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높고도 어려웠던 자리, 조선 왕비의 세계

2024.01.01 10:56:05

《왕비로 산다는 것》, 신병주, 매일경제신문사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왕비로 산다는 것.

뭔가 제목에서부터 잔잔한 엄중함이 느껴지는 ‘왕비’라는 자리는, 참 높고도 어려웠다. 한 나라의 왕비 역할을 잘 해낸다는 것이 쉽지 않았음은 고금의 예에서 잘 알 수 있지만, 복잡한 정치 셈법이 얽혀 있었던 조선의 왕비는 특히 더 어려웠다.

 

이 책 《왕비로 산다는 것》의 지은이 신병주는 주부를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에서 ‘주부들이여 왕비가 되자’라는 주제의 특강 요청을 받고, 왕비를 주제로 한 강의를 할 수는 있지만 제목을 ‘왕비로 산다는 것’으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해 실제로 그렇게 강의했다고 한다.

 

 

그가 보기에도 조선의 왕비는 동화나 사극 속 왕비처럼 아름답고 화려하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누릴 수 있는 것보다 제약이 더 많았고, 엄격한 궁중에서 비슷한 일상을 살아내야 하는 힘든 직업이었다.

 

(p.8-9)

왕비는 권력과 부가 보장되는 지위라기보다 정치적 상황에 휩쓸려야 했고 답답한 구중궁궐에서 왕의 내조에 전념하는 역할을 요구받는 위치에 있었다.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 뒤에 있는 인공 정원 아미산이나 궁궐 후원을 산책하는 일 또는 궁궐에서 독서를 하는 것 정도가 그나마 왕비의 숨통을 터주는 일이었을 것이다.

 

임금의 내조에 전념하면서, 궁 안의 후궁과 사대부가의 여인들을 관리하면서, 왕위를 이을 대군도 출산해야 하고, 또 친정 집안이 자칫 나쁜 일에 연루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해야 하는 막중한 ‘왕비’라는 자리. 차기 대통을 이을 임금의 어머니라는 사실만으로 좋든 싫든 권력투쟁의 중심에 놓이게 되니 그 부담감도 엄청났을 것이다.

 

이 책은 이처럼 막중했던 왕비의 소임을 감당하며 살다 간 조선의 왕비들을 ‘새 왕조의 혼란 속 왕비들’, ‘비운의 왕비와 여걸의 등장’, ‘연속되는 폐비와 반정의 시대’, ‘왜란과 호란, 혼란기의 왕비들’, ‘당쟁과 명분의 수단이 된 왕비들’, ‘노론과 소론 사이 지켜야 했던 자리’, ‘근대의 격동기, 마지막 궁중의 모습’으로 7부에 걸쳐 소개한다.

 

그 가운데 가장 마음에 남는 이들은 중종의 비로 살다 간 3명의 왕비다. 사극 『7일의 왕비』로 알려진 중종의 첫 번째 비 단경왕후 신씨, 인종을 낳고 산후 후유증으로 7일 만에 세상을 뜬 장경왕후 윤씨,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렴청정을 하며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문정왕후 윤씨다.

 

단경왕후 신씨는 중종과 금슬이 좋았으나 아버지 신수근이 연산군의 처남으로 최측근 세력이었기에 중종반정 이후 7일 만에 폐위당했다. 어쩔 수 없이 강제로 헤어진 두 사람은 오랜 세월 서로를 그리워했다. 마음을 자못 먹먹하게 하는 것은 중종이 승하 직전에 단경왕후를 보고 싶어 했음이 나타난 1544년 11월 15일 《중종실록》의 기록이다.

 

(p.150)

사알(왕명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던 정6품 잡직) 이수천은 승정원에 “안으로 들어오는 궁인이 있어 통화문을 시간이 지나도록 열어놓았기에 들어온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모른다고 했는데, 들으니 상이 임종 때에 폐비 신씨를 보고 싶어 했기 때문에 들어온 것이라고 했습니다”라는 기록에서 죽는 순간에도 단경왕후를 찾았던 중종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폐비 신씨의 뒤를 이어 왕비가 된 장경왕후 윤씨는 어질고 총명했으나 출산 후유증으로 산후 7일 만에 25살의 젊은 나이로 승하했다. 이때 장경왕후를 간호했던 의녀가 바로 ‘대장금’이었다. 당시 장금의 도움으로 무사히 출산한 궁중의 여인이 여럿이었고, 인종을 무사히 출산한 것도 그녀의 공로가 컸지만 결국 장경왕후가 죽으면서 처벌될 위기에 처했다.

 

(p.159)

왕비의 출산 후 사망은 장금에게도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장금에 대한 처벌 논의가 많았지만 중종은 장금의 공도 크다면서 처벌만은 면하게 해주었다. “의녀인 장금은 호산(왕실 비빈의 출산을 돌보는 일)하여 공이 있었으니 당연히 큰 상을 받아야 할 것인데, 마침내는 대고(왕비의 승하)가 있음으로 해서 아직 드러나게 상을 받지 못하였다. 상은 베풀지 못한다 하더라도 또한 형장을 가할 수는 없으므로 명하여 장형(죄인의 볼기를 큰 형장으로 치던 형벌)을 속바치게 하였으니, 이것은 그 양단을 참작하여 죄를 정하는 뜻이다. 나머지는 모두 윤허하지 않는다.”고 한 기록이 대표적이다.

 

이런 중종의 엄호로 장금은 무사히 살아남았고, 선조 때까지 의녀로 활약했다. 사극에서 ‘궁중 음식의 달인’으로 알려진 대장금에게 이렇듯 인생의 위기가 있었으며, 그때 공을 참작한 임금의 사려 깊은 처분이 큰 힘이 되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중종의 세 번째 왕비로, 아들 명종이 즉위한 뒤 큰 권력을 누렸던 문정왕후는 ‘태릉’에 잠든 지금까지도 여걸다운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녀가 잠든 무덤의 이름이 하나의 지명이 되었으니 말이다. 아들 명종의 무덤인 강릉은 태릉 옆에 조성되어 모자는 죽어서도 영원히 같이 있게 되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왕후의 자리. 정치권력에 따라 내쳐지기도 하고, 아이를 낳다 죽기도 하고, 수렴청정하며 만인지상의 권력을 누려볼 수도 있는 자리. 왕비의 세계는 위험하지만, 매력적이었고, 그래서 수많은 사람이 도전했지만 그만큼 힘들어했다.

 

이 책은 ‘왕비의 세계’를 쉽고 재미있게 풀어주는 책이다. 조금 건조한 문체가 아쉽지만, 그만큼 속도감 있게 읽힌다. 조선판 왕비의 세계, 화려하지만은 않았던 그 세계를 탐험해 보고 싶은 독자라면 일독을 권한다.

 

 

우지원 기자 basicfor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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