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지하철 타고 역사 한 바퀴

2021.05.31 11:05:41

《지하철을 탄 서울 인물史》, 서울역사편찬원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회기역에서 만나!”

우리는 날마다 지하철을 타고, 또 지하철역에서 만나기도 하지만, 그 역의 이름이 어디서 유래되었는지는 잘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무심코 지나치는 지하철역에도 그 나름의 유래와 역사가 숨겨져 있으니, 그런 역사를 알게 된다면 날마다 오가는 지하철이 좀 더 정겹게 느껴질 터이다.

 

이렇듯 일상에서 역사의 향기를 접하게 해 주는 책이 있다. 바로, 서울역사편찬원에서 서울 시민을 대상으로 진행한 서울역사강좌를 책으로 엮은 《지하철을 탄 서울 인물史》다. 서울 시민이 날마다 접하는 지하철역을 소재로 한 역사 이야기라니, 그 기획이 절묘하다. 늘 그 자리에 있던 지하철이라도, 숨겨진 역사를 알고 나면 달리 보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책에 소개된 지하철역은 모두 16개다. 이 역들은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첫째, 광복 이후 일본식 지명을 청산하기 위해 잘 알려진 역사적 인물의 시호나 이름을 따서 지어진 역이다.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을 따른 을지로입구역과 을지로3ㆍ4가역, 이순신 장군의 시호 ‘충무공’을 따른 충무로역, 을사조약에 반발해 자결한 애국지사 민영환의 시호 ‘충정공’을 따른 ‘충정로역’이 이에 해당한다.

 

둘째, 역사 속 유명한 정자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역으로, 망원역과 압구정역이 대표적이다. 망원역이라는 이름은 정자 ‘망원정(望遠亭)’에서 유래되었다. 망원정은 원래 세종의 형이었던 효령대군의 별장 ‘희우정(喜雨亭)’이었고, 형과 무척 사이가 좋았던 세종이 이 정자의 이름을 하사하며 자주 행차하기도 했던 당대의 명소였다. 그리고 1483년(성종 14), 효령대군은 성종의 형이었던 월산대군에게 이 정자를 물려주며 형제간의 우애를 기원했고, 월산대군은 정자의 이름을 ‘망원정’으로 고쳐 형제간에 회포를 푸는 장소로 활용했다.

 

 

압구정역은 세조ㆍ성종 시기 권력의 정점에 서 있었던 한명회가 세상의 욕심을 잊고 갈매기와 친하게 지내는 정자라는 뜻의 ‘압구정(狎鷗亭)’을 지은 것이 시작이었다. 당대의 권신이었던 한명회는 말년에 자신의 입지가 취약해지자, 자신이 권력에 그다지 욕심이 없음을 은근히 피력하기 위해 ‘압구’라는 이름을 택한 것일지도 모른다.

 

셋째, 이름난 역사적 인물의 탄생 설화나 비화, 호 등을 따라 지어진 역이다. 낙성대역은 강감찬 장군이 태어날 때 집터로 큰 별이 떨어졌다 하여 그 집터가 ‘낙성대’라 불리던 것에서 유래되었다. 실제 관악구 봉천동에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3호로 지정된 낙성대가 있어 그의 탄생장소를 보여주고 있다.

 

왕십리역은 조선 건국 초 태조 임금의 스승이었던 무학대사가 천도할 자리를 찾아보던 중, 현재의 왕십리 일대에 도성의 터를 정하려 하자 한 노인이 나타나 그곳에서 10리를 더 가서 국도의 터를 잡으라고 일깨워준 것에서 기인했다.

 

그밖에 비교적 덜 알려진 역에도 역사가 깃들어 있다. 고려 말의 은둔 선비 이집(李集)의 호 ‘둔촌(遁村)’을 딴 강동구 둔촌역, 조선 초 외교 전문가이자 빼어난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던 서거정의 호 ‘사가정(四佳亭)’을 딴 중랑구 사가정역에 깃든 두 사람의 일생도 흥미롭다.

 

 

넷째, 그 지역에 있었던 유명한 무덤의 이름을 따른 역이다. 회기역의 이름은 이 근처에 있었던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무덤인 ‘회묘(懷墓)’를 따른 것이다. 원래 폐비 윤씨의 무덤은 경기도 장단에 있었으나, 연산군이 그녀를 제헌왕후로 추존하고 지금의 회기동 일대로 이장하여 회릉을 넓게 조성하였다. 이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면서 다시 회묘가 되었다가, 1969년 경희의료원을 신축하면서 고양시에 있는 서삼릉으로 이장되었다.

 

현재 태릉선수촌으로 유명한 ‘태릉입구역’에서 태릉은 누구의 무덤일까? 바로 문정왕후의 능이다. 중종의 세 번째 왕비였던 문정왕후는 사후 중종과 함께 묻히기 위해, 고양시에 첫 번째 왕비 장경왕후의 능과 같이 조성되어 있던 중종의 능을 봉은사 인근인 오늘날의 정릉으로 옮겼다. 그러나 아들인 명종이 중종의 능을 옮긴 뒤 나라에 나쁜 일이 많아졌다면서 새 장지를 선정하게 했고, 결국 문정왕후는 오늘날의 태릉에 묻히게 됐다.

 

 

 

다섯째, 독립과 관계된 주요 인물들의 이야기가 깃든 역이다. 먼저, 독립문역은 과거 중국 사신을 접대하던 사대외교의 상징물인 영은문을 부수고 세운 독립문이 자리 잡은 역이다. 1896년 서재필은 독립문과 함께 자주독립의 상징으로 독립관의 건립을 추진했고, 독립신문을 펴내며 활발한 계몽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서재필은 미국인 필립 제이슨이라며 그의 행적에 의문을 던지는 사람들도 있다.

 

효창공원앞역은 애국지사들이 묻혀있는 효창공원이 있는 역이다. 효창공원은 조선시대 정조의 큰아들로 일찍이 죽은 문효세자의 무덤인 효창묘에서 시작되었다. 광복 이후 백범 김구는 조국 광복을 위해 헌신한 애국지사들의 묘소를 이곳에 마련하기로 하고, 1946년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의 유해와 안중근 의사의 빈뫼(가묘)를 안장하였다. 이동녕과 차리석, 조성환 또한 이곳에 안장되었으며, 2002년에는 백범김구기념관도 개관하여 민족정기를 일깨우는 산실로 활용되고 있다.

 

 

매일 오가는 지하철이라도, 그 이름의 유래에 대해 궁금증을 가져본 이는 많지 않을 듯하다. 그러나 무엇이든 아는 만큼 보이는 것처럼, 역들의 유래를 알고 나면 신기한 마음과 함께 새삼 이 땅에 수많은 사람이 살다 갔으며, 그들의 인생 역정과 희로애락이 오늘날까지 알게 모르게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책은 이 땅에 살다간 사람들의 인생 역정을 지하철역과 연결해 알차게 풀어내는 책이다. 역마다 해당 전공교수가 집필하여 깊이를 갖추었으나, 다소 딱딱한 학술적 글쓰기로 대중적 재미를 조금 놓친 듯한 부분은 아쉽다. 그러나 ‘지하철역’이라는 친근한 소재를 택하여 이처럼 짜임새 있는 책을 엮어낸 서울역사편찬원의 기획에 박수를 보낸다. 이 책과 함께 사(史)호선을 타고 돌다 보면, 아침저녁으로 겪는 지옥철의 고단함도 조금은 덜어질 수 있지 않을까.

 

 

우지원 기자 basicfor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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