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영재어린이 송유근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송유근의 아버지를 말하는 자막이 “송유근의 不”로 쓰인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냥 ‘송유근의 아버지’하면 될 것을 잘난 채 하는 사람이 ‘父’로 쓴다는 것이 잘못된 모양입니다.
한글학회 창립기념식에서 특별발표를 한 이강로 선생은 “특권을 뺏기기 싫다는 생각밖에 없었던 기득권층들이 밥 푸는 ‘주걱’을 ‘周巪(두루 ‘주’, 사람이름 ‘걱’)‘ ’치마‘를 ’赤亇(붉을 ‘적’, 망치 ‘마’)란 어처구니없는 한자까지 만들어 쓰기도 했다.”며, 한자를 숭상하는 사람들의 잘못을 나무랍니다. “빚을 갚다‘하면 좋을 것을 ”辨濟하다“라고 쓰는 사람들의 의도가 무엇일까요? 꼭 필요한 데에 쓰는 한자야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말로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는 것을 굳이 한자말로, 또 한자로 쓰는 것은 문화사대주의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