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을 쓰기에는 가슴이 너무 뜨겁다

  • 등록 2025.07.13 11: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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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뭐꼬의 장편소설 <꿈속에서 미녀와> 22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그날도 K 교수는 아내와 2시간 뒤에 할인점 입구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K 교수는 2층에 있는 책방에 들렸다. 신간코너에 가서 이책 저책 들여다보기도 하고, 여행에 관한 책과 베스트셀러 진열대를 둘러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수필 코너에 가보니 앗, 《진하게 블랙으로》라는 책이 눈에 띄지 않는가!

 

단 한 권 남은 책을 꺼내어 보니 출판년도가 1991년으로 찍혀져 있었다. 아마도 절판되기 전 마지막 한 권이 몇 년 동안 K 교수를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표지를 넘기다 보니 미스 K의 젊었을 때 사진이 전면에 나타났다. 눈이 아주 총명해 보이고 전체적으로 둥글둥글하게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K 교수는 흥분된 가슴을 진정시키고 책을 샀다. 나온 지 7년이 지난 1998년에 책의 정가는 3,800원이었다.

 

소설은 6개 장으로 구성되었는데, 장의 제목이 평범하지 않고 특이했다.

 

제1장 조금 슬프게

제2장 조금 부드럽게

제3장 조금 화려하게

제4장 더 세게

제5장 조금 가볍게

제6장 다시 처음부터

 

추상적인 장 제목을 읽으면서 K 교수는 불경스럽게도 선정적인 내용을 연상하였다. 집에 들어온 K 교수는 밤새워 책을 통독하였다. 쪽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이야기의 전개가 재미있었다. 남녀관계가 얽혀 있는 흔한 주제의 통속 소설 같았지만, 상당히 구성이 탄탄하고 지루하지 않은 소설이었다.

 

책 제목인 《진하게 블랙으로》는 커피를 나타내는 말이 아닌가 추측했었는데, 역시 맞았다. 본문 가운데 ‘진하게 블랙으로’라는 표현이 여러 번 나왔다. 남녀관계 장면 묘사도 상당히 노골적이었다. 전체적으로 이야기의 전개가 빠르고 흥미로운 소설이었다. 그런데 소설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은 누구일까? 저자 본인을 주인공으로 설정한 것 같기도 한데, 확실한 것은 알 수가 없다.

 

천우신조로 K 교수가 소설책을 구했던 일요일이 지나고, 화요일에 K 교수는 야간수업이 끝난 후 미녀식당으로 향했다. 그날 밤에는 마침 식당 안에 다른 손님이 없었다. K 교수는 녹차를 주문하면서 같이 마시자고 제안했다. 파스타 밸리에서 단둘이 차를 마시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미스 K가 차를 두 잔 가져와서 스스럼없이 마주 보며 앉았다. K 교수는 가방에서 책을 꺼내었다. K 교수는 사장님이라는 상업적인 호칭 대신에 처음으로 이름을 불렀다.

 

“오늘은 제가 은경 씨에게 작은 선물을 하나 가져왔습니다.”

“뭔데요?”

“아주 좋아하실 거예요.”

K 교수는 책을 내밀었다. 미스 K는 책을 받더니 갑자기 눈빛이 달라지고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니, 이걸 어디서 구했어요?”

“책방을 뒤져 샀지요.”

“아니, 이게 절판되었는데. 모두 남 주고 막상 저도 가지고 있지 않는데, 어떻게 구했어요?”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습니다.”

 

미스 K는 표지를 넘겼다. 첫 번째 간지에 여자 사진이 있었다. 거기에는 책을 출판하던 해, 그러니까 7년 전(37살)의 자기 사진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감회어린 듯 한참이나 자기 사진을 쳐다보았다. 두 번째 간지에는 K 교수가 사인펜으로 두 줄로 쓴 글씨가 있었다. 저자에게/독자 드림. 맞는 말이다. 이 책은 독자가 사서 저자에게 선물하는 책이다. 그녀가 말했다.

“정말 고마운 선물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surprise에요. K 교수님! 정말 고마워요!”

“뭘요. 은경 씨가 그렇게 기뻐하니 저도 기쁩니다.”

 

자연스럽게 책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미스 K는 한 때 잡지사의 인터뷰 기자로 1년 정도 일한 적이 있다고 한다. 미스 K가 ‘마리안느’라는 여성 잡지에 썼던 연재 소설을 모아 책으로 출판한 것이라고 한다. 소설 속의 여주인공은 자기가 아니고 자기가 꽃꽂이를 배우러 다닐 때 만난 어떤 여자의 이야기에 살을 붙여서 창작한 것이라고 한다. 상당히 야한 남녀관계 표현이 있더라고 슬쩍 공격하니, “그 정도로 뭘 그래요”라고 자연스럽게 받아넘긴다.

 

 

K 교수가 수필은 안 쓰냐고 물어보니 “수필을 쓰기에는 가슴이 너무 뜨겁다”라고 의미심장한 대답을 한다. 그리고 자기는 두 번째 소설을 쓰고 싶다고도 말했다. 가슴이 뜨거운 사람은 소설을 써야 제격인가 보다. 구하기 어려운 책을 선물하여 분위기가 좋아졌다. K 교수는 목요일 날 S대 축제에 구경 한 번 가자고 다시 제안했다. 미스 K는 “좋아요!”라고 선뜻 승낙했다.

 

필자 주: 이 연재소설을 쓰기 위하여 나는 1998년에 읽었던 그 소설책을 다시 읽어 보려고, 2015년 4월에 국립중앙도서관을 찾아갔다. 서울의 서초경찰서 옆에 있는 국립중앙도서관에 그 책이 한 권 소장되어 있었다. 열람증을 만들어서 책을 신청했더니 외부로 대출은 안 되고 도서관 내부에서만 볼 수 있었다. 나는 책 표지를 사진 찍어 보관하고 있다. 증거로 제시한다.

 

(계속)

 

 

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muusim2222@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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