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융합정치

2021.07.08 11:30:02

하위지의 간언과 대간들의 반발을 포용함
[‘세종의 길’ 함께 걷기 74]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세종 20년 4월 12일 중시(重試)가 있었다. 33명이 합격했는데 그 중 하위지(河緯地)가 27살의 나이로 장원을 차지했다. 시험 과제는 ‘국정에 도움이 될 만한 의견을 내라는 것’이었는데 하위지는 임금과 언관들을 싸잡아 비난하는 내용을 적어냈다. 그러자 조정과 신료들 사이에 소용돌이가 일었다. 대사헌 안숭선ㆍ이승손ㆍ강진덕 등 10여 명의 사헌부 대간들이 사직을 청하게 되었다.

 

하위지의 간언

 

먼저 대사헌 안숭선(安崇善)이 사직하여 말하기를,

 

"신이 본시 유약한 힘으로 중임(重任)을 맡고서 스스로 맞지 않음을 헤아리고 부끄럽던 차에 탄핵을 당하였으니, 그 죄를 달게받고 물러남을 편하게 생각하였사온데, 그대로 본직에 돌아가게 하시니 근일에 와서는 몸과 기운이 파리하고 피곤하며, 바라옵건대, 직무를 해면케 하시고 한산한 곳에 버려두시어 온전히 의약의 치료나 받게 하옵시면, 성은에 보답도록 하겠나이다."

 

다시 집의(執義) 이승손(李承孫)이 사직하여 말하기를, "청하옵건대, 신의 직임을 해면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장령 강진덕(姜進德)ㆍ지평 민건(閔騫), 그리고 우사간 임종선(任從善) 등이 역시 글을 올려 사직하며, 아뢰기를,

 

“거생(벼슬 얻으려는 사람) 하위지가 절의 사리각(부처의 사리를 모셔 둔 전각) 수리의 그릇됨을 말하면서 대간들의 실책을 극구 풍자하여 신 등은 송구하여 감히 더는 직임을 더럽히지 못하겠나이다." 하였다. (《세종실록》 20/4/12)

 

유교를 국가의 기본으로 삼은 나라에서 대간들이 절을 수리하는 임금에 동조한 것이라는 비난이 일고 있었다. 하루 이틀 이야기가 궐 안에 스믈스믈 퍼져가고 있었다. 새로운 선비의 비난을 참지 못해 일어난 일이었다.

 

세종은 다시 답안을 가져다 보았다. 그리고 하위지의 대책과 시관(試官)이 물은 것을 들여오라 하고 말하기를,

 

"대저 과거를 설시하여 대책을 시험하는 것은 그 직언을 구할 따름인데, 이제 위지의 책문은 강직하게 해답하고 조금도 은휘(隱諱, 꺼리어 감추거나 숨김)하지 않았으니 매우 취할 만한 것이다. 또 그의 논한 바는 무릇 간관의 과실을 말한 것뿐인데, 경 등이 어찌 이것을 가지고 꺼리고 싫어한단 말인가.

 

더욱이 이 흥천사의 불탑은 바로 조종(祖宗)께옵서 창건하신 것으로서, 해가 오래되어 쓰러지게 되었으므로 내가 조종을 위하여 이 역사를 일으킨 것인즉, 본시 지나친 행동거지도 아니려니와 대간도 역시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니겠는가."(《세종실록》 20/4/12)

 

하고, 모두 그 소장(疏狀)을 도로 내어 주었다. 사헌부에서는 다 물러가고, 유독 사간원에서 다시 아뢰기를,

 

“신 등이 일찍이 흥천사(興天寺)의 일을 가지고 누차 그 정지를 청하였사오나 윤허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신 등이 모두 충성껏 간(諫)하는 정성이 없었던 탓으로 본시 죄가 있으며, 영의정 황희(黃喜)는 수상으로 있으면서도 일찍이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고시를 관장하는 날에 이르러 거생의 대책문을 보고는 이를 포상 찬미하며 장원으로 선발하였다 온즉, 그는 속으로 그르게 여기면서도 말하지 않았음이 분명하옵니다." 하며 영상인 황희를 지목해 비난했다. 그러자 세종은 성을 내어 따지고 묻기를,

 

“내가 불탑의 중수를 명하고서도 거생들이 바르게 술회한 말을 옳게 생각하는데, 하위지의 대책도 역시 그 대체를 논한 것이니, 황희가 어찌 이를 상 받는 열에 놓지 않겠느냐”며 영상의 편을 들었다.

 

대간의 임무

 

이에 간관이 재차 청하였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고’ 부득이 물러갔다. 때마침 시책(試策) 1조에 이르기를,

 

"대간(臺諫)이란 임금의 이목(耳目)이며 조정의 중한 인물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어진 이를 택하여 이를 제수하고 서열의 구애 없이 벼슬자리를 옮기는 것은, 당직(讜直)한 언로(言路)를 개방하고 그들의 풍채와 기개와 절조를 권장하려는 것이었다. 근래에는 으레 자격을 따라 하고 보통 관원과 다름이 없어, 혹자는 말하기를, ‘이렇게 하게 되면 대간이 한자리에 오래 머물게 되어 격려하는 뜻도 없으려니와, 언로가 장차 막히게 되어 정직한 진언자가 적을 것이라.’라고도 하는데, 그 말이 과연 그러한가, 그렇지 않은가." 하였다. 하위지가 이에 대답하기를,

 

“대간이란 임금의 좌우에 서서 임금과 더불어 시비(是非)를 다투며, 그 임무가 또한 무겁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이 세상에 나서 벼슬을 않는다면 모르거니와, 벼슬을 한다면 반드시 대간이 되어 임금과 가까이하려는 것은, 족히 그 말씀을 듣고 계책을 행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할 만한 때를 만나고 말할 만한 책임을 맡고 있으면서도, 한번 정직한 말을 털어내지 않아서 무거운 신망을 저버리게 되면, 들끓는 선비들의 공론에 어찌하겠습니까.”

 

 

세종은 하위지가 지적한 것은 의로움이고 이에 장원으로 택한 것 또한 황희의 기백이라고 풀이했다. 하위지가 강직하게 대답했다 하여 죄를 가하려고 하더라도, 신진 인사의 생각이 부족하여 고루한 말이라 이르고 극력 진언하여 구제에 힘씀이 당연하거늘, 도리어 이를 잘못으로 돌려 후일 직언하는 길을 막게 하고, 심지어는 고시를 관장한 대신까지 그 죄를 청하여, 나라에서 선비를 선발하는 공명한 의의까지 모욕함은 간신(諫臣)의 체통에 어긋나는 바이니, 이를 꾸짖어 물어 밝혀 아뢰도록 하라고 했다. (《세종실록》 20/4/14)

 

임금의 잘못을 지적한 하위지의 기개와 그런 답안을 자원으로 뽑은 황희의 배포와 용기 그리고 변변치 못하게 현실적인 사간원들의 타성을 단번에 잠재운 세종의 지지를 보면 당시 선비들의 소통의 자유로움과 그리고 세종의 포용력 등이 하나의 그림 같은 구도로 그려지고 있다.

 

황희가 몇 불미한 사건을 일으키면서도 명재상의 이름으로 남아 있는 것도 이러한 사건이 뒷받침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세종과 신하 사이에 믿음이 있었던 것이리라. 사직서를 냈던 안숭선은 이 일이 있고 나서 4월 28일 공조 참판[차관급]에 임명된다. 모두가 사는 융합 정치의 한 모습이다.

 

국시인 유교에 어긋나는 세종 개인의 불교에 마음을 의탁하는 행위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다.

 

하위지는 이후에도 세종의 신임을 받아 날마다 임금과 마주하고 여러 일을 맡았다. (《문종실록》 즉위년 8월7일) 이후 문종, 단종, 세조 때까지 강직하고 과감하게 간언을 계속했고 세조 때 단종 복위 사건으로 장렬하게 산화했다. 의를 지킨 선비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선비의 격

 

사람에게는 격이 있다. 인격이다. 선비에게는 풍이 있어야 했다, 그리고 나라에도 격이 있어야 했는데 국격이었다.

 

바둑에서 급이 낮은 사람에게는 기풍(棋風)이라는 게 없다. 자기 집 지키기에 바쁘다. 죽고 사는 게 없는지 살피며 집 지키기도 바쁘다. 1급 이상이 되면 자기 풍이 생긴다, 공격형ㆍ집바둑 형, 실리파ㆍ대세파, 상대를 인정하는 바둑에서 무자비한 공격형 등 바둑판 위에 자기 성격을 그려간다. 경제적으로 가난한 백성은 초가가 무너지지 않게 해마다 볏짚으로 보수하기에도 바쁘다. 세상 돌아가는 정세를 읽지 못하는 백성은 먹고사는 일에 바쁘다.

 

선비는 어느 정도 수양을 거치면 자기 풍을 갖게 된다. 이는 현실 인식에서 차이가 드러난다. 현실유지형과 개혁성향, 공격형과 화합형 등 다양한 성격이 대인관계는 물론 일상생활에서도 행동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하위지의 선비로서의 기개와 이를 살린 세종의 포용력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었다.

 

 

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kokim9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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