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 최고의 절 센소지(浅草寺)에서 느끼는 백제의 향기<2>

2013.08.23 07:41:44

서울엔 조계사, 도쿄엔 센소지(浅草寺)

[그린경제 = 이윤옥 문화전문기자]   

관동 최고(最古)의 절인 센소지는 한반도계 출신인 히노구마 형제와 관련이 있는 곳이다. 이들이 바다에서 건진 금동 불상을 모시기 위해 지은 것이 센소지이며 아사쿠사 신사는 이들 어부 형제와 마을 원로 하지 씨를 모신 사당이다. 또한 센소(浅草)라는 땅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은 당시 푸른 초원 지대로 말을 기르던 곳이다. 목장을 경영하며 경제권을 장악하여 야마토정부의 관동개발 프로젝트를 완성한 사람들은 다름 아닌 한반도 출신자들로 그들은 오늘의 관동지방의 기틀을 마련한 사람들이기도하다. 이곳을 2회에 걸쳐 싣는다. 참고로 이 글은 2010년 1월에 답사를 마치고 쓴 글이다.

  아사쿠사 센소지는 신도들에게 관세음신앙의 명소이지만 관광객들에게는 뭐니뭐니해도 나카미세(절 입구에 즐비한 상점)의 재미를 빼놓을 수 없다. 가미나리몽을 지나자마자 펼쳐지는 상점가는 다양한 일본 전통인형은 물론이고 직접 구워 파는 전통과자와 모찌 등의 먹거리와 핸드백을 비롯한 여성들의 소품 액세서리, 옷, 신발, 기모노를 만들 수 있는 옷감류 까지 품목도 다양하다. 거기에 뒷골목에는 식당들도 즐비해 여행의 즐거움을 더해준다.

 이러한 나카미세는 1685년에 생겨났는데 처음에는 상점가 사람들이 절 경내를 청소해주는 조건으로 개업을 허용했다고 한다. 또한, 에도 중기에는 절의 서쪽 지구에 속칭 오쿠산(奧山)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오늘날로 말하면 연극 등이 자주 공연되는 등 옛부터 센소지 주변에는 서민들의 오락, 친교의 장소로 사랑받았다. 이후 가부키(일본 고전 연극, 歌舞伎)를 공연하는 공연장이 들어서서 에도문화를 계승 발전시키는 곳으로 탈바꿈하였다.

   
▲ 센소지 본당 앞의 즐비한 상점들 (나카미세)

 잡지 《일본의 문 아사쿠사(日本の扉浅草)》 2002년 가을호에 따르면 센소지에서 행해지는 두 가지 주요 행사가 있는데 하나는 매년 10월 18일에 열리는 국화공양제(菊供養会)이며 다른 하나는 “금룡의 춤(金龍の舞)”이다. 국화공양제는 1898년에 당시 주지였던 오쿠다(奥田貫昭) 씨의 발원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관음경 암송과 함께 국화공양을 하는데 법당에 이날 국화를 헌화하는 사람에게는 헌화하는 만큼의 국화를 미리 올려 기도해둔 국화로 바꿔주는며 이것을 가지고 가서 말려서 베게 속에 넣고 자면 두통을 없애고 장수한다는 믿음이 있다.

또한, 이날 행해지는 금룡의 춤은 1958년에 본당 완성기념식에 맞춰 불법수호(仏法守護 )인 금비늘의 용이 하늘에서 내려와 본당을 지켜준다고 하는 ≪센소지관음승응연기(浅草観音承応縁起)≫에 나오는 내용을 재현한 것이다. 센소지의 정식 명칭은 “금룡산 센소지”로 이 연기(縁起)에 따르면 “18일 한밤중에 절 주변에 천 그루의 소나무가 심어지더니 3일 지나자 하늘에서 길이 100마디의 금빛 비늘 용이 소나무 숲으로 내려왔는데 이후 간 곳을 알 수 없어 이곳을 금룡산이라 불렀다.”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금룡 춤은 15미터의 커다란 금빛용을 만들어 9명이 조종하면서 추는 춤으로 일본의 전통 악기인 샤미센, 북, 피리 등의 연주자 30명이 함께하는 웅장하고 화려한 춤이다.

 

   
▲ 센소지 옆에 있는 아사쿠사 신사

 긴 상점가를 지나면 끝 지점쯤 본당으로 들어가는 왼쪽 담장에 여러 장의 액자가 걸려있는데 이는 어부 히노구마 형제와 센소지의 유래를 그림으로 그려 놓은 것으로 누구라도 쉽게 센소지의 유래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그림과 센소지 안내문 그 어느 구석에서도 고대 한국인들과 관련된 말은 단 한 줄도 없다. 비록 이 절을 지은 한반도계 히노구마형제와 하지씨에 대한 이야기는 싣지 않았지만 그래도 다행인 것은  고래로부터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이들 한반도인을 위해 제사를 지금까지 정성껏 모시고 있는 점에 대해서는 칭찬해 주어야 할 일이다. 아사쿠사신사에서 그런 느낌을 더 받게 된다.

 일본속의 한국문화 답사 회원들이 아사쿠사 센소지(浅草寺)를 찾아간 것은 2010년 1월 23일 토요일이었다.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더 많이 몰려 온 것 같다. 가미나리몽을 지나 나카미세(상점가)를 지나면 본당이 나타난다. 그러나 지금 본당은 공사 중이다. 일본 대부분의 절이 그러하듯 예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은 드물다. 대부분이 목재 위주인 가람들은 화재에 취약하다.

   
▲ 센소지의 나카미세(상점가)에 나온 기모노 차림의 여인들

그를 입증 하듯 센소지도 창건 이래 크고 작은 화재를 여러 번 만났다. 그 뒤 에도시대에 대대적인 불사가 이뤄져서 본당과 5중탑이 1649년에 세워졌으나 이것은 1945년 3월 10일 미국의 도쿄대공습(東京大空襲)으로 불타고 말았다.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 제국을 침공하여 강제로 국권을 빼앗고 국민을 괴롭히던 만행에 대한 응징이었을까? 도쿄대공습은 패전을 다섯 달 앞둔 시점에 이뤄졌다. 이후 다시 중창하였으나 현재 다시 보수 중에 있다.

 아사쿠사 신사(浅草神社) 는 센소지(浅草寺) 바로 옆에 있다. 같은 한자 “浅草”를 쓰면서 절은 “센소”로 읽고 신사는 “아사쿠사”로 읽는 것은 한국의 “대전”과 “한밭” 관계로 보면 된다. 같은 한자를 한자음과 일본 고유음으로 읽는 것이 재미나다. 명치정부 이전에는 이 두 시설이 한울타리 안에 있었지만 명치 때 단행된 신불분리정책(神佛分離政策)으로 각각 신사와 절이 분리되었으며 이때 “아사쿠사”라는 음을 신사가 따르고 절은 한자 발음인 “센소”를 따른 것으로 생각된다.

   
▲ 마네키네코(복고양이)를 비롯한 인형 가게

비록 한울타리에서 벗어났다고는 하지만 센소지 경내에 나란히 자리한 아사쿠사신사는 센소지 본당 바로 왼쪽에 있다. 건물이 붙어 있듯이 아사쿠사신사와 센소지는 유래도 같이 공유한다. 아사쿠사 누리집에는 센소지 누리집과 같은 히노구마 형제의 불상 건진 이야기가 똑같이 올라있다. 622년부터 1868년 명치유신 때까지 이 두 사원은 사이좋은 어부 형제처럼 운명을 같이 해왔다. 다른 점은 신불분리 후 두 사원에서 모시는 신이 다르다는 것일 뿐 원형은 한 뿌리였다.

  관동최고의 절인 센소지에서는 관세음보살상을 모시고 있으며 아사쿠사에서는 백제계 히노구마노하마나리와 다케나리 두 형제 그리고 역시 백제계 원로스님 하지토모(土師中知) 이렇게 세분을 신으로 모시고 있다. 하지 씨 사후에 하지 씨의 아들이 꿈을 꾸었는데 관음상이 나타나서 이르기를 히노구마 형제와 아버지인 하지 씨 세 명을 모시는 사당을 지으라고 한 것이 이 신사의 유래다.

   
▲ 상점가에는 아마자케라는 단술을 판다.

다만, 이 신사에 모시는 신이 벼슬하지 못한 평민이기에 신사의 격은 관동에서는 제일 낮다고 전해진다. 그도 그럴 것이 학문의 신을 모시는 교토의 천만궁, 신사나 술의 신을 모시는 마츠노오대사 같은 신사에 비하면 초라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찾아 간 날도 신사 안에서는 신관의 기도를 받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신사의 격(格)은 규모를 말하는 것일 뿐 실질적으로 주민들은 집 가까이 신사에 가서 자신들의 일상의 대소사를 의논하고 신관의 도움을 받고 살아가는 것이다.

 명치정부의 신불분리정책으로 명치원년인 1868년에는 삼사명신사(三社明神社)로 부르다가 1876년에 현재의 아사쿠사신사로 정착했으며 현재의 본당은 덕천가강(徳川家光)이 보시한 것으로 1649년에 완성되었다. 본당은 지은 지 360여 년 된 건물로 문화재적 가치가 높으며 1961년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센소지(浅草寺)가 몇 번의 화재를 만난 것에 비하면 아사쿠사신사(浅草神社)_는 오랜 세월을 견디고 손상없이 오늘에 이르른 것이 기적 같다. 한국계인 하마구리 형제와 하지씨에 대한 지극 정성의 제사를 하늘이 알아준 것일까?

  관동에서 가장 오래된 절 센소지는 한국계 히노구마 어부 형제와 마을 원로 하지 씨의 전설이 깃든 곳으로 요즈음은 한국인들도 많이 찾는 곳이다. 무사시노의 너른 평야를 개척하여 오늘의 도쿄를 일군 것도 알고 보면 관세음보살의 법력 덕택일 것이다. 그러한 관세음보살상을 바다에서 건지고 절을 지어 모시고 공양을 한 것은 하지씨와 하마구리 형제이다.

   
▲ 나카미세(상점가)에서 내건 호랑이해 장식판, 해마다 바뀐다.

 우리는 세 명의 한국인 곧 히노구마형제와 하지스님의 전설이 깃든 센소지를 건성으로 돌아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비록 센소지 안내책자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우리가 우리 조상의 발자취를 등한시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남이 우리의 조상을 챙겨 주지는 않는 법이다.

센소지와 아사쿠사신사를 뒤로 하고 나오는 답사회원들은 저마다의 가슴에 어부형제의 전설을 고이 간직한채 기념품 사기에 여념이 없는 관광객들로 넘쳐나는 나카미세(상전거리)를 빠져 나왔다.  지금 한국인들도 많이 찾는 센소지이지만 한국출신 어부형제 히노쿠마나리를 기억하면서 센소지를 둘러 보는 한국인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안내책자에 단 1줄도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한자는 구자체로 썼씁니다. 

다음 이야기는 <고구려 총각 복만이의 전설이 깃든 곳 도쿄 심대사>편으로 이어 집니다.

이윤옥 기자 59yo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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