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에서 나온 사리장엄구

2023.01.08 11:2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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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1965년 11월, 기우뚱 기울어져 무너질 위험에 처한 오층석탑의 수리가 시작되었습니다. 석탑을 완전히 해체하여 수리하는 과정에서 탑 안에 모셔진 사리장엄구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바로 지금부터 살펴볼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입니다.

 

 

‘사리’를 담는 용기, 사리장엄구

 

‘사리(舍利)’는 인도에서 몸이나 뼈, 유골 등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사리라(śarīra)’라는 말이 중국으로 전해질 때 소리 나는 대로 한자로 옮겨 적으면서 생긴 단어입니다. 처음에는 석가모니의 주검을 화장하고 남은 유골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점차 개념이 넓어져 고승의 유골이나 석가모니의 말씀까지도 포괄하게 되었습니다.

 

인도에서 불교를 처음 세운 석가모니가 돌아가신 뒤 그의 주검을 화장하고 나온 사리를 안치하려고 만든 건축물이 바로 ‘탑’의 시작입니다. 또한 성스러운 사리를 탑 안에 안치하기 위해 아름답게 장식해서 만든 용기가 바로 ‘사리장엄구’입니다. 넓은 의미에서는 사리를 직접 담는 사리기뿐 아니라 사리를 공양하는 의식과 관련된 물건, 그리고 사리에 바치는 각종 공양품 등 많은 것을 포괄하는 말입니다.

 

왕궁에서 절로, 익산 왕궁리 유적 이야기

 

왕궁리 오층석탑이 있는 익산은 백제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입니다. 백제의 역사는 수도 이전에 따라 한성도읍기(현재의 서울, 기원전 18~475), 웅진도읍기(현재의 공주, 475~538), 사비도읍기(현재의 부여, 538~660)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 사비기 무왕(재위 600~641) 때, 익산에는 당시 수도였던 부여에 버금가는 중요한 국가 시설들이 만들어졌습니다. 왕궁리 유적, 제석사터, 미륵사터, 쌍릉, 익산 토성(오금산성) 등이 그러한 예입니다. 이를 둘러싸고 무왕대에 부여에서 익산으로 도읍을 옮겼다거나, 이곳을 별도의 도읍[別都]으로 삼았다거나, 도읍을 옮기고자 했지만 이뤄지지 못했다는 둥 여러 논란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왕궁리 유적은 7세기 전반 백제 왕궁이 운영된 곳으로, 대형 전각을 포함한 33개 건물과 물건을 만드는 공방, 수세식 화장실, 정원과 후원 시설 등이 발굴되었습니다. 이 유적 동쪽에는 무왕이 조성했다는 제석사터가, 서북쪽에는 백제 최대 규모의 절인 미륵사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왕궁이 있던 이곳은 백제 말부터 통일신라 사이 어느 시점에 불교 절로 바뀝니다. 그리고 왕궁 시설이 있던 자리에 금당과 강당, 탑과 같은 사원 시설이 들어서게 됩니다.

 

계속되는 논의,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

 

이제 왕궁리 오층석탑에서 나온 사리장엄구를 살펴보겠습니다. 왕궁리 오층석탑 1층 지붕돌에 뚫린 두 개의 사리 구멍과 탑을 받치는 기단 안쪽 심초석에 뚫린 세 개의 사리 구멍에서 다양한 종류의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사리장엄구가 만들어진 연대에 대해서는 발견된 지 50년이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다양한 견해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처음 발견되었을 때는 기단에서 나온 금동여래입상이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 양식을 띠는 점을 근거로 석탑과 사리장엄구 모두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이후 칠곡 송림사 오층전탑이나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 사리장엄구 같은 통일신라시대 사리장엄구와 견줌으로써 8세기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 뒤로도 1층 지붕돌에서 나온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의 구성이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 기록된 639년 제석사가 불탔을 때 수습된 제석사터 목탑 사리장엄구에 대한 설명과 비슷하다는 점이나, 금제 사리함(안쪽 상자)의 무늬가 백제 금속공예품과 유사하다는 점 등을 근거로 사리장엄구가 백제 무왕대에 제작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2009년 미륵사지 석탑 수리 공사 중 탑에 사리장엄구를 봉안한 주체(무왕의 왕후)와 연대(639년)를 알려주는 「사리봉영기」가 발견되면서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 역시 다시 주목받습니다. 이후 미륵사지 석탑 사리기와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기의 견줌을 통해 두 사리기의 무늬와 제작 기법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도 백제 말에 제작된 것이라는 견해가 더 힘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백제의 전통이 강하게 남은 후대의 것이라는 견해도 여전히 제기됩니다.

 

아직도 언제, 누구에 의해 왕궁리의 왕궁이 사원으로 바뀌었는지, 언제 왕궁리 오층석탑과 사리장엄구가 만들어졌는지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습니다. 이는 남겨진 기록과 유물, 그리고 유적이 주는 정보에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왕궁리 유적 발굴이 진행되고 미륵사지 석탑에서 새로운 사리장엄구가 확인되면서 유적과 유물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졌듯이, 앞으로 있을 새로운 발견을 통해 지금은 드러나지 않은 많은 사실이 밝혀지리라 생각합니다.

 

                                                                                           국립중앙박물관(선유이) 제공

 

 

김영조 기자 pine996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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