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 국립중앙박물관 청동기실에는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주거 생활과 생업 활동을 보여 주는 다양한 발굴품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설명카드를 하나하나 살펴보면 그 가운데 많은 유물이 부여 송국리 유적에서 출토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송국리 유적은 청동기시대 문화 전반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녔습니다.
부여 송국리 유적은 1974년 주민의 제보로 발견되었고 이듬해부터 본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발견 당시 일본 고고학계의 견해를 뒤엎을 만한 획기적인 자료가 수습되었고 이후 발굴에서도 새로운 자료들이 연이어 확인되는 등 역사ㆍ학술적 값어치를 인정받아, 1976년 사적(면적 546,908㎡)으로 지정되었습니다. 부여 송국리 유적 발굴과 연구 성과로 한국의 청동기시대를 바라보는 시각은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1호 돌널무덤의 발견
1974년 4월 국립박물관은 부여 초촌면 현지 주민의 제보를 받고 유적을 확인하기 위해 조사를 나갑니다. 조사팀은 판석 위에 큰 돌이 얹어져 있었다는 주민의 상세한 설명에 이미 도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표를 제거하고 덮개돌을 들어 올린 뒤 흙을 제거하다 보니, 예상과는 달리 동쪽 벽에서 화살촉들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같은 자리에서 요령식 동검, 곱은옥, 대롱옥이 발견되었고 반대편 서쪽 벽에서는 간돌검, 청동 끌이 발견되었습니다. 모두 33점으로, 이것은 발굴한 사람의 표현 그대로 놀라운 수확이었습니다.
당시 요령식 동검은 한반도에서 출토된 예가 극히 드물었을 뿐만 아니라 ‘전형적인 형태’가 ‘청동기시대 무덤 안에서’ 나온 상황은 처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계기로 “한반도에는 진정한 청동기 문화가 없었으며 초기철기시대 한국식 동검은 간돌검의 모방”이라고 주장했던 일본 고고학계의 주장이 잘못된 것임이 밝혀졌습니다. 요령식 동검이 발견된 이 무덤은 부여 송국리 유적 1호 돌널무덤으로 이름 지었으며 일괄 출토품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1층 고조선실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청동기시대 송국리 문화의 정립
부여 송국리 유적은 이 돌널무덤 발견 이후인 1975년부터 본격적인 발굴 조사가 이루어집니다. 최근까지 20여 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청동기시대 마을과 농경 생활을 보여 주는 ‘송국리 문화’라는 개념이 새롭게 정리되었습니다. 청동기시대가 기원전 15세기 무렵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때 후반부를 대표하는 문화(대개 기원전 9세기부터 기원전 5세기 정도까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역적으로는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 영남의 경우 동남부를 뺀 지역에서 주로 나타납니다. 이 지역에서 송국리 문화가 유행했을 때 한강 유역이나 강원도 등지에서는 구멍무늬 토기가 특징인 기존 문화가 지속된 것으로 보입니다.
송국리 문화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먼저 송국리 문화의 대표적인 유물로는 송국리식 토기가 있습니다. 새김 돋은띠무늬 토기, 구멍무늬 토기 등 입이 벌어지는 바리 형태의 이전 시기 토기와는 다르게 입이 오므라들었다가 살짝 바깥쪽으로 벌어지는 형태입니다. 생업에서 농사가 큰 부분을 차지하고 수확량이 많아지면서 보관을 위해 입이 오므라드는 형태의 토기가 주로 쓰인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송국리 유적에서는 실제로 이런 형태의 토기에 쌀이 보관된 채로 발견되기도 하였습니다.
농경의 발달로 새로운 도구들이 만들어집니다. 수확 도구로는 두 개의 날로 효율성을 높인 삼각형 돌칼, 낫이 새롭게 등장합니다. 이전 시기에는 보이지 않던 홈자귀 등 나무 가공 도구들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당시 농경 도구를 나무로도 많이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 때 유적에서는 목제 절굿공이, 고무래 등이 발견됩니다.
검과 화살촉의 특징은 1호 돌널무덤 출토품을 살펴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이전 시기 검과는 달리 송국리 문화 단계에서는 간돌검의 손잡이 부분이 오목한 단(段) 없이 매끈한 형태[一段柄式]를 띱니다. 화살촉은 몸체 단면이 편평하기보다 주로 마름모꼴입니다. 이에 관해서는 마름모꼴이 살상력을 더 높인 형태라는 연구가 있습니다. 본격적인 정착 생활로 이전 시기보다 집단 간 갈등이 심화되었으리라 예상해 볼 수 있어서 화살촉에도 무기로서의 기능을 강화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하지만 기능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 좀 더 면밀한 검토가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살림터(주거지)도 매우 독특합니다. 청동기시대에 처음으로 원형 집자리가 나타납니다. 면적이 전반적으로 줄어들고 내부에 조명, 난방, 조리와 관련된 화덕이 보이지 않습니다. 화덕이 보이지 않는 것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지만, 집자리 면적이 줄어든 것은 농경사회에 들어서면서 생산ㆍ소비 단위에 변화가 나타났기 때문으로 추정됩니다. 면적이 큰 집에서 여러 세대가 공동 거주하던 방식에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송국리 유적이 말해 주는 청동기 사회
송국리 유적이 말해 주는 청동기시대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요? 송국리 유적에서는 현재까지 100기 이상의 집자리가 확인되었습니다. 이처럼 대규모로 마을이 이루어진 것은 송국리 문화의 또 다른 특징이기도 합니다. 농경과 정착 생활로 점차 마을 간 규모에서는 격차가 벌어지고 집단 안에서도 지배자가 생기는 등 계층 차가 나타납니다. 1호 돌널무덤도 그런 자료 가운데 하나입니다. 송국리 유적에서는 대형 주거지가 몇 기 발견되었는데 이는 지배자의 주거지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한 마을에는 길이 20m 안팎의 대형 굴립주 건물(堀立柱 建物, 바닥이 지면 또는 지면보다 높은 건물)이 세워졌습니다. 바닥면이 지면보다 높은 고상식(高床式)으로 추정되는데 이를 둘러싼 나무 울타리와 망루로 추정되는 건물도 같이 발견되어 집회 공간이나 생산물 저장소 등 마을 주민이 공동으로 사용한 특수 목적의 장소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생활 영역과 무덤 영역은 분리되었고 1호 돌널무덤처럼 상위 계층의 무덤은 주변 평야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마을 인근 언덕 위에 별도로 마련되었습니다. 1호 돌널무덤에서 출토된 옥과 청동기로는 전문 장인의 존재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송국리 유적의 발굴로 우리는 청동기시대 마을 전경과 농사를 지으면서 일상을 살아가던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상상해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송국리 유적의 발굴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농경지가 발견되지 않았고 마을 전체 규모도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170m가량 이어지는 기둥구멍의 정체도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송국리 유적의 발견과 발굴 성과로 새로 쓰인 청동기시대 사회와 문화상은 완성형이 아닙니다. 송국리 마을의 모습을 밝히는 일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이진민)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