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그 섬에는 무슨 일이 있었나?

2021.09.20 10:53:45

《목호의 난, 1374 제주》, 정용연, 딸기책방, 2019

[우리문화신문= 우지원 기자]  ‘말 키우는 오랑캐’, 목호(牧胡)! 목호는 고려 말, 제주도에 뿌리내리고 살았던 몽골인이다. 그들은 몽골이 제주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하고 직속령으로 편입한 이래 제주에서 말을 비롯한 각종 가축을 키우며 100여 년 동안 살아가고 있었다.

 

고려를 부마국으로 만든 몽골은 제주가 필요했다. 일본 정벌을 위한 전초기지이자 말의 산지로서 제주의 가치는 상당했다. 몽골은 제주를 원이 경영하는 14개 목장 중 하나로 삼고, 약 1,500명의 군사를 주둔시키며 말을 길러냈다.

 

‘목호’라 불리는 이 군사들은 처음에는 낯선 존재였지만, 점차 제주 토착민과 혼인을 하고 아이를 낳으며 깊숙이 섞여들었다.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는 100여 년간 살을 맞대고 살며 이들은 더는 오랑캐가 아닌, 이웃집 아들이자, 남편이자, 가장인 그런 존재가 되었다.

 

이들은 1374년, 최영 장군이 이끄는 토벌군에게 깡그리 몰살당한다. 도대체 그 섬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단지 ‘제주의 목호가 일으킨 반란을 최영 장군이 진압한 사건’으로 갈무리하기에는 너무나 응어리진 그해 여름의 역사를, 작가 정용연이 《목호의 난, 1374 제주》이란 한 권의 만화로 숨가쁘게 풀어낸다.

 

 

그는 2014년 한 잡지에 ‘목호’라는 제목으로 이 작품을 처음 연재했다. 그때는 24쪽씩 5회로 다소 짧은 분량이었다. 한 권의 책으로 내기에는 부족했고 미처 담아내지 못한 이야기가 많다는 아쉬움에 추가 작업을 결심, 본격적으로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지만 작업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고, 5년이 지나서야 작품을 출간할 수 있었다.

 

이 책에는 작가가 흘린 땀의 결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작가가 보여주는 ‘목호의 난’은 단순히 오랑캐의 난을 최영 장군이 멋지게 진압했다는 식의 영웅적인 서사가 아니다. 그런 의도였다면 최영 장군의 관점에서 오랑캐를 쳐부수는 내용만으로도 지면이 모자랐을 것이다.

 

대신, 작가는 목호였던 ‘석곡리보개’와 그의 처이자 유배 온 고려 관리의 손녀딸이었던 ‘버들아기’의 사랑을 전면에 그려낸다. 이들의 애틋한 사랑은 고려 조정의 토벌이 목호와 함께 살아가던 제주사람들에게도 큰 상처를 남겼음을 보여준다.

 

사실, 제주 토착민에게는 몽골과 고려, 그 어느 쪽도 반갑지 않은 두 육지세력이 제주에서 한바탕 학살을 벌인 셈이었다. 탐라가 고려에 복속돼 지방관이 파견된 것은 의종 7년(1153)이 되어서였다. 오래도록 자주국을 유지하던 탐라의 주민들에게 ‘고려인’이라는 정체성은 여전히 낯설었고 몽골은 완전한 침입자였다.

 

이들에게 1374년의 일은, 어쩌면 ‘목호의 난’이 아니라 ‘여몽전쟁’이었을지도 모른다. 또는, 고려와 몽골이 함께 소란을 일으킨 ‘여몽의 변’이었을 수도 있다. 이렇듯 작가가 많은 지면을 할애해 소개하는 제주의 아름다운 풍경, 목호와 제주사람 간의 사랑, 사건이 일어난 배경을 따라가다 보면 고려인과 몽골인, 두 육지세력 사이에 끼어 무고한 피해를 겪어야 했던 제주 토착민들의 고통에 더욱 마음이 쓰인다.

 

목호와 고려 조정의 불협화음은 예고된 것이었다. 원나라가 멸망하고 명나라가 들어서자 명은 좋은 말 2천 필을 바칠 것을 명한다. 그러나 제주에서 말을 기르고 있던 목호들은 원의 신하였고, 명은 조국을 멸망시킨 원수일 뿐이었다. 계속해서 고려 조정의 명에 맞서던 이들은 타협안으로 말 300필을 육지로 올려보낸다.

 

그러나 명의 사신들은 300필로는 황제의 진노를 피할 수 없다며 타협을 거부했고, 결국 공민왕은 이들을 정벌할 것을 결심한다. 이리하여 1374년, 고려 최영 장군이 이끄는 전함 314척, 군사 25,600명이 추자도를 거쳐 바다를 건넜다. 100여 년 전, 여몽연합군이 삼별초를 치기 위해 동원한 전함 수의 두 배였다.

 

고려 함대는 섬 서북쪽에 있는 명월포(현재 제주시 한림읍 옹포리)에 정박했다. 최영 장군은 목호 지도부를 회유하려 했으나 그들은 항복을 거부했다. 부러질지언정 굽히지는 않겠다는 결기였다. 결국, 양쪽은 사활을 건 결전을 치른다.

 

선발대로 11척의 배가 해안가에 상륙, 네 방향으로 군사를 나누어 공격했으나 목호의 저항은 거셌다. 상륙한 고려군은 관음보 등이 이끄는 기병 3,000에 의해 모조리 살육당했다. 그러나 목호의 방어선에는 한계가 있었다. 최영 장군이 이끄는 2차 상륙군이 휘몰아치자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검은오름, 새별오름, 중산간지대를 넘어 남쪽으로 계속해서 후퇴했다.

 

고려군에 밀려 남쪽으로 달아난 그들이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한 곳은 서귀포 해안이었다. 더이상 달아날 곳은 없었다. 뒤로는 바다뿐인 완벽한 배수진이었다. 목호군은 아래와 같이 외치며 마지막 전열을 가다듬었다.

 

"여기 해와 달이 그려진 깃발이 보이는가! 우리들은 잿빛 푸른 이리의 피를 이어받은 전사들, 해와 달은 언제나 우리를 비추었고 탐라의 1만 8,000 신들 또한 우리를 보살피고 있다. 물러서지 마라. 도망가는 자는 적들의 손에 죽기 전 우리 손에 죽을지니. 이 섬의 주인은 육지에서 온 저들이 아니라 여기 살고 있는 우리다. 이곳은 영원히 터 잡고 살아갈 우리의 땅이다. 우리가 건조한 배 한 척, 우리가 기른 말 한 마리, 우리가 짠 피륙 한 장, 우리가 딴 귤 하나 내줄 수 없다. 저들은 우리로부터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돌아갈 것이다. 아니, 저들은 살아서 섬을 벗어나지 못하리라. " (p.209~210)

 

그러나 압도적인 수의 고려군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결국 대다수가 해안가에서 몰살당하고, 살아남은 자들은 가까스로 바다를 건너 범섬에 당도했다. 해안가와의 거리가 무척 가까운, 범 모양을 한 작은 무인도였다.

 

그러나 거기서도 오래 버틸 수 없었다. 고려군이 명월포에 정박시켜두었던 배 40척을 때맞춰 범섬으로 이끌고 오자 기회를 보아 탈출하려던 목호군의 계획도 물거품이 됐다. 더는 희망이 없음을 깨달은 그들은 한 명 한 명, 절벽에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목호군의 지도자였던 석질리필사가 아들 셋과 일당 수십을 이끌고 항복했으나 자비는 없었다. 이들은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

 

그 후 섬 동쪽을 관장하던 석다시만, 조장훌고손 등이 목호 수백을 거느리고 고려 군사에 맞섰으나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목호군을 완전히 진압한 고려군은 상륙한 지 한 달여가 지난 후인 9월 22일 섬을 떠났다.

 

전쟁은 한 달만에 끝났지만, 이 한 달이 남긴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다. 목호군이 몰살당한 후에도 목호의 가족, 목호군에 가담했던 이들, 목호를 도왔던 이들은 색출되어 죽임을 당했다. 목호가 그들끼리만 모여 살던 것이 아닐진대, 이들과 함께 살던 제주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아픔 또한 극심했다.

 

어쩌면 제주 사람들이 가끔 ‘육지 것’들에게 보이는 불신과 미덥지 않은 눈길은 이런 뿌리 깊은 폭력과 증오의 역사가 섬에 아로새겨져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중앙정부는 그들을 착취하고 수탈하고 토벌하는 또 하나의 거대한 폭력이었고, 그런 역사는 끊임없이 되풀이됐다.

 

이 책을 보고 나면 ‘~의 난’이라 이름 붙이는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얼마나 중앙 중심의 시각인지, 사건이 끝난 이후에도 남겨진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아픔과 배신, 불신과 반목이 쌓여갔을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제목 ‘목호의 난’은 오히려 반어법에 가깝다. 1374년, 그 섬에 일어난 일을, 이제는 다른 시각에서 바라봐야 할 때다.

 

 

우지원 기자 basicfor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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