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 한국국학진흥원(원장 정종섭)과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관장 정진영)은 만주망명 110돌을 맞이하여 모두 12회에 걸친 기획 보도를 진행하고 있다. 제3편은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 망명을 결심한 뒤 고향을 등지고 떠나는 심경을 노래한 한글가사에 대한 내용이다. 1911년 만주망명의 주역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의 아내이자 백하 김대락의 누이동생 김우락(金宇洛, 1854~1933) 여사가 지은 <해도교거사>라는 한글가사가 전한다. 이 가사는 김우락 여사가 만주망명 이후 서간도에 정착해서 지었다. 자신의 성장과정과 혼인 이후의 삶, 남편의 구국운동 상황, 만주 망명과 정착 이후 삶의 이야기 등 자신의 일생 경력을 한글로 기록한 자료다. 제목은 한글로 되어있지만 ‘해도’는 ‘海島’ 곧 (서)간도를 의미하고 ‘교거’는 ‘僑居’ 곧 임시거주를 의미한다. 기록 시기는 가사 끝에 “신해년(1911) 국화절(음력 9월 9일)에 단풍은 비단 같고 찬바람은 소슬하니 원객(遠客)의 시름일세, 심심하고 수란한 중에 심신이 어지러워 자리에 혼자 누워 공부없는 짧은 문필로 자신의 경력을 기록하니 남이 볼까 부끄럽소.”라는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황기철)는 14일(수) 낮 1시 30분, 항일 학생운동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힘쓴 정완진 애국지사가 향년 93살로 세상을 떴다고 밝혔다. 정완진 지사는 1927년 경북 김천 출생으로 대구상업학교 재학시절 조국독립을 위한 비밀결사인 ‘태극단’에 가입하여 활동했으며, 일경에게 붙잡혀 대구형무소에서 모진 고문을 당했다. 정부는 지사의 공훈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정완진 지사는 노환으로 요양병원에서 임종을 맞았으며, 대전 서구의 성심장례식장(6호실)에 빈소가 마련됐다. 이어 16일(금) 아침 9시 30분에 발인 뒤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6묘역에 안장될 예정이다. 정완진 지사가 작고함에 따라 생존 애국지사는 22명(국내 19명, 나라 밖 3명)만 남게 되었다. 한편, 국가보훈처는 앞으로도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유공자와 그 유족에게 합당한 예우를 통해 국민의 애국정신을 길러 민족정기를 높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예정이다. 정완진 애국지사 공적 사항 ㅇ 정완진(1927.08.28.~2021.04.14.) - 경북 김천 출생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 하느냐. 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 오늘은 ‘만주 호랑이’라 불렸던 독립지사 김동삼 선생이 위처럼 유언을 남기고 감옥에서 순국하신 날입니다. 바로 84년 전인 1937년 4월 13일이지요. 평소 그를 존경하던 만해 한용운(韓龍雲) 선생이 자신이 머물던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에서 장례를 치르고, 주검을 유언대로 화장하여 한강에 뿌렸습니다. 한용운이 일생에 눈물을 흘린 적이 이때 한 번뿐이라는 일화는 김동삼 선생이 어떤 분인지를 잘 말해줍니다. 선생은 1878년 6월 23일, 안동의 내앞마을에서 태어났는데 내앞마을(川前)은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사에 걸출한 인재들을 배출한 곳으로 무려 한 마을에서 20명이 넘는 인물이 독립유공자로 포상받은 바 있으며 1910년대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망명한 사람이 150명에 이를 정도로 독립운동의 산실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는 대단한 고장입니다. 선생은 만주지방 무장투쟁의 지도자로서 무오독립선언과 민족유일당촉진회를 주도했습니다. 특히 1911년 만주지역에 독립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