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106년 전(1919년) 오늘(4월 11일)은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태어난 날입니다. 1919년 3ㆍ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나라 안팎 애국지사들 사이에선 독립운동을 확대하기 위해 임시정부를 수립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특히 상해임시정부와 한성임시정부(漢城臨時政府), 노령임시정부(露領臨時政府) 등이 설립되어 활동했습니다, 그 가운데 상해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을 구성하고 각도 대의원 30명이 모여서 임시헌장 10개 조를 채택하였으며, 이후 한성임시정부와 노령임시정부를 통합하여 명실상부하게 우리 겨레의 임시정부로 발돋움했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초창기에 여러 어려움이 많았지만,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일어나자,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해 전폭적인 지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일제의 반격으로 상하이를 떠나게 되었고, 뒤이어 일어난 중일전쟁(1937)으로 상하이[上海, 1919]→항저우[杭州, 1932]→전장[鎭江, 1935]→창사[長沙, 1937]→광둥[廣東, 1938]→류저우[柳州, 1938]→치장[綦江, 1939]→충칭[重慶, 1940] 같은 곳으로 옮겨가며 험난한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지요.
특히 임시정부는 충칭시기에 광복군을 창설하고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과 독일에 각각 선전포고를 했으며, 군대를 연합군의 일원으로 미얀마ㆍ사이판ㆍ필리핀 같은 곳에 파견하였습니다. 또 1945년에는 국내진입작전의 하나로 국내정진군 총지휘부를 설립하고 미군의 OSS부대와 합동작전으로 국내에 진입하려는 계획을 진행하던 중 8·15광복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임시정부 지도부는 미군정이 인정하지 않는 바람에 개인 자격으로 입국할 수밖에 없었고, 국내의 혼란으로 임시정부의 내각과 정책은 계승할 수 없었지요. 하지만, 헌법 전문에 있는 것처럼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우리나라 독립과 건국의 분명한 바탕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