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지운영의 김옥균 암살 미수 사건이 불거져 세상이 한바탕 떠들썩했다. 1886년 7월 13일 김옥균은 내무대신 야마가타 아리모토로부터 통지문을 받는다. 15일 안으로 일본 영토를 떠나라. 추방명령이었다. 당시 김옥균은 치외법권 지역인 요코하마 프랑스 조계에 묵고 있었다. 그곳의 외교관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구명운동을 꾀할 생각이었다. 일본 경찰은 그를 일본인이 운영하는 미쓰이 여관으로 퇴거시킨다. 연금조치다. 김옥균은 미국행을 서둔다. 여비마련을 위해 애쓰나 뜻대로 되지 않는다. 2주일만 더 연기해 줄 것을 외무성에 요청한다.
김옥균은 일본 측에 “다음번 미국 우편선의 출범일”에 출국하겠노라고 통보한다. 막상 그가 미국으로 떠날 움직임을 보이자, 일본정부가 방침을 돌연 바꾼다. 오가사와라 고도로 추방하겠다는 것이다. 유배를 보낸다는 게 아닌가. 분기탱천한 김옥균은 항의함과 동시에 외국 공사들에게 이런 요지의 편지를 보낸다.

“원래 본인은 15일 이내로 일본 영토를 떠나라는 추방명령을 받고 미국행을 준비중이었지만, 여비를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 그런데 일본 정부는 갑자기 오가사와라로 추방하겠다는 뜻을 공공연히 통보했습니다.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오가사와로 유배시킨다는 것은 일본 영토 안에 본인을 그대로 두는 것입니다. 이에 본인은 다음번 미국행 여객선에 탑승해서 떠나겠다고 부탁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제가 일본의 법률을 위반한 사실이 없음에도 마치 죄인처럼 오가사와라로 보낸다면 이는 일본 정부가 강제한 것임을 알아주시기를 바랍니다. … 이른바 문명국이라고 하는 일본 정부가 이러한 조처를 한다는 것은 비단 본인에게만 놀라운 일이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의외의 일이라 믿습니다. ”
이렇게 절박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한 청년이 불쑥 찾아온다. 자신을 스나가 하지메(1868~1942)라고 소개한 이 청년은 신문보도를 보고 왔노라고 한다. 얼굴엔 분노의 기색이 역력하다. 김옥균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 청년은 김옥균을 깊이 존경하게 된다. 스나가는 지방에서 대대로 정미소를 경영하는 부유한 집안의 아들이었다. 게이오의숙(게이오대학의 전신)에 입학하려고 도쿄에 와 있었다. 그는 김옥균의 숙소를 나온 뒤 황급히 일을 벌인다. 미키를 비롯한 세 명의 친구와 손을 잡고 모금운동을 벌여 경비를 마련한다. 그런 다음 격문을 작성하여 널리 배포한다. 격문의 제목이다.
訴天下之仁人志士(천하의 어진 이와 지사들에게 호소하노라)
일본 정부가 김옥균에 대해 취하고 있는 무도한 조처를 규탄하고 구명을 호소하는 내용이다. 놀란 경찰은 허둥지둥 격문을 수거한다. 스나가는 불온 출판물 작성, 배포 혐의로 체포된다.
그 뒤 스나가와 김옥균과의 관계는 어떤 드라마를 연출했을까? 현재 김옥균에 관해 전해 오는 가장 많은 자료는 아마도 스나가가 이 땅에 남기고 간 것일지도 모른다. 그 전시회가 몇 년 전에 일본의 한 마을에서 열린 바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 다음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