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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길옆에 숨어있다가 애들 오는 소리 나면 앞으로 나와서 놀래키는 거에요.”
“알았어요. 근데 눈이 안 보여. 봉투 돌려서 구멍 좀 뚫어봐요.”
담력훈련을 위해 폐가로 가던 길에 이정표로 서 있던 프란체스카 선생님이 아이들을 좀 더 재밌게 해주려고 얼굴에 까만 비닐봉투를 뒤집어썼다. 일곱 시 반밖에 안 되었지만 시골길은 벌써 컴컴하다. 게다가 갑작스런 소나기까지 퍼붓기 시작하자 나는 서서히 무서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정말 담력 훈련하기에 제대로인 날씨인걸…. 그때 저 아래에서 수군거리는 애들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선생님과 나는 허둥지둥 자리를 찾아 숨었는데….
“에이, 시시해. 그게 뭐에요?”
아이들의 반응은 뜻밖에 냉담했다. 이 한 몸 희생하여 애들에게 즐거움을 주겠다던 선생님의 계획은 ‘나대지 말고 가만 계시라’는 애들의 호기 어린 합창에 순식간에 무너졌다. 비가 좀처럼 그치지 않는 관계로 우리는 2박3일 캠프의 마지막 밤을 폐가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숙소로 돌아갔다. 캠프파이어의 추억은 못 만들었지만 폐가 앞에서 찍은 사진 한 장으로도 이 사랑스런 아이들과의 마지막 추억은 영원할 것 같다.
공부방 봉사활동을 시작한 것은 몇 달 전이었다. 처음 만난 아이들은 낯도 가리지 않고 선생님 선생님 연발하며 코알라처럼 달라붙었다. 구구단 외우기 싫다며 도망 다니던 이 학년 남자애를 잡아 앉혀 온갖 방법으로 구슬렸을 땐 육아의 달인이나 된 양 으쓱해지고, 연필꽂이를 만들던 찰흙을 던져 여자애들을 울린 4학년 장난꾸러기를 혼내느라 속상해하며 아이들과 추억을 만들어가던 중, 나는 뜻밖의 반전을 맞게 되었다. 바로 ‘방을 빼달라’는 건물주 할머니의 요청이었다.
시세보다 약간 저렴한 보증금의 전세를 올려서 월세로 받겠다는 할머니의 요청….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리 우리 조심을 시킨다고 해도 애들은 애들. 쿵쾅대며 뛰는 소리와 솔솔 올라오는 음식냄새를 참아줄 너그러운 건물주들은 사실 많지 않을 테니 말이다. 원장수녀님은 이곳저곳 괜찮은 주변의 자리를 알아보느라 동분서주하셨지만, 공부방을 하기에 마땅한 곳은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다른 동네로 이사를 하기로 했고, 버스를 타고 이사 간 곳까지 다닐 수 없는 거의 모든 아이들은 전세기간이 만료되는 8월 말까지만 공부방을 나오게 된다. 어제 수도권 전세금이 집값의 반에 육박한다는 뉴스를 보았는데, 아직 집 장만이 요원한 내 형편에 대한 고민보다도, 공부방 아이들 생각이 앞섰다. 그리고 홈페이지에 올리신 한 엄마의 고마움과 아쉬움이 함께 묻어나는 게시판 글도 떠올랐다. “아이와 엄마가 함께 자랄 수 있게 돌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서도 건강 조심하시고 어둠속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기 바랍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민감하다. 어두워진 어른들의 표정 때문인지 그간의 사정을 알아차린 눈치 빠른 열 살짜리 동갑내기 여자애 둘은 말다툼을 벌였다. 주인집에서 방을 빼라고 해서래. 아냐. 우리보다 더 어려운 곳에 가서 도와주려고 하는 가랬어…. 왠지 씁쓸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둘 다 맞는 얘기다. 앞으로 가게 될 새 동네의 공부방은 지금 있는 이곳보다 훨씬 열악한 환경이고, 주인집에서 방을 빼달라고 해서 나가게 된 것도 맞다. 새롭게 가게 될 곳에서도 우린 새로운 아이들과 함께 좋은 추억을 만들어갈 것이다. 이곳의 아이들과 보낸 만큼이나 소중한 추억을. 신께서 이 아이들에게 주셨던 몇 년간의 축복을, 다른 곳의 아이들에게도 나눠주시고자 하시는 일이다…. 그렇게 밝게, 긍정적으로 마음을 먹어봤지만 그래도 가슴 한구석이 무거운 것은 어쩔 수 없다.
아이들의 행복의 본질이 이기적인 어른들의 경제, 정치논리에 휘둘리는 것만 같아서다. 구석에 놓인 서울시 무상급식 찬반투표용지를 보고 있으려니 더 씁쓸해진다. 아이들을 위한 정책 하나조차도, 아이들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논리를 우선시하는 어른들의 이기심에 휘둘려야만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캠프 마지막 날, 서울에 도착해 아이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나서야, 선생님들의 걱정은 한시름 놓이게 됐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손전화 속에 저장된 소중한 아이들의 사진을 바라보며, 나는 왠지 가슴 밑바닥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마지막 날이 삼일 앞으로 다가왔다. 부디…. 마지막 날 울지 않고, 웃으면서 아이들과 헤어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새로운 환경에서 다시 고군분투하실 수녀님과 선생님들에게도 기운을 북돋아드리고 싶다.
독자 이희정 / 방송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