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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자전거 평화기행

일왕 위해 주민들의 집단자살 부추긴 일본군

[오키나와 자전거 평화기행 ②]

[우리문화신문=이규봉 교수]  오키나와전투 때 처음으로 미군이 상륙한 자탄초(北谷町)를 지났다. 이웃한 가데나초(嘉手納町)에 들어가니 미공군 기지가 끝없이 이어진다. 이 기지는 가데나의 83%나 차지하고 있는 오키나와에서 가장 큰 미군기지일 뿐 아니라 해외 미군기지 중에서도 가장 넓은 곳으로 가데나초을 비롯한 4개의 행정구역에 걸쳐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에 미군기지가 80% 이상 차지하고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잔인한 일본군의 상징 치비치리 가마

나하공항으로부터 35킬로미터쯤 가니 요미탄손이 나왔다. 나미히라(波平)의 치비치리가마를 지도에서 찾을 수 없어 그 지역 사람들에게 물었으나 잘 알지 못 한다. 이렇게 유명한 곳을 왜 모를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할머니 둘이 있어 혹시나 해서 물어보았더니 설명을 하는데 우리가 일본말을 못 하는 것을 알자 자신의 차를 따라오라는 것 같았다. 왔던 길을 다시 내려 한참을 가서 동굴을 알려준다.

 

   
▲ 치비치리가마를 안내해준 주민들과 함께

이정표는 없었고 차도에서 한 20미터쯤 떨어진 곳이었다. 계곡으로 나 있는 입구에서 좁은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동굴이 나왔다. 왼쪽에는 비가 세워져 있고 오른쪽에는 제단 같은 것이 있다. 가운데 입구로 들어가니 매우 어두웠다. 스마트폰의 전등을 비추며 들어가 보니 제법 넓은 공간이 나왔다. 동굴 입구 오른쪽 제단 같아 보이는 곳 아래에 구멍이 세 개나 뚫어져 있어 무엇이 있나 들어다 보았더니 해골들이 쌓여 있다.

1945년 4월 미군이 들어오자 이곳에 피난 왔던 140명의 주민 가운데 85명이나 집단 자살했다. 오른쪽의 제단 같은 곳은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는 동시에 집단학살을 고발한 긴조 미노루의 조각상이다. 왼쪽에 있는 비에는 “집단자결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살아서 포로의 굴욕을 당하고 죽는 오명을 남기지 말라는 황민화 교육과 제국주의에 의한 강제된 죽음이다.”라고 쓰여 있다.

 

   
▲ 요미탄손 나미히라의 치비치리가마

 

   
▲ 치비치리가마 구멍 안에 있는 희생자들의 해골들

 

   
▲ "집단자결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살아서 포로의 굴욕을 당하고 죽는 오명을 남기지 말라는 황민화 교육과 제국주의에 의한 강제된 죽음이다.”라고 적힌 비석

이러한 동굴이 끝까지 저항했던 남부의 이토만 일대에만 800여 개가 있다고 한다. 만일 일본이 항복을 늦추었다면 이와 같은 비극은 제주도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었을 것이다. 제주도에도 확인된 동굴진지만 700여 개가 있고 송악산과 모슬포 일대는 지하가 요새화 되어있다. 이 동굴이 제주 4·3 사건 때 주민들의 도피처로 이용되었으나 국군에 발각되어 많은 도민들이 학살되었다.

해가 짧아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이 동굴 하나 본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가는 길에 만좌모(万座毛)라고 하는 코끼리 머리를 닮은 바위가 바다의 수면과 붙어있어 잠시 들렸다. 온나손(恩納村) 해변가에 있는 숙소에 도착하니 6시였다. 호텔은 매우 컸고 로비에 cloak라 쓰여 있는 물품보관소가 있어 자전거는 모두 그곳에 맡길 수 있어 편했다. 오늘 달린 거리는 50킬로미터 정도이다.

 

   
▲ 코끼리 코를 닮은 만좌모(万座毛) 바위

 

오키나와전투와 주민 집단자살

오키나와는 일본 영토 중 유일하게 지상전이 벌여진 지역으로 매우 큰 희생을 치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오키나와 전투(미국명 Operation Iceberg)는 1945년 3월 23일 미군의 포격으로 시작했다. 미군은 4월 1일 오키나와 중부 요미탄손 차탄초로 상륙해 남북으로 점령해 나갔다. 일본군은 끝없이 저항하여 6월 19일에 가서야 미군은 일본군의 저항을 종료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사령관 우시지마가 자결하면서 끝까지 항전하고 포로로 잡히느니 차라리 자살하라는 명령을 내려 전투는 다시 9월 7일까지 이어졌다.

이 전투에는 지상군 18만 명을 포함한 54만 명의 미군, 현지에서 강제로 징집한 3~4만 명의 보조병력을 포함한 10만여 명의 일본군 그리고 40만 이상의 지역 주민이 연루됐다. 일본군은 전쟁에 지더라도 천황제를 유지하기 위한 협상 시간을 최대한 벌려고 항복하지 않고 패잔병을 끌고 남부로 후퇴하며 끝까지 항전했다.

미군이 오키나와 본섬에 상륙하자 일본군은 연합군의 일본 본토 상륙을 지연시키려고 주민들을 방패막이로 사용했다. 천황을 위해 항복하지 말고 차라리 죽으라는 황민화 교육을 시켰고 미군을 악마화 시켜 일본군보다 훨씬 잔인하다는 것을 교육시켰다. 일본군은 일본어와 다른 자신들의 언어를 사용하던 오키나와인과 조선인을 간첩으로 몰아 죽였고, 주민이 붙잡히면 일본군의 동향에 대하여 발설할 것에 대한 두려움에 주민에게 수류탄을 쥐어주고 집단자결도 강요했다.

일본군의 잔인함을 직접 경험한 주민들은 일본군보다 더 잔인하다는 미군에 잡혀 죽느니 차라리 자살하자며 가족이 가족을 죽이게 되었다. 1945년 3월 26일과 6월 21일 사이에 강제집단사한 지역만 알려진 곳이 서른 곳이 넘는다. 이 전쟁으로 오키나와 전 주민의 약 1/3에 해당하는 12만여 명이 희생되었다.

일본군이 주둔하지 않은 곳에는 집단자결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일본군은 그 책임을 면할 수가 없다, 주민을 보호할 책임이 있는 일본군이 오히려 주민에게 직접적인 폭력을 행사하여 압도적인 다수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미군보다 실제로 자국 군대인 일본군에게 더 큰 희생을 당했다. 하지만 2008년부터 일본은 집단자살을 교과서에서 삭제하는 등 역사를 왜곡하며 미화하고 있다. 그래서 피해 당사자인 오키나와 사람들은 분노하는 것이다.

 

조선인 위안부와 군부

오키나와전투에서 희생된 조선인은 만여 명이 훨씬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을 뿐 정확한 통계가 없다. 이들에 대한 기록은 물론 대부분 이름조차도 알 수 없다. 기록이 있는 경우는 거의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 했으니 두 번 죽인 셈이다. 위안부가 천여 명이고 나머지는 군대의 잡역부인 ‘군부’라는 이름으로 끌려온 사람들이다.

오키나와에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1944년 9월 국민징용령을 발표하고 만 명이 넘는 대규모 인력을 강제로 동원했다. 오키나와에서 이들은 군부대에 배치되어 차별 속에 중노동을 했다. 미군이 상륙하자 전투현장에 끌려가 자살 공격대원으로 투입되기도 했다.

오키나와에 있던 조선인의 위안부 실태는 위안부 출신 배봉기 할머니가 1972년 오키나와가 일본에 반환될 때 국적이 없던 자신을 증언하면서 알려졌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이 사실을 은폐했다. 이미 한일협정이 성사된 점도 있지만 할머니가 조총련의 도움을 받아 서라나?

오키나와에는 130곳의 위안소가 있었고 이중 49곳에 조선인 위안부가 있었다고 한다. 천여 명의 위안부 가운데 한국으로 돌아온 사람은 확인된 것만 4명에 불과하다. 그래도 한 연구자의 노력에 의해 2008년 9월에 미야코섬에 위안부를 위한 추모비가 건립되었다.

피해 당사국인 한국이 조선인 징용이나 위안부에 대한 실태조사에 거의 등한시하고 있는 것은 한국 정부의 뿌리가 친일파에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러니 피해국인 한국 정부가 가해국인 일본과 정치적으로 12・28 같은 엉터리 합의를 하는 것 아닌가? 강제성도 없고 정부 책임도 없다고 하는 일본이 주는 단지 10억 엔에 면죄부를 파는 한국 정부는 모진 고통을 겪은 조선의 백성과 생존해 있는 그들에게 또다시 고통을 주는 것과 다름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