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서 시작된 왜곡... '귀무덤'을 '코무덤'으로 바꾸다

2022.12.28 11:52:29

일본이 왜곡한 <耳塚>, 바로잡은 최진갑 박사 대담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성탄절을 이틀 앞둔 12월 23일(금), 서울은 올해 들어 가장 추운 영하 15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하필 경남 사천으로 취재하러 가기로 한 날 아침 일기예보는 전라지역 등 서해안 일대의 폭설까지 예보된 상황이었다. 취재지인 경남 사천시는 폭설과 상관이 없는 곳이지만, 이곳을 가기 위한 고속도로는 무주 등 폭설 지방을 거쳐야 한다. 다른 날로 취재 일정을 바꿀까 하다가 눈 속이라도 뚫고 가서 만나지 않으면 안 되는 인물이 있어 약속대로 차를 몰았다. 영하 15도, 폭설을 뚫고 만나야 했던 인물이란 다름 아닌 한일문화연구소 연구교수인 최진갑 박사였다.

 

최진갑 박사는 경남 사천이 고향으로 자신의 고향땅에 역사 왜곡의 표상으로 서 있는 <耳塚> 위령비를 더는 두고 볼 수 없어 <국민신문고>에 민원을 제기한 뒤 지난 1년여 동안을 뛰어다니며 해당 관청인 사천시와 협의 끝에 본래 이름인 <코무덤>으로 바꾼 인물이다.

 

여기서 잠깐 경남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에 있는 조명군총(朝明軍塚) 옆에 세워져 있던 <耳塚> 위령비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耳塚>이란 우리말로 ‘귀무덤’으로 귀가 묻혀있는 무덤이다. 그러나 조명군총 옆에 세워져 있던 <耳塚> 위령비는 ‘위령비’일 뿐 귀가 묻혀있지는 않다. <耳塚>의 원형은 일본 교토시에 있는 <鼻塚, 일본말로 하나즈카, 코무덤>에서 유래한다. ‘사천시의 <耳塚>이 교토의 <鼻塚>에서 유래했다는 말이 무엇이지?’ 하고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교토시에 현존하는 <鼻塚>은 정유재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조선인의 코를 베어다 묻은 무덤이다. 말만 들어도 섬뜩한 이 참상의 자초지종을 알게 된 한국측에서는 1990년 부산 자비사의 박삼중 스님을 중심으로 코무덤의 흙 일부를 봉환하여 사천시의 조명군총 옆에 묻었다. 이때 코무덤을 나타내는 <鼻塚>이라는 비(碑)를 세웠어야 하지만, 귀무덤을 뜻하는 <耳塚>이라고 새겨둔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최진갑 박사는 조명군총 옆에 서있던 <耳塚> 비석이 늘 마음에 걸렸다. 400년 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조선인의 코를 베어다 묻고 <鼻塚>이라고 이름 붙였던 교토 코무덤이 일본 쪽의 왜곡에 따라 스리슬쩍 <耳塚>이 되어버린 뒤, 이를 그대로 따르고 있는 한국의 상황이 안타까웠다.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일에 매달려 시간을 내지 못했던 최진갑 박사는 정년을 맞아 시간이 생기자 <耳塚>의 왜곡을 바로잡기 위해 맨 먼저 <국민신문고>에 민원을 제기하고, 1990년 교토시에서 코무덤 유토를 봉환해온 박삼중 스님을 두 차례 방문하는 등 각고의 노력 끝에 <코무덤> 위령비에 이어, 11개월 만인 지난 11월 29일 사천시로부터 우리말로 바로 잡은 <코무덤 안내판>을 설치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사실을 말하자면, 조명군총 옆에 있던 <耳塚> 비석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은 최진갑 박사가 처음은 아니다. 교토 <코무덤>에 대해 기자는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김영조 소장과 함께 민족문제연구소와 한겨레 신문 공동 주최로 열린 2010년 ‘경술국치 100년, 한일평화를 여는 역사기행’을 동행 취재한 바 있으며 이후 사천, 부안 호벌치, 일본 교토 등을 오가며 취재하여 수차례에 걸쳐 ‘교토 코무덤이 귀무덤으로 둔갑되었다’라는 기사를 올리고 이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최진갑 박사처럼 이 문제에 전념할 수 없는 형편인지라 차일피일 시간만 보내고 있던 차에 2022년 1월, 최진갑 박사로부터 국민신문고에 민원을 제기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후 김영조 소장과 기자는 역사 왜곡을 바로잡으려는 최진갑 박사의 진정성을 이해하고 <耳塚>이 <코무덤>으로 바로잡히기까지 수십 차례의 소통을 이어가면서 힘을 실어주었다.

 

그렇다면 어찌해서, 경남 사천 조명군총 옆에 세워둔 코무덤 위령비가 ‘耳塚(귀무덤)’이 되었으며, 어떠한 경로를 거쳐 <코무덤>으로 바로 잡게 된 것일까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국내에서 <귀무덤>으로 통용하게 된 원인을 최진갑 박사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국내에서 귀무덤으로 정착된 것은 언론의 잘못이 크다고 본다. 당시 언론에서 교토의 무덤을 ‘耳塚(귀무덤)’으로 앞다투어 보도했기 때문이다.

 

<한겨레> 4백 년 떠돌던 ‘귀무덤’ 원혼 돌아온다(1990.04.20.)

<MBC> 임진왜란 때의 귀무덤 400년 만의 귀환(1990.04.22.)

<국민일보> 귀무덤 원혼들 (1990.04.24.)

<중앙일보> 귀무덤 원혼 고국 안치 /부산 동명불원에(1990.04.24.)

<동아일보> 귀무덤 ‘이총’ 새 안식처(2007.10.01.)

 

등과 같이 각종 언론에서 이구동성으로 ‘귀무덤’이라고 보도했음을 지적했다.

 

사실 국내의 보도가 이렇게 된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면 <코무덤>이 있는 교토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교토시가 코무덤의 안내판(1979)을 세울 때 <耳塚>으로 세워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2022)는 <耳塚(鼻塚)>으로 바뀐 상태다.

 

 

이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해 기자는 2022년 11월 24일 자로 교토시 문화시민국 문화예술도시추진실 문화재보호과(京都市文化市民局文化芸術都市推進室文化財保護課)에 질의를 했다. 기자의 질문은 교토 코무덤의 최초 안내판 설치 일자와 그 내용, 현재 안내판의 설치 일자와 그 내용 및 사진에 관한 것이었다. 질의 며칠 뒤, 담당자인 이에하라 케이타 (家原 圭太) 씨로부터 다음과 같은 답변과 현장 사진을 받았다.(번역은 기자가 함)

 

“최초의 안내판 설치는 소화 54년 7월(1979.7.)이며, <耳塚(鼻塚)>이라고 병기하게 된 것은 평성 15년 3월(2003.3.)이다. 변경한 까닭은 예부터 <鼻塚>이라고 불려오던 적이 있다는 설이 있어서 <耳塚(鼻塚)>이라고 표기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여 안내판을 수정했다.”

 

 

그러나 담당자인 이에하라 씨의 답 가운데 “예부터 <鼻塚>이라고 불려오던 적이 있다는 설이 있어서 <耳塚(鼻塚)>이라고 변경했다.”라는 답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금의 교토 코무덤은 조성 당시부터 줄곧 <鼻塚>이었고, 근거가 불명확한 ‘설(設)’에 의한 것이 아니라 명확한 근거들이 문헌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근거 가운데 하나를 제시한다면 메이지시대 도쿄제국대학 교수였던 호시노 히사시(星野恒 1839~1917) 박사의 논문만큼 명백한 자료도 없다. 호시노 교수는 ‘교토 대불전 앞의 무덤은 코무덤이며 귀무덤이 아니다(京都大仏殿の塚は鼻塚にして耳塚にあらざる)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단연코 이 무덤이 ‘코무덤’임을 밝혔다.

 

호시노 박사의 논문보다 250년이나 앞선 기록인 1620년의 《조선정벌기(朝鮮征伐記)》에도, “이총(耳塚), 대불전(大佛展) 앞에 있다. 세상에서는 이총(耳塚)으로 부르나 사실은 비총(鼻塚)이다. 1597년 가등청정(加籐淸正), 소서행장(小西行長) 등이 조선인의 코를 베어 온 것이다. 두 장수의 병력은 20만으로 1인당 조선인의 코 3개를 베어오라고 했다. 조선에서는 감독관이 이를 확인하여 소금에 절여 보냈다. ”라고 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일본 구참모본부가 펴낸 《일본전사(日本戰史)》 속의 《청정고려진각서(淸正高麗陳覺書)》에도 교토의 무덤이 <코무덤> 임을 밝히고 있다. “비총(鼻塚)의 유래. 전라도 부중(府中)의 전주와 신소에서 가등청정(加籐淸正)과 소서행장(小西行長) 두 군대가 회합을 하여 군사 1인당 조선인의 코 3개씩을 베어 베어진 코를 조선에서 검사관이 이를 확인한 뒤에 큰통에 담고 소금에 절여서 일본으로 보냈다. 이를 대불전(大佛展) 앞에 무덤을 만들어 묻었다. 지금 대불전 앞의 비총(鼻塚) 그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 무덤의 이름이 <귀무덤>으로 왜곡된 것일까? 그것은 에도정부의 참모였던 젊은 학자인 하야시 라잔(林羅山, 1583~1657)이 “코무덤은 잔인하므로 순화하여 귀무덤으로 부르자”라는 주장 때문이었다. 이 어처구니없는 주장 때문에 교토의 코무덤은 귀무덤으로 둔갑된 채 오늘에 이르렀고, 경남 사천시의 조명군총 옆에 세워둔 <耳塚> 위령비는 일본쪽의 왜곡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최진갑 박사는 교토 코무덤을 귀무덤으로 일본에서 왜곡시킨 역사를 사천시가 <耳塚>으로 고착화한 것을 들어 <국민신문고>를 통해 민원을 제기하고 각종 입증 자료를 제시하여 1년여 만에 <耳塚>을 <코무덤>으로 바꾸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지난 23일(금) 오후, 기자는 사천 시내 까페에서 최진갑 박사를 만나 그간의 경위를 자세히 듣는 시간을 가졌다. 다음은 대담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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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년간 <귀무덤>으로 왜곡 보도하는 언론 각성해야

[대담] 사천 <코무덤> 이름 바로잡은 최진갑 박사

 

 

 

- 경남 사천 조명군총 옆에 있는 ‘耳塚’ 위령비의 왜곡을 바로잡기 위해 <국민신문고>에 넣은 민원 내용을 요약해주십시오.

 

“당시 민원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사천시는 선진리 귀무덤(耳塚) 위령비가 왜곡된 명칭이라는 데 동의하시는지요?

2. 사천시는 위령비 비문을 ‘코무덤’으로 수정할 의향이 있으신지요?

3. 현재 왜곡된 귀무덤(耳塚)에서 <코무덤>으로 수정 못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요?

4. <코무덤>으로 수정할 의향이 있다면 수정 시기는 언제쯤인가요?

5. 2009년 당시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김영조 소장님께서 사천문화원장에게 귀무덤(耳塚)은 잘못된 표현이라고 지적하며 <코무덤>으로 수정을 건의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사천문화원장이 “나는 전임자로부터 ‘이총’으로 넘겨받았기에 다른 이름으로 바꿀 아무런 이유가 없다. 사실을 확인할 이유도 없으며, 그저 ‘이총’이면 된다.”라는 말을 했었다는데 이에 대한 사천시의 공식적인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라는 내용을 질의했습니다.“

 

- <국민신문고>에 민원을 낸 뒤 사천시에 <코무덤> 명칭 변경을 위한 자료 제출 등 박삼중 스님과 사천시에 이어 사천문화원과 회의 및 의견 제시가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그 과정에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무엇입니까?

 

“교토에 있는 무덤 이름이 <이총>에서 <이(비)총>으로 바뀌었지만, 이 역시 원래 명칭이 아니며 조성 당시의 이름이 <비총>이라는 명확한 근거자료를 시대별로 정리하고 문헌을 첨부하여 <비명(碑銘) 정정 사유서>라는 보고서를 만드는 작업이 몹시 힘들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교토 코무덤의 유토를 봉환해온 민관단체(대표 박삼중 스님)를 찾아가서 ‘귀무덤’이 아니고 ‘코무덤’이 진짜 명칭이라는 점을 설명하면서 각종 자료를 제시하고 명칭 변경을 허락받는 일 또한 힘들었습니다.”

 

 

- 왜곡된 명칭인 <귀무덤>을 <코무덤>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협조해준 사천시 문화관광국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그리고 이번 명칭 정정 과정에서 도움을 준 사람들이 있으면 소개해주십시오.

 

”15년간 소모적인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이총(귀무덤) 비명(碑銘) 정정 민원에 대해 <코무덤>으로 고치겠다고 결정해준 사천시 문화관광국 관계자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특히, 비명 정정 과정에서 도움을 주신 박삼중 스님, 한일문화연구소 김문길 소장님,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김영조 소장님,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 이윤옥 소장님, 부산카톨릭대학교 인문학연구소 연구위원 안수현 박사님, 사천자영고 25회 전 동창회장 김우광 씨, 동문 김민호 씨께도 감사 말씀드립니다.“

 

- 사천시 <코무덤> 뿐만 아니라 부안군 호벌치에 있는 ‘코무덤’ 관련해서도 <국민신문고>에 민원을 낸 것으로 압니다. 아울러 순천과 진도에도 코무덤 관련 연구를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전라북도 부안군 호벌치에도 <코무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곳은 코무덤만 있고 30년째 추모비와 안내판이 없어 방치되었습니다. 이곳도 2022년 1월 <국민신문고>에 민원을 내어 12월 말까지 추모비와 안내판을 설치하기로 하여 제작 중입니다. 순천시에도 (사)귀무덤봉환추진본부가 활동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순천지역은 정유재란 때 코가 잘린 곳이므로 (사)코무덤봉환추진본부로 정정해야 합니다. 또 진도문화원은 코로나19 돌림병 이전, 해마다 교토 코무덤 앞에서 “왜덕산 사람들의 교토 코무덤 평화제”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2022년 9월 진도국제학술회의에서는 ‘교토 귀무덤’이란 이름으로 업무협약(MOU)를 맺었는데 이는 잘못된 일입니다.“

 

- 끝으로 교토 코무덤을 비롯한 일본의 태도와 국내 학자들, 지방자치단체의 태도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임진ㆍ정유 침략전쟁에 참전한 일본군 후손들이 발행한 기록물은 대체로 자신들 선조의 공(功)은 부풀리고 과(過)는 축소하는 등 왜곡된 부분이 존재하므로 참고는 하되 코, 귀무덤의 판단 근거로 삼을 수는 없다고 봅니다. 게다가 얼마 되지도 않는 귀, 코무덤 선행연구 자료를 가지고 학계 제출보고서의 분량을 채워 <귀무덤>으로 오판하지 마시고 단 몇 줄만이라도 일본 국가지정 중요문서를 가지고 제대로 <코무덤>을 인식했으면 합니다.

 

거듭 밝히지만, 일본국가 지정 문서에 따르면 정유재란 시에는 코를 베었기에 귀와는 무관합니다. 따라서 정유재란 때 축조된 교토 무덤은 <코무덤>으로 불러야 합니다. 아울러, 지방자치단체 관리자는 지역 내에 있는 문화재에 대해 전문가 수준의 이해력으로 관리해야 합니다. 사천 선진리 <귀무덤> 위령비가 세워진 2007년부터 비명(碑銘)의 왜곡 문제가 계속해서 제기돼 왔지만, 그동안 개선하려는 노력이 별로 없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 지난 32년 넘게 ‘사천 귀무덤’으로 왜곡 보도해온 국내 언론에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1990년 박삼중 스님의 <코무덤> 유토 봉환과정에서 언론들은 일본이 왜곡하여 붙인 <귀무덤>의 이름을 고증 과정 없이 그대로 귀무덤으로 보도하기 시작한 지 32년째입니다. 한편, 이러한 왜곡을 바로잡기 위해 텔레비전 드라마나 기획 보도 그리고 국제학술희의 등 여러 경로로 노력을 해온 사람들이 있지만, 아직도 일본이 왜곡한 <귀무덤>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언론이 대부분입니다. 하루빨리 교토의 무덤을 <코무덤>으로 바로 잡는데 힘을 기울이고 더나아가 경남 사천시의 <코무덤> 위령비 역시 최근 <코무덤>으로 변경되었음을 널리 알려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앞으로 교토 코무덤을 국내로 봉환하려는 단체들에 대해 하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교토시 코무덤을 국내로 봉환하는 것은 일본의 잔학하고 부끄러운 과거를 우리 스스로 역사를 지워주는  행위이기 때문에 봉분을 그대로 두고 일본 자손 대대로 그들의 조상이 이웃 나라에 무슨 짓을 했는지 알도록 하는 증빙 자료로 남겨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해서 코무덤 원혼들이 봉분 위 수십 톤 무게의 돌덩어리에 눌린 채 이역 땅에 있게 할 수는 없기에 차선책으로 경주 천마총처럼 교토시 코무덤 봉분 옆에 구멍을 뚫어 봉분 속에 있는 순수 코무덤 유토만 봉환해오고 봉분은 그대로 유지 시키는 방법으로 교토시청과 협의를 해야 합니다.

 

국내로 봉환된 유토는 정유재란 때 희생된 지역에 나누어 안장하여 원혼들을 위로하고 다시는 이런 슬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역사 교육의 현장으로 삼아야 합니다. 아울러 코로나19 돌림병도 어느 정도 정리되어 가고 있으니 교토 코무덤 위령제를 지내온 나라 안팎 단체들과 뜻을 모아 함께 <코무덤> 위령제를 재개했으면 좋겠습니다.

 

 

최진갑 박사와 만나 사천시 <코무덤> 명칭 변경 과정을 소상히 듣고 까페에서 근거리에 있는 조명군총을 찾았다. 동지를 갓 넘긴 탓인지 짧은 저녁해가 <코무덤> 위령비 쪽으로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돌아보니 <耳塚>이라는 위령비 이름의 왜곡을 알리기 위해 기자 역시 일본 교토로, 사천 조명군총으로 뛰어다닌 시간이 어느새 10여 년을 훌쩍 넘었다. 악인(惡人)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공(戰功)의 징표로 삼기 위해 조선인의 코를 베어다 교토에 커다란 봉분의 <비총, 鼻塚, 하나즈카>을 만든 지 올해로 425년째다. 고향의 사랑하는 부모자식을 뒤로하고 먼 이국땅에 남아 떠돌아야 하는 원혼(冤魂)을 생각하면 기자 역시 가슴이 미어진다.

 

원혼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한없이 무기력해지지만, 최진갑 박사처럼 왜곡을 바로잡아가는 일에 팔을 걷어붙이는 사람이 있다면 왜곡된 역사는 400년 아니라 4,000년이 되어도 바로 잡을 수 있다는 용기가 샘솟았다. 우리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온갖 궂은 행정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고 왜곡된 역사의 한 페이지를 밝혀낸 최진갑 박사에게 크게 손뼉을 쳐 드리고 싶다.

 

 

이윤옥 기자 59yo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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