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현감 시절 본가 홍성서 곡식 날라 빈민 구휼

2013.11.21 06:54:11

[한국 종가의 철학을 찾아서(15)]충남 홍성 사운(조중세) 고택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19세기말 기근으로 아사자들 늘자 고향서 구휼미 조달
홍주의병 거병 땐 239두 곡식 군량미로 아낌없이 쾌척
일제 눈치보지 않고 이순신장군 묘역 성역화에 성금 내놔
"나눔없이 어찌 종가(宗家)가 이어지겠나" 베풂의 역사 이어와
한글 조리서 '음식방문니라' 펴낸 분은 종손의 증조할머니

밤색두루마기 차림의 단아한 모습으로 기자를 맞은 조환웅(63) 선생의 집은 야트막한 학성산 아래 고즈넉한 모습으로 늦가을의 정취를 물씬 풍기는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요란하지 않은 솟을대문을 들어서니 툇마루가 기다란 본채가 이어졌고 다시 중문으로 들어서서야 선생이 손님을 맞이하는 방이 나온다. 안채 마루에는 벽면 가득히 찻잔을 진열해 둔 것으로 보아 예사로운 집이 아님을 느꼈는데 고운 백자 잔에 내놓는 씁쓰름하면서도 향이 그윽한 차를 마시며 무슨 차인가 생각하고 있는데 “개똥쑥으로 만든 특별한 차입니다.” 라고 운을 뗀다.

“나눔의 철학을 취재하신다고 하셨죠? 정말 그렇습니다. 종가가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오려면 나눔을 실천하지 않고서야 가능할까요? 크든 작든 간에 이웃과 더불어 나눔의 삶을 실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봅니다. 우리 종가는 특히 조중세 할아버님 얘기가 회자됩니다.”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홍성에 양주 조씨가 첫발을 디딘 것은 중추첨지부사 조태벽(1645~1719) 공께서 이곳에 자리한데서 유래한다. 조태벽 공은 충정공 조계원 (1592~1670)의 손자다. 조계원은 백사 이항복의 문인으로 인조의 계비인 장열왕후의 작은 아버지다.

   
▲ 대담하는 종손 조환웅 선생

   
▲ 사운고택 전경

조중세(趙重世) 선생이 문경현감 시절(1890~1892) 백성을 구휼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문경은 원래 농토가 적은 산골이어서 기근이 들면 굶어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더구나 기근이 들면 자체적으로 구휼미를 조달할 방법이 없는 가난한 고을이기에 조중세 현감은 자신의 본가인 홍성에서 곡식을 날라다 가난한 이들을 구휼한 것이다. 이에 문경 사람들은 조중세 현감의 고마움에 공적비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뿐만 아니라 선생은 1894년(고종 31) 홍주의병이 일어나자 239두(斗)의 곡식을 군량미로 아낌없이 내놓았다. 구한말 어수선한 나라 정세에서 의병을 위해 선뜻 곳간의 빗장을 푼다는 것은 조중세 선생이 아니고는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다.

조중세 선생의 그러한 나눔의 정신은 다음 대에도 이어졌는데 1930년 동아일보 기사에는 조원대(趙源大) 선생이 이순신장군 묘역 성역화사업에 성금을 내놓았다는 기사가 나온다. 일제강점기 당시 성금을 내놓기가 쉽지 않을 텐데 조원대 선생은 선대의 뒤를 이어 나눔을 실천 한 것이었다.

   
▲ 기와조각으로 천하태평과 건곤감리를 새긴 사랑채 벽면.

조환웅 선생은 조심스럽게 조상들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특히 이 집은 6‧25 한국전쟁 때 피난 간 아버지 대신에 할머니가 집을 지켰는데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다고 한다. 그 까닭은 할머니께서 평상시에 가난한 이웃에게 곡식을 나누고 마을에 산모라도 생기면 반드시 쌀과 미역을 보내는 등 온정을 베풀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손들이 이를 기리고자 할머니가 사시던 방에 ‘보현당(寶賢堂)’이라는 당호를 붙였다.

“학성산 정기로 반계천 맑은물 (중략) 검소와 근면을 행동에 옮기며 내 고향 일구자 (중략) 베풂의 역사를 가슴에 새기며(후략)” 이 시는 홍성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로 한평생을 사시면서 농촌 부흥을 꿈꾸던 조환웅 선생의 아버지 고 조응식(趙應植‧1929∼2010) 선생이 지은 노래 ‘용진가’다. 사운고택(士雲故宅) 솟을대문에 들어서기 전 개울가 자그마한 크기의 빗돌에 새겨진 것이다.

이 노랫말의 의미는 ‘양주 조씨 집안의 자긍심을 높이기 위함은 물론이고 선비 역사를 지니고 베풂을 실천하며, 전통을 지켜내자’라는 뜻이란다.

조중세 선생을 비롯한 조상들이 터를 잡은 이곳 충남 홍성 고미당마을은 학성산 아래 반계천이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이다. 그러나 지금은 반계천이 ‘무한천’으로 잘못 불리고 있는데 조환웅 선생은 향토사학자로 잘못된 땅이름을 바로 잡는 운동을 하고 있다.

   
▲ 백제부흥의 꿈이 서려 있는 '얼방원'.

   
▲ '용진가'를 새겨넣은 빗돌.

반계천 뿐만이 아니다. 특히 이 마을은 백제가 패망한 뒤 의자왕의 아들 풍과 부흥군이 660년 이후 3년 동안 머물렀던 주류성이 고택 바로 뒤편에 있어서 원래 고을 이름이 ‘얼방면(乻方面)’이었는데 현재는 그 이름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그 이름이라도 기억하고 싶어 고택 안사랑채(안사람들의 손님이 왔을 때 머물 수 있도록 한 집)에는 ‘얼방원(乻方垣)’을, 대문에는 ‘얼방문(乻方門)’이란 편액을 붙여놓았다.

여기서 ‘얼(乻)’이란 글자는 중국 옥편에는 없는 새로 만든 글자로 임금이 있었던 곳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우리가 흔히 쓰는 얼과 혼이라는 말 가운데 얼이 이에 해당하는 말로 이는 백제의 혼이자 곧 겨레의 혼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조환웅 선생 같은 분이 얼과 혼을 지키는 한 언젠가는 이곳이 백제부흥군의 본거지로 복원될 거라는 생각이 든다. ‘얼방문(乻方門)’ 앞에서 힘찬 목소리로 설명하는 향토사학자 조환웅 선생의 향토애가 절절이 느껴졌다.

   
▲ 한글 음식조리서 '음식방문니라' 표지.

   
▲ 한글 음식조리서 '음식방문니라' 내면.

이 종가에는 귀한 책이 한 권 전해온다. 바로 순 한글로 쓴 조리서 《음식방문니라》가 그것인데 조환웅 선생의 증조할머니인 숙부인 전의이씨가 쓴 책이다. 기자는 이 책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랐다. 얼마 전 경북 영양 서계종택에서 본 《음식디미방》과 비슷한 책이기 때문이다. 다만 《음식디미방》은 제법 알려졌고 《음식방문니라》는 아직 덜 알려졌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이 책은 《음식방문(飮食方文)》곧 ‘음식을 만드는 법을 적은 글’이란 뜻이다. 책에 신묘년 2월 초4일에 필사가 끝났음을 알리는 내용이 있는데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송철의 교수에 따르면 이 책이 19세기말 표기법을 잘 보여준다고 한다.

책의 내용을 살펴보면 화향입주법, 두견주법, 소국주법, 송순주법, 신묘향법 같은 술빚기와 두텁떡법, 혼돈병법, 복영도화고법, 신검채단자, 석탄병법 같은 떡 만들기 그리고 진주좌반연법, 승기약탕법, 삼합미음법, 증구법(개찜), 동화석박지법 같은 요리와 반찬 만들기 등이 설명돼 있다.

   
▲ 다양한 종류의 찻잔.

여기서 한 가지 ‘화향입주법(花香入酒法)’을 보면 “국화 활짝 필 때 술이 한 말이거든 꽃 두 되를 주머니에 넣어 술독 속에 매달아 두면 향내가 가득하니 꽃은 매화와 연꽃 등 향기가 있고 독이 없는 꽃을 이 법으로 하되 꽃을 많이 술 위에 뿌려야 좋으니라. 유자는 술맛이 쓸 것이니 술독에 넣지 말고 유자 껍질을 주머니에 넣어 매달고 술독을 단단히 덮어 두면 향기가 기이하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운고택에 가향주로 전해 내려오던 송순주는 산업화 때 밀주단속을 하는 바람에 맥이 끊겼다고 하는데 송순주에는 “솔순을 무수히 씻어 잠깐 삶아 솔향기가 없어지게 하지 말고 밥과 솔순이 얼음 같이 식은 뒤 넣어라”하는 설명 등 세 가지 빚는 법이 소개돼 있어서 다시 그 맥을 살리는 것도 고려해볼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상도에 《음식디미방》이 있다면 충청도에 《음식방문니라》가 있어 조선의 요리서로 쌍벽을 이루고 있다. 고택 취재에서도 손수 찻잔을 내놓고 차 한 잔 대접하는 문화를 보기가 어려운데 사운고택의 종손 조환웅 선생과 찻잔을 앞에 두고 나누는 이야기는 마치 오랜 지기처럼 편하게 느껴졌다.

이 넓은 고택을 지키며 사는 철학을 묻자, “고택에 관람객들이 오면 관광지도 아닌데 대부분 집만 구경하고 갑니다. 사실은 이 종가가 이어져 내려오기까지의 철학이 더 중요할 텐데도 말입니다. 오시는 분들이 외적인 문화보다는 내적인 문화를 체험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저는 언제나 문을 열고 열린 마음으로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지요.” 라며 환하게 웃는다.

   
▲ 백제 부흥 정신이 담긴 얼방문 앞에선 종손 조환웅 선생

그러면서 선생은 종가를 잇고 고택을 건사해나가는 일이 만만치는 않다고 고백한다. “20년 전 처음 내려왔을 때는 일하는 것이 참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지켜야지 누가 지키겠나, 하는 생각으로 즐겁게 일을 합니다”라면서 고택 옆에 경영하고 있는 농장 이름을 아예 ‘즐거운 농장’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앞으로 점점 고택을 보존하기가 어려워질 것 같아 여기 계속 사는 조건으로 재산을 문화유산국민신탁에 기증하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혹시 아들 대에 가서라도 살림이 어려워져 담보 대출 등을 받아 처분이라도 하는 날이면 종가를 이어오신 선조를 뵐 면목이 없을까 해서지요.”

그렇다. 종가를 잇는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더구나 나눔을 실천했던 조상의 뜻을 계승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일 것이다. 특히 향토사학자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백제 부흥군에 대해 조명해나가면서 잘못된 땅이름을 되찾고 바로잡는 일에도 앞장 서는 종손의 모습이 존경스럽다.

김영조 기자 pine996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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