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종가의 철학을 찾아서 7] 흉년에 곳간을 모두 연 선교장

2013.07.24 07:37:16

소작인들, 자신들의 이름을 적은 우산 ‘만인솔’ 만들어줘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통천댁이라 불렸다는 강릉 선교장을 찾아가는 날은 비가 매섭게도 내렸다. 언론은 이런 비를 ‘호우’라 부르지만 우리 겨레는 ‘무더기비’나 ‘억수’, ‘채찍비’로 불렀다. 이런 비속에서 사진은 제대로 찍을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지만 그래도 선교장 이강백 관장과 어렵사리 잡은 약속을 깰 수는 없었다. 다행히 강릉 고속버스터미널에 내리자 비도 잦아들었다. 선교장의 이웃사랑을 많은 이에게 알리라는 하늘의 도움일까? 

   
▲ 아름다운 선교장 전경

터미널에서 택시로 5분 거리라지만 10분은 족히 될 것 같다. 아니 빨리 우리나라 최고의 정원 속에 청청하게 자리 잡은 선교장을 빨리 만나고픈 마음이 조바심을 낸 것일 게다.  

선교장은 효령대군 11세손으로 가선대부를 지낸 이내번(李乃蕃·1703~1781)이 처음 이곳에 터를 잡은 이래 300년을 이어온 집이다. 기자를 기다리고 있던 이강백 관장은 인상이 우선 선하고 소박하다. 차분하고 기품이 있는 생활한복 차림에 말투도 가식이 없다는 느낌을 준다.
 

이웃사랑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통천댁” 

“먼저 이웃사랑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통천댁 이야기를 해주시죠.” 

나는 대뜸 본론으로 방향을 틀었다. 사실 통천댁 이야기만 들어도 “나눔의 철학”이 고갱이인 종가 취재의 중요한 부분은 다 짚을 수 있지 않은가? 또 그것은 내가 늦게 도착한 탓에 관장의 다음 약속 시간 때문에 대담에 지장을 받을 수도 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것은 우리 종가가 대단한 철학을 가졌다기보다 이웃과 함께 살아야 나도 행복할 수 있다는 지극히 원론적인 얘기로 답할 수 있습니다. 관동지방은 호남지방에 견주면 땅이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산이 많은 지역적 특성상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흩어져 있는 땅에 농사를 지으려면 농민들의 도움이 절대적이고, 또 그들을 믿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농민들이 굶어서야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극심한 흉년이 들면 곳간을 모두 열어야 하고 그래야 함께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 선교장을 지키고 있는 이강백 관장

물론 지극히 옳은 이야기다. 그러나 대다수의 부자들은 그런 철학을 외면할뿐더러 남을 짓밟더라도 나만, 내 집안만 더 부자가 되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것이 일반적인 사회상인 것을 어쩌랴? 선교장을 일으키고 이웃사랑을 크게 실천했던 분들의 아름다움이 현재 선교장 관장에게 그대로 흐르고 있음이다. 

선교장에 대한 또 다른 이름 ‘통천댁’이 된 것은 19세기 초~중엽 선교장 주인이었던 이봉구(李鳳九·1802~1868) 선생이 강원도 통천군수를 지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순히 통천군수를 지냈다는 까닭만으로 통천댁으로 불린 것은 아니다. 관동지방에 극심한 흉년이 들었을 때 선교장 쌀 곳간에 저장돼있던 곡식을 모두 풀어 지방민들을 살렸다. 그랬기에 관동 사람들은 그 적선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선교장을 통천댁으로 바꿔 불렀다는 것이다.  

매년 수만 섬의 소출이 있던 이 집의 쌀 창고는 선교장 안과 고성의 북창, 삼척의 남창과 등 모두 6군데였다. 통천 군수가 관동지방 흉년에 내놓은 쌀의 양은 아마도 5,000섬 가까이 될 것이란 추측이다. 7~8의 식구가 한 해 동안 먹는 쌀의 양이 평균 5가마였음을 감안하면 대단한 양이었다.  

통천댁은 평소에도 농민들을 후하게 대했다. 뿐만 아니라 지역을 책임진 집사들이 횡포를 부리지 않도록 철저히 지켜보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고 한다. 사실 주인이 아무리 잘해도 집사들이 올바르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 고마움에 대한 답례로 1만 명의 농민 곧 소작인들이 자기 이름을 써넣은 ‘만인솔’이란 우산을 만들어줬다. 지금도 통천댁은 옥양목으로 된 “만인솔”을 집안의 가장 귀중한 보물로 생각하고 있다. 
 

유명한 박물관 못지않은 “유물전시관” 

   
▲ 각종 귀중한 유물들을 전시중인 “유물전시관”

이강백 관장은 현재 (사)한국고택문화재소유자협의회 회장으로 6년째 일하고 있다. 그래서 관장이 선교장에 머무는 시간은 월, 화요일뿐이라고 한다. 회원 고택을 돌아보며 의욕적으로 온갖 일을 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례 운조루부터 온 나라 고택, 종가들에 대한 뒷이야기를 다양하게 해준다. 고택, 종가들에 대한 관장이 가진 사랑의 깊이를 알 수가 없다. 

짧은 대담을 끝내고 “유물전시관”을 안내해주겠다고 일어선다. 전시관 안에 들어서니 규모는 크지 않지만 조선시대 귀한 유물들이 빼곡하다. 얼마 전 전주 박물관에서 보았던 소반들이 별도로 특별전을 차릴 만큼 여기도 있다. 끊임없이 설명해주고 있는 관장은 유물들에도 굉장한 애정이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눈에 띄는 것은 추사 김정희 글씨의 “홍엽산거(紅葉山居)” 편액이다. 추사 글씨 하나만 가지고도 이 유물전시관의 가치를 말하고 있을 정도인데 관장은 관람객들에게 탁본 체험도 해주고 있다고 귀띔한다. 편액 앞에는 바둑판, 장기판, 쌍륙판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조선시대 크게 인기를 누렸다는 쌍륙판, 어느 박물관에서도 보지 못했던 쌍륙판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 유물전시관에서는 추사 김정희 글씨의 “홍엽산거(紅葉山居)” 편액 탁본 체험을 할 수 있다.

   
▲ 유물전시관에는 바둑판, 장기판과 함께 조선시대 가장 큰 인기를 누렸다는 쌍륙판도 전시되고 있다.

그밖에 유물전시관은 상감화로, 각종 바느질 도구, 상태가 완벽한 조선시대의 신들 태사혜, 운혜, 흑피혜는 몰론 발막신, 나막신, 지신, 미투리, 설피까지 골고루 전시되어 있다. 또 포졸모자와 사또모자와 그리고 선비 집안임을 증명하듯 8폭 책가도병풍, 경상, 교지들도 볼 수 있으며, 목어 모양의 빗자루는 신기할 정도이다. 

그런데 선교장의 유물 전시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행랑채 옆으로 가면 또 다른 민속자료관이 있어서 예전 안채에서 썼던 다양한 생활도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런 정도의 소장품이라면 웬만한 박물관을 뺨칠 정도이다. 
 

신선이 사는 그윽한 집 “선교유거(仙嶠幽居)” 

땅에는 빗물이 고인 곳이 있고, 비가 조금씩 내리기에 사진 찍기에는 쉬운 형편이 못 된다. 하지만, 그러한 조건이 취재를 방해할 수는 없다. 유물전시관을 나와 행랑채 쪽을 보니 장관이다. 모두 24칸에 방이 20개라니 거의 100여 명이 함께 묵을 수 있는 숙박시설이다. 좌우로 60여m에 달하는 한 일자 모양의 행랑채 위용은 방문객을 꼼짝 못하게 한다.  

   
▲ 24칸 위용을 자랑하는 행랑채

   
▲ 행랑채 대문, “선교유거(仙嶠幽居)”라고 쓰인 편액이 걸려있어 이곳에 오는 이는 모두 신선이 된다.

   
▲ 아름다운 행랑채 뒤꼍

행랑채 대문에는 “선교유거(仙嶠幽居)”라는 편액이 붙어 있다. 신선이 사는 그윽한 집이라는 뜻이 기가 막히다. 집주인만이 아니라 여기 묵는 손님 모두가 신선이 되는 것이다.  

손님이 묵을 수 있는 곳은 행랑채 말고도 30명 정도가 들어간다는 6칸 겹집인 작은 사랑채가 있으며, 귀한 손님들이 묵는 큰 사랑채 열화당(悅話堂)은 방이 3개에다 대청마루가 6칸이나 되고, 대청마루보다 약간 높은 누마루가 4칸이나 된다.  

선교장에 이처럼 방이 많았던 이유는 부잣집이라는 것만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 대관령 넘어 관동지역은 예로부터 경치가 좋은 선경이라 일컬어졌다. 금강산, 설악산, 경포대에다가 영랑 선인이 놀았다는 영랑호까지 끼고 있어서 전국에서 많은 유람객들이 몰려왔고. 이 유람객들은 대부분 관동의 첫째가는 부잣집인 선교장에서 숙식을 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관동의 으뜸 호텔이라 생각했던 건 아닐까? 물론 역대 선교장 주인들도 손님들의 무전취식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6·25때 폭격으로 없어지기 전에는 1인용 7첩 반상 그릇이 300인용 가량 보관돼 있었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손님을 접대했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이 집의 주인들은 ‘열화당’이라는 사랑채의 당호처럼 찾아오는 손님들과의 이야기 하는 것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다. 인생을 사는 의미와 보람이 바로 이야기로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는데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평생에 눈썹 찌푸릴 일을 하지 않으면... 

선교장의 역사는 크게 세단계로 나뉜다. 무경(茂卿) 이내번(李乃蕃, 1703∼1781)이 처음 이곳에 터를 잡았고, 그 손자인 오은(鰲隱) 이후 때에 사랑채인 열화당(悅話堂)과 연못인 활래정(活來亭)이 만들어졌으며, 이후의 증손자인 경농(鏡農) 이근우(李根宇, 1877∼1938) 때에 23칸의 한일자 행랑채가 증축되었다.  

   
▲ 전통문화체험관

   
▲ 목공예 체험을 할 수 있는 민속목공방

오은 선생이 평생 좌우명으로 삼았던 “평생에 눈썹 찌푸릴 일을 하지 않으면 세상에서 응당 이빨을 가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平生不作皺眉事 世間應無切齒人)”는 선교장의 철학을 한마디로 드러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뿐만이 아니라 오은 선생은 연못을 파고 연꽃을 심고 활래정이라는 그림 같은 정자를 만들어놓고 진흙탕 세상에 살면서도 진흙탕 세상을 벗어나 있는[居塵出塵] 삶을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대담 중 이강백 관장은 직원에게 “너 우리집 딸내미 맞아? 손님이 오셨는데 따뜻한 차 한 잔과 과즐이 없으니...”라고 젊잖게 꾸짖는다. 물론 가벼운 음수료를 이미 내왔지만 그 정도로는 선교장의 손님 접대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대담의 끝에 관장은 “예전엔 농민이 근본이었듯이 지금 같은 산업사회에선 근로자가 근본입니다. 우리가 농민과 상생했듯이 지금은 재벌이 좀 더 융통성 있게 처신해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현대사회에 뼈아픈 질책이었다. 동시에 관장은 우리 어머니들이 위대한 모성을 가진 사람들인데 요새는 대리만족을 위한 지나친 교육열에 아이들을 희생시키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는 것도 주문했다. 

   
▲ “평생에 눈썹 찌푸릴 일을 하지 않으면 세상에서 응당 이빨을 가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라는 좌우명으로 살았던 오은 선생이 지은 아름다운 활래정

독립운동가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과 백범(白凡) 김구(金九), 건국준비위원회의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도 단골손님이었다는 선교장. 예술가들을 끝없이 후원해 “한국의 메디치가”라는 칭송을 듣는 이내번 종택. 민간주택으로는 처음으로 국가지정 문화재로 선정된 고택. 그 선교장에는 잠시 들렀던 기자는 나눔의 향기가 짙게 배어있고, 신선의 아름다움이 물씬 풍기는 그곳에 그대로 눌러앉아 살고픈 충동이 돌아오는 내내 끊이질 않았다. 

김영조 기자 pine996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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