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 10루피 주기를 거절한 부끄러움

2018.06.23 12:21:34

네팔 방문기 (11) 2월 11일 일요일
이제야 깨닫는 ‘무주상보시’의 뜻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새벽 4시에 잠이 깨어 4시 30분에 시작하는 예불에 참석했다. 오늘은 스님 한분과 그리고 나 이렇게 두 사람만 예불에 참여했다. 그런데 5시 쯤 되었을까 아직 예불 중인데 멀리서 확성기 소리가 들리면서 소란스러워졌다. 무슨 기도문을 외우는 것 같기도 하고 노래를 틀어놓은 것 같기도 하고. 예불을 방해할 정도로 소란스러웠다. 소음의 근원지는 국제사원단지 어디인 것 같으나 정확히는 알 수가 없다.

 

나중에 네팔 사람 사무직원에게 물어보니 근처의 힌두교 사원에서 9일 동안 기도회가 열렸는데, 오늘이 마지막 날이어서 새벽부터 시끄러웠을 것이라고 말해 준다. 기독교로 말하면 부흥회를 9일 동안 열었는가 보다. 겨울에는 농사일이 없이 한가하니 9일 동안이나 기도회를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아침 공양 뒤에 대성석가사에서부터 순례를 출발하였다. 오늘 목표는 24km 서쪽에 있는 카피라바투인데 근처에 있는 유적지인 카필라 성까지 가기로 했다. 오늘도 험난한 코스였다. 길에서는 먼지가 풀풀 나고 햇살이 따갑게 비쳐서 날씨가 더웠다. 일요일인데도 학생들이 가방을 메고서 학교에 간다. 지나가는 어른에게 물어보니 네팔은 힌두교를 따라서 토요일에 쉬고 일요일에는 모두 정상 근무를 한다고 한다. 네팔이 새삼스럽게 힌두교 국가라는 것이 실감났다.

 

중간에 어느 가게 앞에서 쉬게 되었다. 병산은 석류 생과일주스가 맛있다고 하면서 세 잔을 주문했다. 가게 주인은 우리 눈앞에서 직접 석류를 까고 믹서로 갈아서 과일 주스를 만들어 준다. 신맛을 좋아하는 내 입맛에 맞아서 나는 석류 주스를 맛있게 먹었다. 주스를 먹고 나서 가게 주인에게 ‘토일렛(toilet)’이라고 말했더니 따라 오라고 눈짓을 한다. 가게 주인을 따라서 건물 뒤편으로 갔는데, 조금 으슥한 곳을 가리키고는 가버린다.

 

나는 아무리 봐도 화장실 문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자세히 살펴보니 거름 같은 것이 지저분하게 쌓여 있고 냄새가 좋지 않다. 아하, 천연의 야외 화장실이 건물 뒤에 붙어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 수 있었다. 아무도 보는 사람도 없고, 그냥 실례를 했다. 일을 보고서 다시 앞쪽으로 나오면서 생각해 보니 만일 ‘큰것’이었으면 어쨌을까 의문이 생겼다. 만일 여자가 화장실을 물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난처한 질문이어서 가게 주인에게 물어보지는 못했다.

 

다시 흙길을 걷었다. 점심은 길가에 있는 가게에서 네팔 음식을 주문해서 먹었는데, 나는 조리실이 매우 지저분해 보여서 께름칙했다. 지난번에 달걀을 먹고 식중독에 걸렸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작은 도너스 2개만 먹었다. 병산은 점심 식사가 부실했던지 배낭에서 병을 꺼내더니 컵 3개를 가져다가 선식가루를 물에 타서 준다. 내가 먹어보니 기본적으로는 미숫가루 같았고 맛은 그저 그런 정도로 먹을 만 했다. 선식은 여덟 가지 곡식을 가루로 빻아서 만든 것인데 한국에서 어느 도인이 만들어서 병산에게 비상식량으로 주었다고 한다.

 

점심을 먹고 나서 먼지 나는 순례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오른쪽에 커다란 간판이 나타난다. 가까이 가서 간판을 보니 맨 아래 줄에 한국말로 학교 이름이 쓰여 있다. 호기심이 나서 작은 학교로 들어가 보았다. 손바닥만 한 운동장이 있고 교무실 한 칸, 그리고 학생들이 사용하는 작은 교실이 하나 있었다. 소박한 교실에는 작은 칠판, 그리고 책걸상이 30여 개 놓여 있었다.

 

우리가 교무실로 가자 네팔인 교사가 한 사람 나오더니 안내를 한다. 마침 교장 선생님은 공무로 외출하여 안 계신다고 했다. 학교는 2010년에 한국의 후원금으로 지은 것이었다. 자세히 물어보니 한국 정부가 지원한 것이 아니고 전북 남원의 선원사라는 절의 신도들이 낸 후원금으로 땅을 사고 학교를 건립하였다고 한다.

 

 

병산은 봉투에 미화로 100달러(네팔 화폐로는 1만 루피)를 넣어서 기부금을 냈다. 기부금을 전달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다. 생명 탈핵 카페에 매일 쓰는 순례일지에 올릴 사진이 필요하다. 병산은 경비를 매우 아껴 쓰고 절약하지만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거액의 기부금을 내기도 한다. 돈을 쓸 줄 아는 경영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실크로드 순례를 설명하면 “대단한 일을 한다.는 칭찬이 대부분이다. 이어서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질문은 “경비는 어떻게 충당하는가?”다.

 

병산은 실크로드 순례를 후원할 100인 위원회를 모집했다. 실크로드 순례 취지에 공감하여 100만원 후원금을 내겠다는 100명의 후원 회원을 구했는데, 현재까지 91명이 모집되었다. 후원금이 모이자 중고차 소울(프란체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에 탔던 차)을 사서 한국과 일본을 걸을 때에 사용하였다. 가장 비용이 많이 드는 부분이 숙박비인데 호텔이나 모텔에서 자려면 돈이 많이 든다. 그러므로 병산은 숙박지로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절이나 교회, 성당 등 종교시설을 이용한다.

 

목사님이나 신부님, 또는 스님 중에서 평소 환경운동에 관심이 있는 분을 수소문하여 찾은 후에 미리 전화를 해서 실크로드 순례를 설명하고 1박을 예약한다. 생각해 보라. 생명과 탈핵을 목표로 2년 동안 걸어가는 순례를 한다는데, 돈을 받을 수 있겠는가?

 

병산이 서울에서 부산까지 한 달 동안 걸을 때에 나는 두 차례 2박 3일 일정으로 순례길에 동참한 적이 있다. 그 때에 대부분 종교 시설에서 잤는데, 숙박비를 받는 성직자는 없었다. 오히려 고생한다고 저녁 먹여 주고 아침 먹여 주고 격려금을 넣은 하얀 봉투까지 주는 것을 보았다. 병산이 실크로드 순례단장으로서 역경을 헤쳐 나가는 모습을 보면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우리말 속담이 맞는다고 생각된다.

 

 

24km를 걸어서 제법 큰 도시인 카피라바투에 도착했다. 길가 양쪽으로 상점이 늘어서 있고, 시끌시끌한 시장거리가 있고, 차량과 릭샤(인력거)가 부지런히 다닌다. 부처님이 출가 전까지 생활했던 카필라 성 유적은 여기서 3km 정도 떨어져 있다고 한다. 왕복 6km를 추가로 걷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여 우리는 오토릭샤를 타려고 기다렸다. 그런데 어떤 네팔 사람이 헐레벌떡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는 시장에서 이불가게를 운영하는 상인으로, 우리가 시장을 지날 때에 보았는데 마침 손님과 흥정을 하고 있어서 우리를 부르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예전에 한국에 가서 일을 하고 돈을 모아 네팔에 와서 이불가게를 열었다고 유창한 한국말로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자기가 가게를 비울 수가 없으니 자기 가게로 가서 차 한 잔 마시자고 제안을 한다. 상황을 보니 그는 한국 사람에 대해서 매우 좋은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병산은 그에게 제의는 매우 고맙지만 일정이 바빠서 다음에 기회 있으면 만나자고 완곡하게 거절을 하였다.

 

순례자 3명은 150루피를 내고 오토릭샤(모터를 달은 인력거)를 타고서 카필라 성의 서문으로 갔다. 당시 카필라 성에는 성문이 동서남북에 4개 있었나 보다. 불경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성년이 된 어느 봄날 태자는 동문 밖에서 허리가 휘고 마른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헐떡이며 지나가는 장면을 보게 된다. 그리고 남문 밖에서는 길가에 쓰러져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병자를 만나게 된다. 서문 밖에서는 썩어서 악취를 풍기는 시체를 보게 된다. 태자는 자신도 언젠가는 노인이 되고 병들어 고통스럽게 죽어야 하는지,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없는지 고민하게 된다.

 

자신의 고민을 학자들에게 물어보지만 어떠한 이도 시원하게 해답을 주지 않아 학문에 회의까지 느끼게 된다. 며칠 뒤 북문을 통해 성 밖으로 나간 태자는 남루한 행색과는 달리 거룩한 기품과 당당함을 보이는 수행자와 마주치게 된다. 태자는 인생의 생로병사 고통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수행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출가를 결심했다.“

 

석가모니의 전기에는 그가 출가하는 장면이 극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한밤중에 깨어나자마자 그는 마부이며 시종인 찬나에게 그의 백마 칸타카에 안장을 얹게 하고는 침실로 가서 잠들어 있는 아내와 아들을 마지막으로 보았다. 그리고는 찬나가 이끄는 말을 타고서 성문을 나섰다. 그날 밤으로 그는 시종 찬나와 함께 카피라바투를 떠나 새벽녘에는 아노마 강을 건넜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모든 장신구들을 찬나에게 주고, 찬나와 칸타카를 아버지에게 되돌려 보내 출가 사실을 알리게 했다. 그리고 그 자신은 지나가는 사냥꾼과 옷을 바꿔 입어 고행자의 모습처럼 보이게 했다.”

 

서문 앞에 있는 안내문을 읽어 보니 카필라성은 가로 450m 세로 500m 정도의 작은 성인데 일부 성곽과 유적이 남아 있지만 현재 성 안에 사람은 살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는 서문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오토릭샤 주인에게 30분 뒤에 동문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했다.

 

카필라 성의 가운데에 있는 유적은 석가모니 당시의 주거 흔적을 알 수 있는 벽돌이 약간 남아있는 정도로 매우 초라한 모습이었다. 성 안을 천천히 걸으면서 내가 밟는 흙을 2,500년 전 석가모니도 밟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감회가 일었다. 성에는 작은 연못도 있었다. 내가 보는 성곽을 석가모니도 보았을 것이고 내가 보는 커다란 나무는 아마도 석가모니 당시의 나무와 최소한 종(種)은 같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우리가 동문으로 갔으나 오토릭샤는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병산 이야기로는 아마 다른 관광객을 태우고 가버렸을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동문으로 나가 300m쯤 떨어져 있는 쌍둥이탑으로 걸어갔다. 쌍둥이탑은 석가모니의 부모를 기념하는 탑이라고 한다. 석가모니는 효자였나 보다.

 

불경 중에 부모은중경이라는 것이 있다. 유교의 효경(孝經)이 효를 강조하는데 견주어 부모은중경은 은혜를 강조한다. 부모은중경은 부처님과 제자 아난존자가 질의 응답한 내용으로서 모두 1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4장에서 열 가지 부모의 은혜를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특히 다섯 번째 은혜는 회건취습은(回乾就濕恩, 진자리 마른자리 골라 눕힌 은혜)인데 다음과 같다.

 

어머니 당신몸은 젖은자리 누우시고 아기는 받들어서 마른자리 눕히시며

양쪽의 젖으로는 기갈을 채워주고 고운옷 소매로는 찬바람 가려주네

은혜로운 그마음에 어느땐들 잠드실까 아기의 재롱으로 기쁨을 다하시며

오로지 어린아기 편할것만 생각하고 자비하신 어머니는 단잠도 사양했네

 

불교는 유교 못지않게 부모님의 은혜를 강조하는데, 특히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의 은혜를 강조해서 설명하고 있다. 매년 5월 8일 어버이날이면 우리가 부르는 노래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는 부모은중경을 참고하여 양주동 박사가 가사를 만든 것이라고 한다.

 

쌍둥이탑을 구경하고 나오는데 대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꼬마 여자아이가 10루피만 달라고 ‘머니! 텐루피!’라고 외치면서 따라온다. 고개를 저어도 계속 따라오면서 귀찮게 한다. 사실 10루피는 우리 돈으로는 100원에 해당하니 큰돈은 아니지만 내가 돈을 주면 이 아이는 계속해서 이곳에서 구걸을 할 것이라는 생각이 나서 돈을 주지 않았다.

 

그래도 여자아이는 계속 따라오면서 돈을 달라고 한다. 참다 못 해 내가 정색을 하고서 No! 라고 쌀쌀맞게 말을 했다. 그랬더니 그 아이는 포기하고 돌아간다. 나는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 부드러운 말투로 Bye! 라고 말했는데, 그 아이의 대답이 놀라웠다. 그 아이는 힐끗 돌아보더니 No Bye! 라고 말하고는 달아나 버린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마침 옆에 있는 하라상을 보며 말했다. “No money, no bye.” 내 말을 듣고 하라상이 웃었다.

 

아이와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에 나의 행동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나의 행동이 좋은 선택이었나? 내가 돈을 주지 않으면 그 아이는 구걸을 그만 둘까? 그 아이가 돈을 구걸해서 집에 가지고 가면 가난한 가정의 생활비가 될 지도 모른다. 병중에 있는 부모님의 치료비가 될 지도 모른다. 그 아이의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10루피를 주지 않은 것이 잘한 일 같지는 않았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런 경우에 처하면 어떻게 했을까? 아마도 돈을 주었을 것이다.

 

내가 아주 오래 전 국토개발원에서 근무할 때에, 건설부에서 파견된 이 과장이라는 분과 차를 마시며 불교에 관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 분은 불교에 대해서 매우 해박하였는데, 나는 이러한 질문을 했었다. “부처님의 말씀을 깨달은 사람과 깨닫지 못한 일반인의 행동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 어떤 사람이 깨닫는다면 그 사람은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달라지는가?”

 

그 분은 나의 질문을 듣더니 이것은 금강경에 나오는 보물 같은 이야기인데 좋은 질문을 했기 때문에 특별히 말해준다면서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고 대답했다. 무주상보시는 세 가지 상(相)에 얽매이지 않는 보시를 말한다. 곧 어떤 사람이 보시를 하더라도 부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면 보시를 하는 사람, 보시의 내용, 보시를 받는 사람에 얽매이지 않게 된다고 한다.

 

쉽게 말해서, 내가 어떤 사람을 금전적으로 1,000만원 도와준다고 가정하자. 무주상보시란 ‘내가 돕는다.’라는 생각도 없고, ‘얼마를 돕는다.’라는 생각도 없고, ‘누구를 돕는다.’는 생각도 없는 그런 보시를 말한다. 그러니까 내가 도와주었다고 우쭐대지도 않고, 많이 도와주었다고 자랑하지도 않고, 너에게 도와주었으니 나중에 은혜를 갚으라는 요구도 없이, 도와주었다는 사실도 무심하게 금방 잊어버리는 그러한 행동이 무주상보시라고 한다.

 

그래서 내가 다시 물었다. 무주상보시는 성경 마태복음 6장 3절에 나오는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과 같지 않는가? 그러자 그분은 ”그렇다. 기독교의 사랑이나 불교의 보시나 근본적으로는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그 때 나는 30대 후반의 나이로 젊었고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있었다. 그 당시 나는 절대적인 진리와 절대적인 선을 추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의 사랑과 불교의 보시가 마찬가지라는 그분의 말에 공감을 하지 못하였다.

 

그 뒤 30년의 세월이 흐르고 나는 세상의 온갖 풍상을 겪었다. 이제 60대 후반의 나이에 도달한 지금에는 그분의 말에 깊은 공감을 하고 있다. 세상에 절대적인 진리는 없으며 선악의 기준도 절대적이라기보다는 상대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절대적이라는 단어는 함부로 사용할 단어가 아니다. 절대적인 것을 추구하다 보면 예외를 허락하지 않게 되고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절대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과는 대화하기 힘들다. 나이가 들면서 지혜로워졌다고 말할 수도 있겠고, 어떻게 보면 노회해졌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 시간이 흐르면서 모든 것은 변한다.

 

내 생각으로는 사람이 행복하려면 육신도 건강하고 정신도 건강해야 한다. 육신의 건강을 위해서 우리는 음식을 먹는다. 한국 사람은 밥과 김치가 있는 한식을 먹으면서 건강을 유지하고 미국 사람은 빵과 고기가 나오는 양식을 먹고 건강을 유지한다. “건강을 위해서 한식이 더 좋은가 양식이 더 좋은가?”라는 질문은 어리석은 질문이다. 나는 한국에 태어났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한식에 길들여져 있고,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에 태어났기 때문에 양식을 좋아할 것이다. 건강을 위해서는 양식이나 한식이나 둘 다 좋은 음식이다.

 

종교는 사람의 정신을 건강하게 한다. 네팔 소년은 네팔에 태어났기 때문에 부모를 따라서 힌두교를 믿게 되고 힌두교를 따르면서 행복을 추구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가정에서 태어난 소년은 부모를 따라서 기독교나 불교 등을 믿게 되고 그 종교가 가르치는 신앙생활을 하게 될 확률이 매우 크다.

 

지구촌 곳곳에는 종족이 다르고 역사가 다르고 문화가 다른 인류가 75억 명이나 살고 있다. 오직 하나의 절대적인 종교가 75억 명의 사람들을 행복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주장에 나는 공감할 수 없다. 제대로만 믿으면 어느 종교라도 인간의 정신을 건강하게 하고 인간을 행복에 이르게 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제대로 믿는지 안 믿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 사람의 말을 듣고 판단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말 보다는 그 사람의 얼굴을 보면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보다 더 확실하게는 그 사람의 행동을 보면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말은 아름다운데 행동은 추한 경우도 많다. 말보다는 실천이 더 중요하다.

 

무주상보시가 불교 실천 윤리의 핵심이라면, 내가 그 아이에게 10루피를 주지 않은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행동이다. 부처님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나를 크게 꾸짖었을 것이다. 아니, 예수님이 그 자리에 있었더라도 나를 꾸짖었을 것이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핑계를 대며 보시를 하지 않은 것이다. 여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아이를 찾아가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10루피를 주고 싶어졌다. 아, 그러나 아이는 사라지고 나는 그 자리를 떠나버렸으니 오직 부끄러움만 남고 말았다.

 

우리는 카필라 성을 외곽으로 걸어서 동문에서 다시 서문으로 왔다. 마침 카필라 성으로 관광을 온 태국 승려들을 만나 관광버스를 얻어 타고 카피라바투로 갔다. 카피라바투에서 내려 먼지가 풀풀 새는 일반 버스를 타고 1시간 정도 걸려서 룸비니 대성석가사로 돌아왔다. 오늘은 25km 정도 걸은 것 같다. 저녁 공양을 마치고 일찍 잠에 빠졌다.

 

이상훈 교수 muusim2@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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