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맥주는 1잔만 먹어서 운전하기에는 지장이 없었다. 서울 시내 같으면 운전할 엄두를 내지 못하지만 여기는 시골이고 또 집에까지 골목길로 가면 2km 정도에 불과하므로 염려할 것이 없었다. 집에 도착하여 대문을 여는 순간, K 교수는 “아차, 너무 늦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야간수업은 밤 9시 20분이면 끝난다. 보통 때는 강의 끝나고 손 씻고 바로 퇴근하면 9시 40분에 집에 도착하는데, 오늘은 12시가 넘어버렸으니, 아내는 무슨 일이 있나 걱정이 되었을 것이다. 아내에게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K 교수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자지 않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아내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어본다.
“왜 이렇게 늦게 와요? 무슨 일이 있었어요?”
“아, 야간 강의 끝나고 원고를 쓸 게 좀 있어서 늦었어요.”
“이상하네. 내가 연구실로 전화해도 안 받던데. 두 번이나 전화했는데...”
“그래요? 왜 전화가 안 울렸을까? 아, 알았다. 내가 강의하는 동안에 연구실 전화를 학과 사무실로 돌려놓았는데,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지 않아서 그런 모양이지. 조교는 9시 반이면 퇴근하니까.” K 교수는 순간적으로 둘러대었다.
아내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이 남자가 이상하다’라는 표정으로 K 교수를 쳐다보았다. K 교수는 아내의 시선을 피하였다. 아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실로 들어가 버렸다. K 교수는 속으로 ‘휴우....’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당시는 손말틀(휴대폰)이 보급되기 전이라서 이러한 거짓 변명이 가능했다.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하기는 했지만, K 교수는 찜찜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아내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며칠 후 K 교수는 경상대 교수 세 사람과 함께 점심을 먹으러 미녀식당으로 갔다. 이제 봄은 점점 깊어지고 기온은 점점 오르고 있었다. 식당 입구 오른쪽에 라일락 나무가 두 그루 서 있었다. 나뭇가지 끝부분에 연보라색 라일락꽃이 활짝 피어 있고, 진한 라일락 향내가 진동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라일락(lilac)을 이름이 영어라서 외래종이라고 잘못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보는 라일락은 ‘수수꽃다리’라는 예쁜 우리말 이름을 가진 토종 나무다. 지금은 잘 먹지 않지만, 곡식 가운데 ‘수수’라는 잡곡이 있다. 수수꽃다리의 꽃차례(줄기나 가지에 꽃이 달리는 모양)가 수수꽃을 닮아서 ‘수수꽃 달리는 나무’라고 부르다가 수수꽃다리가 되었다고 한다.
라일락은 물푸레나무과에 속하는 낙엽 관목으로서 봄에 향기가 진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꽃은 홑꽃 또는 겹꽃으로 짙은 자색, 연보라색, 푸른색, 붉은색, 분홍색, 흰색, 옅은 회색, 노란색 등 여러 가지 색을 띠는 수백 가지의 변종이 있다. 라일락은 잎이 하트 모양인데, 잎을 따서 이빨로 깨물어 보면 매우 쓴 맛이 난다. 옛날 가수 현인이 노래한 ‘베사메무초’에 나오는 리라(lilas)꽃은 라일락을 가리키는 프랑스어 말이다.


네 사람은 베란다에서 음식을 주문하였다. 차림표에는 여러 가지 이름의 스파게티가 있었다. 한 사람은 모짜렐라 스파게티, 두 사람은 김치 스파게티, 그리고 K 교수는 불고기 스파게티를 시켰다. 요즘에는 서양 음식을 토종 음식과 결합하여 우리나라 사람 입맛에 맞게 변형시킨 음식이 나타났다. 이른바 ‘퓨전 음식’이 등장했는데, 한식과 양식을 섞어서 만든 새로운 요리법이 유행이다.
그날은 점심시간이었지만 손님이 많지 않았다. 미스 K는 네 사람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 와서 한참 동안 같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화의 주제는 스파게티였다. 마침, 이탈리아에서 공부하고 미식가로 소문난 ㅇ 교수가 끼어 있어서 대화를 주도하였다. K 교수는 미식가도 아니고 미각이 무딘 사람이었기 때문에 요리 종류를 잘 몰라서 잠자코 듣기만 하였다.
스파게티는 원래 이탈리아에서 발달한 음식인데, 보통 사람들은 스파게티와 파스타를 혼동한다고 한다. 미녀식당의 상호인 ‘파스타 밸리’에서 파스타는 밀가루 반죽을 뜻한다. 파스타는 밀가루를 반죽으로 만들어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만든 음식을 말한다. 쉽게 말하면 밀가루 반죽 요리의 총칭이라고 말할 수 있다.
스파게티는 파스타의 한 종류로서 국수 면처럼 만든 것을 말한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길고 단면이 동그랗게 말린 형태의 파스타를 스파게티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파스타가 스파게티의 상위 개념이라고 보면 된다. 파스타의 종류는 뜻밖에 많다. 이탈리아에는 파스타가 약 200가지 그리고 스파게티가 약 30가지나 있다고 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