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때 육전 최고의 장수 권율

2013.06.02 07:11:53

[고향문화통신 9]

[그린경제=이윤옥 문화전문기자]  ‘전 도원수 권율(權慄)이 졸하였다. 율은 임진년 변란을 당하여 몸을 던져 싸움터에 달려가 전투 때마다 견고한 성을 함락시켰었다. 그 이치(梨峙)의 승리와 행주(幸州)의 대첩(大捷)은 비록 옛날 명장(名將)이라 하더라도 어찌 그보다 더하겠는가. 국가가 중흥(中興)의 업을 이룬 것은 실로 이에 힘입은 것이니, 위대하다고 할 수 있다.’ 

위는 《선조수정실록 33권》(1599) 7월 1일 치 기록으로 선조 때 권율 장군 이름은 하루가 멀다 하고 그 이름이 나온다. 그만큼 임진왜란은 조선에 있어 위급한 전쟁이었고 그 한가운데 권율 (1537~1599)이 있었던 것이다. 행주대첩 하면 떠오르는 권율장군은 비교적 늦은 나이에 관직에 나왔다.  

   
▲ 양주시 장흥 석현리에 있는 권율 무덤, 좌우로 부인과 함께 묻힌 권율

권율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년 전인 1582년(선조 15)에 45살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했다. 당시의 평균 수명과 보통 30살 전후에 문과에 급제하는 추세에 견주면 매우 늦은 출발이었다. 그는 승문원 정자(正字, 정9품)로 관직을 시작해 전라도 도사(都事, 정5품)·경성판관(종5품) 등의 관직을 거쳤다. 그러나 급제한 나이로 볼 때 화려한 경력은 아니었다. 

권율은 당시 나이로 노년기인 55살 때 임진왜란을 만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로서 전라도순찰사 이광(李洸), 방어사 곽영(郭嶸)과 함께 서울을 회복하기 위해 북진했다. 용인에서 일본군과 마주치자 권율은 우선 임진나루를 확보할 것을 건의했으나 묵살되었고, 결국 일본군의 매복에 걸려 패전했다.  

이후 광주에 되돌아갔다가 전라좌도 도절제사로 임명되어 금산군 이치(梨峙)에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의 정예부대를 크게 이기고 호남을 지켰다. 이 공으로 전라도순찰사로 승진했다. 이해 12월 병마절도사 선거이(宣居怡)를 부사령관으로 삼아 1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로 진격하다가 수원 독왕산성(禿旺山城)에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고 일본군의 보급로를 끊었다. 

   
▲ 행주대첩비

이 소식을 들은 왜장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가 대군을 보내 성을 공격했으나, 수비를 굳게 하면서 유격전술로 맞서 이를 격퇴했다. 이 전투로 일본군은 서울에 고립되었다. 1593년(선조 26) 2월 선거이에게 5,000명의 병력을 나눠주어 시흥 금주산(衿州山)에 진을 쳐 도성의 왜적을 견제하게 하고, 자신은 관군 2,300명과 처영(處英)의 승병 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에 주둔했다.  

이때 왜장 우키다가 지휘하는 3만의 적군이 7대로 나뉘어 맹렬히 공격했으나, 관민이 일체가 되어 싸워 적을 격퇴하고 크게 이겼다. 그뒤 파주산성으로 옮겨 주둔했다가, 명과 일본 사이에 강화회담이 진행되면서 휴전상태가 되자 전라도로 돌아갔다. 그해 6월 행주에서의 전공으로 도원수(都元帥)에 올랐으나, 도체찰사(都體察使) 및 순찰어사(巡察御使)와의 불화로 말미암아 도망병을 즉결처단한 일이 빌미가 되어 1596년 해직되었다. 그러나 바로 한성부판윤으로 기용되어 비변사당상을 겸직하고, 충청도순찰사를 거쳐 다시 도원수가 되었다. 

정유재란 때는 후퇴를 거듭하다가 이순신이 적의 해군을 저지한 틈을 타서 명나라 제독 마귀(麻貴)와 함께 울산까지 남하하여 적과 맞섰으나, 사령관 양호(楊鎬)의 갑작스러운 퇴각령으로 철수했다. 이어 순천 예교(曳橋)에 주둔한 왜병을 공격하려 했으나, 충돌을 꺼리던 명나라 장수들의 방해로 실패했다. 전쟁이 끝난 뒤인 1599년(선조 32) 노환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 그해 7월에 숨을 거두었다.  

   
▲ 행주대첩비 뒷면 부조

고양시에 있는 행주서원(杏州書院)은 행주대첩을 이룬 명장 충장공(忠莊公) 권율 도원수의 전공을 기리고 호국충절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행주산성 서쪽 200m지점 한강변에 있다. 왕이 고양 서삼릉에 거동할 때마다 임진왜란 당시 공적이 높은 권율장군의 제향을 지낼 건물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헌종 7년(1841)에 왕명에 의해 건립이 추진되고 이듬해인 헌종 8년(1842) 4월 29일에 완공되면서 바로 사액되었다. 

사액명은 기공사(紀功祠)로 본래 사우(祠宇)로서 건립되었으나 이후에 후학들을 가르치는 서원 기능이 더해졌다. 1845년 5월에는 권율장군의 후손과 여러 일가들이 영의정 조인영에게 요청하여 헌종 11년(1845) 8월 기공사 경내에 행주대첩비(중건비)를 건립하게 되었다.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행주산성 꼭대기에는 드높은 대첩비가 세워져 있는데 굽이치는 한강을 바라다 보며 행주산성 일대를 둘러 보면 어디선가 그날의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 

*경기도 향토문화재 제71호
*주소: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외동 162-

 

 

 

 

 

 

 

 

 

 

 

 

 

 

 

  ▲ 권율 영정

 

 

** 이윤옥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의 도시 고양"에 둥지를 튼 지도 어언 17년째이다. 문화행위가 점점 껍데기와 이벤트성으로 흘러가는 시대일수록 자신이 살고 있는 고장에 대한 깊이있는 성찰과 역사공부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를 제대로 알려주는 사람은 없다. 글쓴이는 2006년에 편찬된 고양시사7권에 집필위원으로 참여 한바 있다. 그때 속속들이 소개하고 싶은 고양문화와 역사이야기를 따로 뽑아 두었는데 이제 그 이야기보따리를 얼레빗 신문을 통해 풀어내고자 한다.

이윤옥 기자 59yo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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