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때 일제의 치밀한 조선침략 과정

2024.01.25 11:43:23

《일본의 근대사 왜곡은 언제 시작되는가》, 박경민, 밥북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255]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2022년에 《한일 근대인물 기행》 책을 냈던 고교동기 박경민이 이번에 《일본의 근대사 왜곡은 언제 시작되는가》라는 책을 냈습니다. 《한일 근대인물 기행》이 근대를 살다 간 한일의 대표적인 인물 39인의 삶을 통하여 한일 근대사를 들여다본 것이라면, 이번에 낸 책 《일본의 근대사 왜곡은 언제 시작되는가》는 고종 시대의 두 사건을 통하여 그 당시 일제의 치밀한 조선 침략을 들여다본 책입니다. 경술국치 때까지 일제의 조선 침략 사건이 많겠지만, 경민이는 그 가운데에서도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이 일본에 의해 강제로 개항하게 된 당시의 경위를 1편으로 다루었고, 청일전쟁 직전에 일제가 벌인 교활한 침략을 2편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표지 그림을 보니 높은 파도 아래에 고종이 천진난만하게 앉아있는 것이 파도가 금방이라도 고종을 집어삼킬 듯합니다. 이는 고교동기 신일용이 그려준 것으로, 일용이는 일본의 풍속화가 가츠시카 호쿠사이(1760 ~ 1849)의 대표작품 후가쿠 36경 가운데 하나인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를 토대로 그렸습니다. 후가쿠 36경은 다양한 지점에서 후지산을 놓고 그린 그림입니다. 일용이는 일제에 의해 금방이라도 잡아먹힐 듯한 조선의 상황을 잘 표현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경민이는 위 두 편의 주제 가운데 청일전쟁 직전에 일제가 벌인 교활한 침략 행위를 좀 더 비중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2편의 제목은 ‘경복궁은 알고 있다’입니다. 경복궁은 알고 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이는 청일전쟁 직전에 일제가 경복궁으로 무단 침입한 것을 말합니다. 그동안 역사학계에서는 일본의 주장, 곧 조선군이 먼저 일본군에게 총격을 가해 벌어진 우발적 사건이라는 일본의 주장에 별로 반박하지 않았는데, 경민이는 이 사건이 일제가 치밀하게 벌인 경복궁 침입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2편의 제목을 ‘경복궁은 알고 있다’라고 잡은 것이군요.

 

사실 저는 학교 다닐 때 국사 시간에 일본군의 경복궁 침입에 대해 별로 배운 게 없어서, 일제의 경복궁 침입 사건은 경민이 책을 통해서 비로소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독후감은 이에 관해 얘기해 보고자 합니다. 청일전쟁은 동학혁명 때 조선에 출병한 청나라와 일본 군대가 충돌하면서 시작한 전쟁 아닙니까? 학교 다닐 때 동학혁명은 고부군수 조병갑의 수탈에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동학교도들이 들고일어난 혁명으로 배웠습니다.

 

아니다. 지금이야 ‘동학혁명’이라고 하지만, 내가 중고등학교에서 배울 때 처음에는 ‘동학란’이라고 배우지 않았습니까? 그때까지도 역사학계에 식민사관이 청산되지 않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조병갑의 수탈은 부글부글 끓는 농민들의 분노와 원망에 불을 댕긴 것일 뿐,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민씨 척족 정권 자체가 이미 썩을 대로 썩었습니다. 일본영사 우치다가 본국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에게 보낸 전문 일부를 인용해 봅니다.

 

“동족 중에도 가장 득세하고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자는 그 위치에 걸맞은 지식ㆍ재능이 있는 인물이 아니라, 오로지 국왕이나 왕비에게 다액의 재물을 진헌하는 자입니다. 진헌을 하지 않는 사람은 설사 유용한 인물이라고 하여도 상당한 관직을 받는 일이 없습니다. 민씨 일족 내에서조차 이러할 지경인데, 그 외의 사람이 조정의 관리가 되려고 하는 자는 단지 국왕ㆍ왕비뿐만 아니라 민씨 일족에게도 역시 뇌물을 바쳐야 합니다. 중앙 정부의 관리뿐 아니라 관찰사를 비롯해 부ㆍ현ㆍ주ㆍ군 등의 지방관을 선임하는 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어진 관리들은 자취를 감추고 간신들만 진급해 백관유사의 직이 모두 쥐 같은 무리로 충만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무리들은 재직 중 그 직권을 남용해 탐욕을 멋대로 하고 공공연히 뇌물을 받고 부정을 행하며 그 위세에 거역하는 사람은 잔인하고 혹독한 조치에 처해도 돌보는 자가 없습니다.”

 

조병갑도 뇌물 바치고 군수가 되었기에 본전 뽑으려고 농민들을 쥐어짜다가, 동학혁명의 뇌관을 건드렸을 것입니다. 이렇게 조정이 썩을 대로 썩었으니, 관군은 무기가 변변찮은 농민군에도 나가떨어지는 것이지요. 동학군이 이씨 왕조의 발상지인 전주까지 점령하니 고종은 화들짝 놀라, 1894년 5월 18일(음 4. 14.) 새벽에 대신회의를 소집합니다. 청군 파병 요청건을 논의하려는 것이지요.

 

여기서 민씨 척족의 실세인 병조판서 민영준을 제외한 나머지 대신들은 반대합니다. 나머지 대신들은 청군을 불러들이면 일본군의 출병을 막을 수 없고, 그러면 국내에서 양쪽 군대가 충돌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파병 요청 대신 난이 일어난 근본 원인을 제거하고 백성들을 타이르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라고 합니다. 나머지 대신들은 그래도 보는 눈이 완전히 썩지는 않았군요.

 

그런데 받아쳐 먹은 것이 워낙 많은 민영준은 청군 파병을 은밀히 계속 추진하였고, 결국 고종과 뒤에서 고종을 조종하는 민비는 대신회의를 거치지 않고 파병을 결정합니다. 경민이는 고종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고종은 상황 판단력, 정책 추진력 등 국가경영 능력에 문제가 많은 왕이었다. 특히 세계사적 대전환기를 대처해 나갈 일국의 왕으로서는 결정적으로 겁이 많고 유약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러다 보니 국가 정책이나 중대사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뜻과 다르게 결정되는 경우, 공식적으로는 이를 용인하고 나서 자신의 본심은 비선라인이나 밀사를 통해 별도로 추진하고는 했다. 또한 독자적인 판단력이 부족해 왕비의 판단이나 조언이나 점술 등에 상당히 의지했다.”

 

조선으로서는 제국주의 열강들이 호시탐탐 조선을 노릴 때 이런 덜떨어진 왕을 가졌다는 것이 불행입니다. 조선은 하필이면 국가 위기 때 선조(임진왜란), 인조(병자호란), 고종 같은 임금이 왕으로 있었는지요. 지나간 역사지만 참 안타깝습니다. 청나라 군대가 들어오자, 역시 예상대로 일본군이 들어옵니다. 일본은 제물포조약을 억지로 갖다 붙이며, 일본공사관과 거류민 보호를 위한다며 밀고 들어온 것이지요. 청나라는 난징조약에 따라 조선 파병을 일본에 통보하는데, 일본은 이미 그 전부터 첩보능력을 동원하여 사태를 파악하고는 청이 통보하기 이전에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니까 조정은 당황하여 상황이 안정되었으니 철군해달라고 호소합니다. 사실 동학군은 자기들이 관군을 무찌르고 전주성까지 점령한 것이 자칫 외세의 침략의 빌미를 제공할까봐 전주화약을 맺고 해산하였습니다. 그러니 조정으로서는 당연히 철군을 요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은 이미 청나라를 배제하고 조선을 자신의 세력권에 둘 생각이었으니, 조선의 요청에 콧방귀만 뀔 뿐이지요. 일본은 처음부터 이럴 계획이었으니 청이 1,600명의 군사를 파병함에 반하여 일본은 4,200명이나 파병하였습니다. 그러고도 공사관과 거류민만 보호하러 왔다는 말이 그렇게 천연덕스럽게 나오나요? 경민이는 이때 상황을 “외무독판 조병직은 끊임없이 말꼬리를 잡고 변명으로 일관하는 오토리에게 신병 중임에도 불구하고 애처로울 정도로 계속해서 철군 요청을 하고 있었다.”라고 합니다. 정말 애처로워서 못 보겠습니다.

 

청나라는 이런 일본의 행동에 이제 조선의 상황은 종료되었으니 서로 철군하자고 합니다. 당연히 일본이 말을 안 듣겠지요? 그러면 이번에는 어떤 구실을 댈까요? 일본은 내란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내정개혁이 필요하고, 청이 조선을 속국화하여 조선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어서 군대 주둔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우리나라를 위해주다니 눈물겹군요. “야! 이XX들아!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할 것이지, 니들이 무슨 상관이냐! 이 쪽바리XXX!” 그리고 또 화나게 하는 것은 자신은 조선을 자주독립국으로 알고 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조선이 사실은 청의 속국이면서 마치 자주독립국인 양 행세하여 일본 정부와 천황을 속였으니, 조선이 응징받아 마땅하다네요.

 

이제 일본은 조선은 안중에도 없이 청나라를 배제하는 계획을 은밀히 진행시켜 나갑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경복궁 점령입니다.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을 협박하여 청일전쟁의 명분을 받아내려는 것이지요. 그동안 일본은 경복궁 진입은 조선병의 발포로 우연히 발생한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일청전사(日淸戰史)》에 이렇게 나옵니다.

 

“인민의 소요를 피하기 위해 특히 23일 새벽 이전에 위의 여러 군대를 경성으로 투입하였는데, 진격 도중 왕궁 동쪽을 통과하려고 하자 왕궁 수비병과 그 부근에 주둔하던 조선병이 돌연 우리 군대를 향해 사격해서 우리 군대 또한 급작스럽게 응사 방어하였다. 또한 이 규율 없는 조선병을 경성 밖으로 물리치지 않는다면, 언제 어떤 사변을 다시 일으킬지 예측할 수 없으므로 마침내 왕궁으로 들어가 조선병의 사격을 무릅쓰고 그들을 점차 북쪽 성 밖으로 내쫓고 일시 그들을 대신하여 왕궁의 사방을 수비하였다. (중간 줄임) 이어서 국왕에게 알현을 청해 양국 군대의 예기치 못한 충돌로 심려를 끼친 점 사죄하였으며, 또한 맹세코 옥체를 보호하여 결코 위해가 없도록 할 것을 아뢰었다.”

 

그러나 1994년 후쿠시마 현립도서관에서 《일청전사》 초안이 발견됨으로써 일본이 공식적인 《일청전사》를 변조하였음이 드러납니다. 《일청전사》 초안의 해당 부분은 아예 제목이 <조선왕궁에 대한 위협적 운동계획>이라고 나옵니다.

 

몇 부분을 인용하면 “제4중대 – 오전 3시 반 출발해 입경하고 친군장위영을 개방하여 점령하고, 또한 광화문 앞 교통을 차단하는 것을 맡는다.”, “왕궁의 모든 문이 폐쇄된 경우에는 처음부터 파괴하고 침입할 각오이며, 이를 위해 보병 중위 카와치 노부히코에게 제5중대 2분대를 딸려 공병소대와 함께 문을 여는 일과 그 문을 수비하는 일을 맡겨야 하므로 이 부대를 선두로 한다.” 그리고 초안 중에도 제3 초안에는 “국왕을 포로로 삼아”, “이 핵심 동장으로 남아있는 것은 단지 왕궁 내부를 수색하여 국왕을 수중에 넣는 데 있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화가 뻗쳐 책을 던져버릴 뻔했습니다. 일본은 이렇게 뻔뻔하게 경복궁을 점령하고도, 조선을 협박하여 조일잠정합동조관을 체결합니다. 그리고 조관 제5조에 이렇게 넣습니다. “7월 23일 조선군과 일본군의 충돌은 우연한 사건이며 그 책임을 추궁하지 않는다.” 에휴! 힘없는 우리를 탓해야지, 그놈들 탓해야 무슨 소용인고...

 

일본은 이렇게 경복궁을 점령한 뒤 대원군을 포섭합니다. 그리고 고종과 민비에게는 대원군에게 개혁정무 일체를 위임하라고 강요합니다. 그리고 조선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조선군 병영을 접수하고는 일본군 지휘본부를 경복궁 경회루에 둡니다. 또한 7월 25일 대원군으로부터 청군축출의뢰서를 받아 청군을 공격할 확실한 명분을 얻습니다.

 

이렇게 경복궁 침입 목적을 달성한 일본은 아직 축출의뢰서를 손에 쥐기도 전인 그날 새벽 아산만 풍도에서 청 군함에 대한 공격을 개시합니다. 이로써 우리나라 땅에서 남의 나라 군대들이 싸움을 벌이는 청일전쟁이 시작됩니다. 우리나라 땅과 백성이 어떻게 되건 말건... 그러니 이렇게 치밀하게 준비한 일본을 청나라는 이길래야 이길 수가 없었지요. 경민이는 책의 마지막을 이렇게 맺습니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가정은 없다고들 말하지만 동학 농민군의 1차 봉기 때 농민군이 주장한 폐정 개혁을 조선 조정이 수용했거나, 전주 함락 시에도 농민군과의 협상을 통해 개혁안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조선이 자체적으로 움직였더라면 역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지 않았을까?”

 

그렇습니다. 진정 백성을 위하고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지도자였다면, 외국군을 우리나라에 불러들이는 그런 어리석음을 절대 저지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 역시 그런 아쉬움에 가슴 두들기며 책을 덮습니다. 나는 이 책 덕분에 청일전쟁의 이면에 그동안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어 고맙다는 생각이 들면서 한일근대사 3탄이 기다려집니다. 한일근대사의 이면을 파헤치면서 멋진 제2의 인생을 살아가는 친구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양승국 변호사 yangaram@lawlogo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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