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진심이었던 조선 사람들

  • 등록 2025.10.20 12: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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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상들은 얼마나 책을 좋아했을까?》, 마술연필, 보물창고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다.

날씨가 좋은 만큼, 책 한 권을 들고 밖에 나가 읽으면 그만한 호사가 없다. 책은 읽고 또 읽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 참 좋은 벗이다.

 

책을 좋아하는 것도 일종의 성향이라, 옛날에도 책은 호불호가 갈리는 편이었다. 책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사람도 많은가 하면, 책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도 많았다. 아동청소년문학기획팀 ‘마술연필’이 쓴 이 책, 《우리 조상들은 얼마나 책을 좋아했을까?》에는 옛사람 가운데 책을 유난히 아끼고 좋아했던 이들의 모습이 차곡차곡 담겨있다.

 

 

책에 소개된 세종대왕, 신사임당, 유희춘, 허균, 김득신, 이덕무, 조신선, 정약용, 김구 가운데 ‘집을 도서관으로 만든 책 사냥꾼’, 유희춘의 이야기가 퍽 흥미롭다. 유희춘은 1513년 해남에서 태어나 간신들의 모함으로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미암일기》를 남긴 조선의 문인이다.

 

그는 학식이 높기로도 이름났지만, 한양의 으뜸 책 수집가로 더 유명했다. 한번 마음먹은 책은 조선 팔도를 뒤져서라도 손에 넣고 마는 집념이 있었다. 그가 모은 책은 대략 4천 권쯤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에도 책 4천 권을 모으기가 쉽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대단한 수집가인지 알 수 있다.

 

지금처럼 출판과 유통이 원활하지 않았던 조선시대에 책을 모으는 방법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친구에게 책을 빌려 한 자씩 베껴 쓰기도 하고, 중국에 가는 사신들을 통해 진귀한 책들을 주문하기도 하고, 운이 좋으면 임금에게 책을 하사받기도 했다.

 

(p.31)

유희춘은 마당에 산처럼 쌓아 놓은 책 무더기를 이리저리 들추며 꼼꼼히 책 목록을 적었습니다. 평생을 바쳐 모은 귀한 책들을 보자니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른 것 같았습니다. ‘『논어』 일곱 권은 임금님께서 하사하신 것이고 …… 『동국통감』 쉰여섯 권은 전주 이 대감 댁에서 빌려 베꼈고, 『동문선』 일백쉰여섯 권은 책쾌를 시켜 온 나라를 뒤져 모았지. 그리고……’

 

이렇듯 책 모으기에 열중이던 그는 명종 대에 간신들의 모함에 휘말려 제주도로 유배를 떠났다. 그러나 그가 학문을 가르쳤던 선조가 즉위하자 유배에서 풀려나 임금을 알현할 수 있었다. 유희춘은 선조의 스승 시절, 수많은 책 속에서 광활한 역사와 훌륭한 임금들의 이야기를 선조에게 들려주었고, 선조는 그때부터 책에 재미를 붙여 어딜 가나 책을 가지고 다녔다.

 

선조는 유희춘에게 하고 싶은 일이 있는지 물었고, 유희춘은 그동안 많은 책을 읽으며 발견한 오류를 바로잡아 새로 펴내고 싶다는 소망을 말했다. 그 뒤 유희춘은 선조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책 펴내는 사업에 몰두했고, 그가 고친 《주자대전》은 선비의 영원한 고전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뿐 아니라 거의 10여 년 동안 일기를 써서 남겼으니, 바로 《미암일기(眉巖日記)》다. 이 일기에는 그가 읽고 모은 귀한 책들이 기록되어 있어, 가히 ‘독서 일기’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단순히 책을 많이 읽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일기를 쓰며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려고 노력한 흔적을 알 수 있다.

 

조선의 책 사기와 빌리는 문화를 설명한 부분도 흥미롭다. 오늘날의 서점이라 할 수 있는 ‘서사’는 책을 만들고 파는 일을 나라가 통제한 까닭에 활성화하지 않았다가, 조선 후기에 들어 조심스럽게 생겨나기 시작했다. 조선 영조 시대, 오늘날의 서소문에 ‘약계책방’이, 남원에 ‘박고서사’라는 서사가 있었다고 한다.

 

서점에 해당하는 것이 ‘서사’라면, 책 대여점에 해당하는 것이 ‘세책방’이었다. 책값이 워낙 비쌌기에 서사보다는 저렴하게 책을 빌려볼 수 있는 세책방이 인기가 많았다. 조선시대 세책방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들을 사극으로 그려내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 조선 후기에 등장한 ‘책쾌’, 곧 ‘책 장수’로 이름난 조신선도 있었다. 오늘날의 표현으로는 ‘책 방문 판매원’이라 할 수 있는 책쾌는 세책방이나 개인적으로 책을 주문하는 손님들에게 책을 팔았고, 귀한 책을 찾아 팔기 위해 전국을 누볐다.

 

(p.79)

“조신선이라는 책쾌는 붉은 수염에 농담을 잘했고 눈에서는 번쩍거리는 빛이 났다. 책에 대해서라면 모르는 것이 없어서 마치 군자와 같았다.” ㅡ 정약용의 『여유당전서』 중에서

 

그의 이름은 ‘조생’이었지만, ‘조신선’이라 불릴 정도로 신출귀몰했다. 책을 팔러 한양 구석구석을 뛰어다니고, 소매며 허리춤, 두루마기에서 수십 권의 책이 쏟아져 나올 만큼 신기한 기동력(?)을 자랑했다.

 

이처럼 조선에는 ‘책에 진심인’ 사람들이 많았다. 왕실에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책 읽는 이를 존중하는 문화가 배어있었다. 비록 너무 무(武)보다는 문(文)에 치우친 나머지 문약해지는 병폐도 있었지만, 한국이 현대에 와서 국력이 폭발적으로 성장한 배경에는 이런 ‘독서’에 대한 근원적 애착도 한몫했을 것이라 본다.

 

옛날에는 책이 귀해서 못 봤다지만, 오늘날에는 책이 넘쳐나는데도 보는 이들이 드물다. 영상매체가 눈과 귀를 잡아끌면서 책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그러나 책이 주는 안식, ‘읽기’가 주는 지적 자극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독서의 계절, 옛사람들의 책 사랑을 떠올리며 책 속으로 여행을 떠나보면 좋겠다.

 

 

우지원 기자 basicfor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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