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련의 사랑으로도 막지 못한 김삿갓 방랑벽

2021.11.12 11:34:02

평창강 따라 걷기 7-2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김삿갓의 이름은 김병연(金炳淵, 1807~1863)으로 호는 난고(蘭皐)다. 김립(笠) 또는 김삿갓은 방랑할 때 쓴 이름이다. 그는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났는데, 평안도 선천의 부사였던 할아버지 김익순이 홍경래의 난 때에 투항한 죄로 집안이 멸족을 당하였는데 사내종의 도움으로 형 김병하와 함께 황해도 곡산으로 피신하였다. 뒷날 멸족에서 폐족으로 사면되어 형제는 어머니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나 아버지 김안근은 홧병으로 죽었다. 어머니는 자식들이 폐족자로 멸시받는 것이 싫어서 강원도 영월로 들어가 숨어 살았다.

 

이 사실을 모르는 김병연은 20살에 혼인하고 그 해 영월 동헌에서 실시한 백일장에서 그의 할아버지 김익순을 조롱하는 시제로 장원을 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내력을 어머니에게서 듣고 충격을 받는다. 그는 22살 때 아들 학균을 낳고 24살 때에 둘째 아들 익균을 낳았지만, 조상을 욕되게 한 죄인이라는 자책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어느 날 그는 처자식을 남겨둔 채 가출한다. 그는 푸른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는 뜻으로 삿갓을 쓰고 죽장을 짚고 무작정 길을 떠났다.

 

 

그는 금강산 유람을 시작으로 곳곳에 있는 서당을 주로 순방하고, 4년 뒤에 일단 귀향하여 1년 남짓 머물렀다. 그러나 죄책감과 방랑벽은 어찌할 수 없었나 보다. 그는 또다시 고향을 떠나서 서울, 충청도, 경상도로 돌았다. 도산서원 아랫마을 서당에서 몇 해 동안 훈장을 하였다. 다시 전라도, 충청도, 평안도를 거쳐 어릴 때 자라던 곡산에서 1년쯤 훈장을 했다.

 

그는 매정한 아버지였다. 그를 찾아온 아들을 세 번이나 피하였다. 충청도 계룡산으로 찾아온 아들 익균을 만나자, 재워놓고 도망하였다. 1년 만에 또 찾아온 아들과 경상도 어느 산촌에서 만났으나, 이번에는 심부름을 보내놓고 도망쳤다. 3년 뒤 경상도 진주에서 또다시 아들을 만났다. 그는 귀향을 마음먹었다가 또 변심하여 이번에는 용변을 핑계로 도피하였다. 어머니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자는 아들의 눈물겨운 호소도 그의 가슴에서 이글거리는 심화(心火)를 끌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김삿갓이 전라도 지역을 유랑하다가 동복(지금의 전남 화순군 동복면) 땅에 쓰러졌는데, 어느 선비가 나귀에 태워 자기 집으로 데려가 그는 그곳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다. 그 뒤 그는 지리산을 두루 살펴보고 동복으로 돌아와서 6년을 머물렀다. 1863년(철종 14년) 그는 병이 들어 57살의 나이로 한 많은 생애를 동복 땅에서 마쳤다. 죽고 나서 3년 동안 가묘 상태로 있다가 뒤에 아들 익균이 유해를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으로 옮겨 소백산 기슭에 묻었다.

 

김삿갓이 죽은 지 150년이 지난 2003년에 영월군은 하동면에 문학관을 세우고 해마다 김삿갓 문화제를 열어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심지어 하동면 이름도 아예 김삿갓면으로 바꾸었다. 그런데 평창문화원에서 2015년에 펴낸 《평창군 지명지》 175~176쪽에 김삿갓에 관련되어 아래와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김삿갓의 아들 둘째 아들 김익균의 묘는 평창읍 천동리 중도마치 양지 편에 농로에서 약 5분간 산골짜기 비탈을 올라가면 있다. 김익균이 당시 샘골 마을의 연못 밑에 움막을 지어 서당을 열고 마을 소년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살았다. 김익균은 어느날 아버지의 객사 소식을 뒤늦게 듣고 동복으로 가서 아버지의 묘를 찾아 시신을 천동리로 옮겼는데, 한 달이나 걸렸다고 전한다. 김익균은 천동리에 아버지를 묻었다. 그 후 김익균은 어느 날 이웃마을 마지리에 가서 술을 먹고 밤늦게 집으로 오던 중 천동리 앞강의 섶다리를 건너다 떨어져 죽었다. 마을 주민들은 시신을 거두어 지금의 중도마치 묘 자리에 묻었다. 그런데 김익균의 묘 위쪽 약 10m 지점에 같은 형태의 묘가 있는데, 이 묘가 김익균의 아버지 김삿갓의 묘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천동리 주민들 중에는 이 묘가 감삿갓의 묘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여기서 나는 매우 신중해야 한다. 김삿갓의 무덤이 영월이 아니고 평창에 있다고 주장하면 엄청난 혼란이 일어날 것이다. 《평창군 지명지》에서도 단정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추측하고 있다”라고 표현하였다. 나는 김삿갓의 무덤 위치에 대해서 다른 주장이 있다는 것을 소개하는 정도로 그치고자 한다.

 

김삿갓은 함경도를 방랑하다가 함흥에서 가련(可憐)이라는 기생을 만난다. 그는 ‘가련기시(可憐妓詩)’라는 시 한 수로 가련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可憐行色可憐身 가련행색가련신

可憐門前訪可憐 가련문전방가련

可憐此意傳可憐 가련차의전가련

可憐能知可憐心 가련능지가련심

 

​가련한 행색의 가련한 몸이

가련의 문 앞에 가련을 찾아왔네.

가련한 이 내 뜻을 가련에게 전하면

가련도 능히 가련한 이 마음 알아주겠지.

 

멋진 연애시이다. 각 연에 가련이라는 단어가 2번씩 들어간다. 이러한 시를 받고서 마음의 문을 열지 않을 여인은 없을 것이다. 마음의 문이 열리면 이어서 몸의 문도 열리는 법. 그런데 가련이라는 여인 역시 김삿갓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나 보다. 길 위에서 떠돌던 김삿갓은 방랑을 멈추고 함흥에서 가련과 함께 3년 동안 꿈같은 시간을 보낸다.

 

그렇지만 세월은 무상하기만 하다. 꿈같은 3년이 지나면서 김삿갓의 방랑벽은 가련의 사랑으로도 막을 수가 없었나 보다. 김삿갓은 한 계절 돌고 오겠다며, 붙잡는 가련의 손을 뿌리치고 시 한 수를 남기고는 방랑의 길을 떠난다.

 

김삿갓이 다시 함흥으로 돌아왔을 때 가련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가련은 김삿갓을 기다리다가 상사병이 나서 그만 세상을 하직하였다. 김삿갓은 가련의 무덤을 찾아가 가련의 넋을 위로하며 시 한 수를 남기었다.

 

필자가 안내하여 2019년 5월에 이곳의 김삿갓 시비를 방문한 적이 있는 양승국 변호사는 김삿갓과 가련의 이야기를 조사하여 글로 썼다. 아래 주소로 들어가면 김삿갓이 남긴 시와 함께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읽어볼 수 있다.

양승국 변호사의 ‘김병연(김삿갓)무덤’ 읽기 ▶

 

작곡가이자 가수인 (고)신중현은 가련의 이야기를 듣고서 마음이 움직였나보다. 신중현은 1997년에 ‘가련기시(可憐妓詩)’라는 노래를 만들었다. 아래 주소로 들어가면 신중현의 목소리로 가련기시 노래를 들을 수가 있다.

신중현의 노래 ‘가련기시(可憐妓詩)’ 듣기 

 

2020년에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김삿갓의 후손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https://blog.daum.net/heegryu/321

 

김익균은 원래 김병연의 둘째 아들인데 첫째 아들 학균은 김병연의 형 병호에게 양자 들고 익균이 김병연의 대를 잇는다. 다음 항렬에서도 익균의 둘째 아들 영진이 대를 잇는다. 영진은 16살에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고성 건봉사에 입적하여 4년 수도 후 서울 근교 절로 옮겨갔다. 궁중 나인이 어느 날 영진이 김삿갓의 후손이란 것을 알고 고종황제에게 알현시킨다. 김삿갓 이야기를 좋아하던 고종은 그를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대역죄인이란 족쇄를 풀어 해금시켜주고 곧바로 궁내부 주사로 임명한다.

 

김삿갓은 65년 만에 손자 덕분에 대역죄인의 족쇄로부터 풀려났으나 그가 이 사실을 알까 모를까? 세월이 흐르고 또 흘렀다. 이제는 김삿갓과 가련은 물론 고종도 다 저세상 사람이 되었다.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필자가 평창강가 김삿갓의 시비 앞에서 김삿갓을 생각하고 있다. 김삿갓은 필자를 알까 모를까? 김삿갓은 유교라는 굴레에 얽매여 있던 조선 말기에 살면서 양반들의 위선을 비웃었다. 그는 신분을 차별하고 허례허식으로 사람을 옥죄는 유교 문화에 반발하였다. 그는 가정이라는 틀에서도 탈출한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계속)

 

 

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muusim2222@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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