 따르던 신하와 궁궐 사람들이 대규모로 숙청되면서 조선은 국가 멸망의 암울한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난데없는 논란거리가 부상했다. 창덕궁 안에 왕실이 주도하는 박물관을 건립하는 사안이었다. (p.25)

 

시체와 함께하던 물건이 궁궐 내에 전시되고, 일반인이 흙 묻은 발로 궁궐에 출입하는 것은 당시 박물관 건립을 반대하던 이들에게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었으나, 결국 순종은 “옛 성현의 예를 보아도 명군은 백성과 함께 즐기었다”라는 명분으로 박물관 건립을 승인했다. 이것이 한국 최초 박물관인 이왕가박물관의 시작이었다.

 

이후 순종은 유물 수집에 심혈을 기울여 1908년부터 1917년까지 10년 동안 왕실이 수집한 유물의 규모는 무려 1만 122점이었으며, 구입비로 쓴 금액도 21만 원에 달했다. 이왕가박물관은 값을 후하게 쳐주는 것으로 소문이 나 좋은 작품들을 대거 수집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경술국치 이후 무차별적인 도굴로 일본을 비롯한 나라 밖 각국으로 유출되던 유물 다수가 국내에 남게 되었으니, 이는 순종의 잘 알려지지 않은 업적이라 하겠다.

 

이 시기 수집한 작품 중 가장 소중한 무가지보(無價之寶)를 꼽는다면 금동반가사유상(국보 83호)을 들 수 있다. 삼국시대 말기 문화의 정수를 집약한 것으로 평가되는 이 유물은 1912년 이왕가박물관이 일본인 고미술상에게 2,600원에 사들인 것으로, 오늘날의 가치로 환산하면 약 5~7억 원의 거액이었다. 당시 그 정도 거금을 문화재 한 점에 투척할 수 있는 곳은 이왕가박물관밖에 없었다. 이왕가박물관이 사들이지 않았다면 십중팔구 나라 밖으로 반출되어 행적이 묘연해졌을 유물이, 다행히 이 땅에 남아 오늘날 국립중앙박물관을 대표하는 유물이 된 것이다.

 

 

이 금동반가사유상과 쌍벽을 이루는 유물이 바로 데라우치 총독이 소장했다가 본국으로 돌아갈 때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기증한 국보 78호 금동반가사유상이다. 조선총독부 초대 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식민지 병합의 다양한 성과를 홍보할 목적으로 1915년 조선총독부박물관을 건립했다. 문화 애호가를 자처하며 개인적으로도 많은 유물을 수집했던 그는 1912년 한 일본인 고미술 소장가로부터 반가사유상을 상납받았고, 1916년 본국으로 귀환할 때 반출이 여의치 않자 조선총독부박물관에 기증하고 떠났다.

 

오늘날 국립중앙박물관의 대표적인 유물이 된 두 반가사유상은 이리하여 조선에 남았다.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은 2층 기증관 입구에 약 440㎡ 규모의 전용 전시실을 마련해 올해 11월부터 두 반가사유상을 나란히 전시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모나리자를 보러 루브르박물관을 찾아가듯, 두 반가사유상을 국립중앙박물관의 대표 브랜드로 키우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유물 보존을 위해 한 점을 전시하면 다른 한 점은 수장고에 보관하고, 한 점을 나라 밖에 대여하면 다른 한 점은 전시실로 들어오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제 두 점이 나란히 전시되면, 78호와 83호 중 어떤 쪽이 더 마음에 드는지 꼼꼼히 견줘보는 것도 좋겠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여섯 번의 유랑 끝에 오늘날의 자리에 정착한 경위도 흥미롭다. 1945년 경복궁 내의 옛 조선총독부박물관 자리에서 시작한 국립중앙박물관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민족박물관이 있던 남산에 자리를 잡았고, 1955년에는 덕수궁 석조전으로 이전했다가 1972년 국립민속박물관이 지어지면서 그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다소 충격적인 것은 아시안 게임이 개최된 1986년, 박물관을 다시 옛 조선총독부 건물로 이전한 것이다. 정부에서 새 박물관을 건립할 예산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300억 원을 들여 임시로 총독부 건물을 개조하면서, 어쩔 수 없이 식민지배의 유산과 한 나라의 대표 박물관 사이에 ‘불편한 동거’가 시작됐다. 아무리 박물관을 신축할 예산이 부족했다지만 조선총독부 건물을 활용하겠다는 발상은 지나쳤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리고 10년 뒤인 1995년, 조선총독부 건물이 철거되면서 다시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 8년 동안 더부살이를 한 끝에 마침내 2005년 10월 28일,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이 탄생했다. 60년 동안 여섯 번이나 짐을 쌌으니 세계 박물관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기록이다. 번듯한 국립중앙박물관을 갖기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 이런 험난한 여정을 알고 나면 국립중앙박물관의 존재와 위상에 자연스레 뿌듯함을 느끼게 된다.

 

 

이와 같은 한국 박물관사의 굵직한 줄기 외에도 한국 유물을 지키기 위해 음으로 양으로 애썼던 간송 전형필, 수정 박병래, 동원 이홍근 등 수집가들의 이야기도 무척 흥미롭다. 대학박물관을 다룬 부분에서는 연세대박물관, 이화여대박물관, 동아대 석당박물관이 유서 깊은 대학박물관으로 비중 있게 다뤄진다. 기업가가 세운 박물관(미술관)의 경우 호암미술관과 리움미술관, 호림박물관, 서울미술관, 아라리오미술관 등도 추천할 만한 사례로 꼽는다.

 

근대의 탄생과 함께 대중 속으로 들어온 공간, 박물관. 그 이전에는 보물을 감상하는 미적 안목은 지극히 소수의 상류층에게만 허락된 것이었다. 그러나 ‘명군이 백성과 함께 즐기는’ 박물관의 등장과 함께 안목의 평준화 시대가 열렸고, 누구나 유물을 보고, 생각하고, 자신의 느낌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유물을 보고 감상을 말할 수 있는 것, 그것은 근대가 가져온 하나의 축복이었다.

 

지금은 너무나 흔한 ‘박물관 관람’이라는 활동이 옛날에는 상상도 하지 못할 사치였다고 생각하면 박물관에 가는 발걸음이 한결 소중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게다가 그 박물관에 있는 유물들이 각고의 노력 끝에 이 땅에 보존된 것이라면 틈틈이 하나라도 더 눈에 담아볼 일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처럼, 알고 보는 박물관은 그 이전과는 또 다른 생생한 존재감을 뿜어낼 것이다. 그런 영화제목도 있지 않던가. “박물관이, 살아있다!”

 

《박물관 보는 법》 / 황윤 글ㆍ손광산 그림 / 유유 / 9,000원

 

 

우지원 기자 basicfor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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