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재 윤두서, 형형한 눈빛 뒤에 어린 따뜻한 마음

2022.04.25 12:25:21

《시대를 앞서간 선비화가 윤두서》, 박은순, 나무숲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화가 났나?’

‘노려보는 것 같기도 해.’

‘아냐, 슬픈 표정인데?’

종이에 꽉 차게 그려진 어떤 사람이 우리를 뚫어지게 보고 있어요. 살짝 올라간 눈매에 한 올 한 올 생생하게 묘사된 풍성한 수염, 다소 불그레한 살집 있는 얼굴이 씩씩한 장수처럼 보이기도 하고... 강렬한 눈매를 가진 그림 속의 인물이 우리를 꼼짝 못 하게 만듭니다.

놀라지 마세요. 이 사람은 따뜻한 마음을 가진 조선 후기의 유명한 선비화가 윤두서입니다.

(p.8)

 

정면을 응시하는 부릅뜬 눈.

한 번 보면 쉬이 잊기 어려운 그 얼굴. 바로 자신의 모습을 그린 윤두서의 ‘자화상’이다. 미술 교과서에 실려 누구나 한 번쯤 본 적이 있을 법한 이 그림은, 해남윤씨 종가를 대표하는 종손이자 선비 화가였던 공재 윤두서가 18세기 초 그린 것이다.

 

지금은 얼굴만 남아있어 미완성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이 X-선 투과 촬영 등 정밀히 조사한 결과 본디 다소 옅게 그려졌던 신체 부분이 보존복원 과정에서 지워졌던 것으로 드러났다.

 

 

비록 신체는 지워져 버렸으나, 그가 강렬한 눈빛으로 응시했던 세상은 여전히 그를 기억한다. 이 책의 부제처럼, ‘시대를 앞서간 선비화가’로 말이다. 공재 윤두서는 확실히 남다른 데가 있었다. 요즘 말로 하면 끊임없이 ‘혁신’을 실천한 당대의 혁신가였다.

 

이 책 《시대를 앞서간 선비화가 윤두서》는 그런 윤두서의 삶을 어린이들도 이해하기 쉽게 조근조근 풀어낸다. 나무숲출판사가 기획한 ‘어린이미술관’ 시리즈의 열여섯 번째 책으로, 윤두서가 그린 다양한 그림과 글씨, 초상화까지 폭넓게 담아내 쉽고 빠른 ‘윤두서 입문서’로 손색이 없다.

 

 

윤두서는 1668년, 전라남도 해남 연동에서 태어나자마자 아들이 없는 종가의 종손으로 입양되었다. 그는 양부모 윤이석과 청송 심씨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고, 증조할아버지 윤선도를 비롯한 수많은 해남윤씨 친척들과 모여 살며 부귀하고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집안에서는 윤두서의 총명함을 일찍이 알아보고 ‘한양 유학’을 보냈다. 13살에 한양으로 올라온 윤두서는 친형제인 창서, 흥서, 종서와 어울려 지내며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당시 선비들이 그러하듯 그도 과거 준비에 전념하며 출사를 꿈꿨으나, 그런 꿈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사건이 일어났다.

 

1696년, 셋째 형 윤종서가 어지러운 정치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린 일로 거제도로 귀양을 갔고, 다음 해에는 그만 옥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윤두서도 모함에 휘말려 위기에 처하는 등 온 집안이 위태로웠다. 해남윤씨 집안의 종손으로 가문을 보존할 책임이 있던 그는 과거의 길을 포기하고 선비의 삶을 택했다.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으로 과거에 대한 뜻은 접었지만, 세상을 향한 관심은 여전했다. 조정에 출사하지 못하는 허전함을 글씨와 그림, 문인들과의 교유로 풀며 답답한 마음을 달랬다. 그리고 공부를 하며 깨달은 것들을 꾸준히 실천하는 ‘행동하는 선비’의 삶을 살았다.

 

그는 신분의 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을 귀하게 대했다. 그래서 증조부 때부터 집안일을 봐주던 노비가 죽자 그의 자손에게 재산을 보장해 주고, 30살 때는 어머니의 명으로 채권을 받으러 해남에 갔다가 그곳의 가난한 사정을 보고 채권을 다 불살라버리기도 했다.

 

힘없고 소외된 약자를 향한 관심은 그림으로도 이어졌다. 그는 특히 <나물 캐는 여인>이라는 그림에서 나물을 캐는 백성의 모습을 단아하면서도 절제된 필치로 그려냈다. 당시 선비가 여자를, 그것도 나물을 캐는 모습을 그리는 것은 혁신적인 발상이었다.

 

 

백성들이 하는 노동은 천한 것으로 여기던 보수적인 선비사회에서, 이렇게 ‘일하는 모습’을 담아낸 것은 그가 얼마나 인간의 아름다움을 편견 없이 볼 수 있는 사람이었는지 보여준다. 그가 그린 짚신 삼는 모습, 돌을 깨는 모습에서 인간의 노동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조선의 산천을 실제로 관찰하여 그린 ‘진경산수화’ 또한 윤두서의 붓끝에서 시작되었다. 그가 그린 <경답목우도>에는 경치와 노동이 골고루 들어가 있어, 자연과 사람을 두루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잘 드러난다.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이나 풍류의 대상이 아닌, 생활이 이루어지는 장소로 보는 실용적인 접근방식이 윤두서 진경산수화가 가진 특징이다.

 

 

 

정물화 역시 윤두서가 처음 시작한 화풍이다. 그전에도 풀이나 꽃을 그리긴 했지만, 직접 꽃과 과일을 정돈해 놓고 그림을 그린 조선 화가는 없었다. 윤두서는 수박, 참외, 가지 등 여름 과일과 채소를 쟁반에 모아놓고 그림을 그리며, 새로운 ‘명암법’을 사용하여 오목한 부분과 튀어나온 부분을 표현해냈다.

 

이렇게 세상과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선으로 새로운 시도를 계속하던 그는, 고향 해남에 내려와 지내던 중 48살의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해남에 내려온 지 만 3년이 채 되지 않던 때였다. 윤두서를 아끼던 이들은 50살도 되지 않은 나이에 흙으로 돌아간 그를 애통해했다.

 

비록 그는 일찍 갔지만, 그의 재능은 아들과 손자에게 고스란히 이어져 아들 윤덕희는 윤두서 이후 가장 유명한 선비화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이름을 떨쳤고, 손자 윤용 또한 천부적인 재능을 드러냈지만 안타깝게도 젊어서 죽었다.

 

비단 자손뿐만 아니라 김홍도의 스승으로 알려진 선비화가 강세황, 풍속화로 이름난 중인화가 강희언, 중인화가 허련, 서화가로 유명한 추사 김정희 등 후대 화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추사는 윤두서가 조선 후기 회화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고 평하며, 자신이 가지고 있던 윤두서의 화첩에 ‘우리나라의 옛그림을 배우려면 윤두서에서부터 시작하라’는 글을 남겼다.

 

형형한 눈빛 뒤로 그 누구보다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선비화가, 윤두서. 늘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않았던 그가 남긴 수많은 그림이 오늘날까지도 그가 살았던 멋진 삶의 행적을 말없이 보여준다. 이 책을 읽고 윤두서에 좀 더 관심이 생긴 이라면, 해남에 있는 해남윤씨 고택 녹우당을 방문해 보는 것도 좋겠다.

 

 

우지원 기자 basicfor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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