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제천 사자빈신사터 사사자 구층석탑 - 이 달 균 네 마리 사자가 울자 도량은 선정(禪定)에 든다 단 한 번의 사자후(師子吼)가 고요를 불러내다니, 바람도 가던 길 멈추고 반야바라밀 읊조린다 이 석탑은 원래 9층탑으로 1022년(현종 13)에 세웠다고 한다. 현재는 2층 기단에 5층의 옥신석까지만 남아 있고 상륜부는 완전히 파손되어 남아 있지 않다. 그나마 다행한 것은 네 마리의 사자가 사자후를 토하며 탑신을 바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탑 가운데 네 마리 사자를 배치한 것이 그리 특이한 것은 아니나, 하지만 이 탑처럼 네 형상이 다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은 매우 드물다. 사자는 네 모서리에 한 마리씩 자리 잡고 있는데 안쪽 공간에 비로자나불상을 모셔 두었다. 불상은 특이하게도 두건을 쓰고 있으며 표정이 매우 흥미롭다. 네 마리 사자가 앉은 형상은 남북국시대(통일신라)의 화엄사사사자삼층석탑(국보 제35호)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이 잘 드러난 중요한 자료다.(시인 이달균) ▶ 그동안 55회에 걸친 연재를 끝맺습니다. 뛰어난 사진 작품을 주신 손묵광 작가님과 맛깔스럽고 의미가 깊은 시를 써주신 이달균 시인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문경 봉암사 삼층석탑 - 이 달 균 뭇새들 들고 나는 문경새재 들머리 백운대 마애불은 기다리고 계시는데 오늘도 닫힌 산문은 끝내 열리지 않는다 걸어서 못 간다면 낙엽으로나 불려가지 그곳이 미타찰(彌陀刹)*로 이어지는 길이라면 고요히 먼지가 되어 바람에나 실려가지 * 미타찰(彌陀刹) : 아미타불이 있는 극락세계 봉암사는 신라 하대 구산선문의 하나로써 신라 헌강왕 5년(879년)에 도헌 지증대사(824~882년)가 창건하였다. 경내에 있는 비문에 따르면 도헌은 어려서부터 불심이 깊어 부석사에서 출가했는데, 임금의 간곡한 권유에도 경주로 나가지 않고 수행정진에만 힘썼다고 한다. 그러던 중에 심충이란 사람이 희양산에 있는 땅을 내면서 선원을 세우기를 청하여 둘러보았는데 “이 땅을 얻었다는 것은 하늘의 뜻이다. 이곳에 승려들이 살지 않는다면 도적굴이 될 것이다” 하면서 봉암사를 세웠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요즘도 봉암사는 일반인에게는 한해 가운데 단 하루, 석가탄신일에만 출입을 허락한다. 1982년부터 대한불교 조계종 특별수도원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절 한 곳쯤은 굳건히 닫혀 있어도 좋지 않을까? 절이 꼭 관광지일 필요는 없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제주 불탑사 오층석탑 - 이 달 균 귀 기울이면 절에서도 숨비소리 들릴까 물질 나간 해녀는 돌아오지 않았고 먼 옛날 설문대할망 탑을 돌며 부른다 제주시 삼양동에 있는 불탑사는 여러모로 의미가 있는 절이다. 원찰인 원당사(元堂寺)는 원제국시대 제주도의 3대 절의 하나였다고 한다. 제주 4·3사건 당시 가람 대부분이 파손되었으며 1953년에 재건되었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의 보수ㆍ확장 작업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불탑사 오층석탑은 보물(제1187호)로서는 한국 최남단에 있다. 기단부에서부터 상륜 부재(部材)에 이르기까지 모든 석재가 제주 화산에서 비롯된 현무암으로 제작되었다. 적흑색 화산석으로 만든 석탑은 이곳에서만 유일하게 볼 수 있다. 고려 때에도 바다에선 해녀들 숨비소리 끊이지 않고 들렸으리라. 생업을 위해 태왁을 들고 물질 나갔던 아낙들, 더러는 파도의 쓸려 돌아오지 못한 축도 있었으리라. 그럴 때면 불탑사 석탑을 돌며 간절히 부처님과 설문대할망에게 소원 빌지 않았을까. 망부석이 되지 못한 고려 아낙의 기원은 지금까지도 들려온다. (시인 이달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도피안사 삼층석탑 - 이 달 균 피안(彼岸)에 들고 싶다면 화개산 도피안사(到彼岸寺) 가자 깨달음의 언덕을 언제쯤 올라보나 열반은 가까이 있다 “귀를 열어라”고 탑은 말한다 도피안사는 피안의 세계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번뇌와 고통이 없는 경지에 이르고 싶은가. 그런 이상적인 경지가 꿈처럼 요원하다면 남한의 최북단 철원 화개산 도피안사에 가자. 한국 전쟁 이후 군에서 재건하였다는 이 절의 〈사적기(寺蹟記)〉엔 재미있는 사연이 전한다. 당시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을 조성하여 철원에 있는 안양사에 봉안하기 위해 암소 등에 싣고 운반하는 도중, 불상이 없어져 찾아보니 현재의 도피안사 자리에 앉아 있어 865년(신라 경문왕 5)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그 자리에 절을 세우고 불상을 모셨다고 한다. 현재는 군에서 파견된 군승과 주지 김상기가 관리하고 있지만, 휴전선 북쪽 민통선 북방에 있어 민간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고 있다. 3층석탑(보물 제223호)은 치열한 격전지에 있는 것에 견주면 비교적 양호한 모습을 하고 있다. 상륜부와 3층 지붕돌 일부만 손상되었을 뿐 전체적으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고 하니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철조비로자나불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아시아나 비행기가 출발하려면 6시간이나 남았다. 나는 공항 안에서 점심도 사먹고, 손말틀(휴대폰)로 궁금한 한국 소식도 알아보고 등등 시간을 보냈다. 포노 사피엔스는 손말틀만 있으면 몇 시간이고 지루하지 않게 보낼 수가 있다. 공항에는 손말틀을 충전하는 시설까지 있으므로 배터리 걱정을 안 해도 된다. 나는 탈핵이라는 단어로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흥미로운 기사를 발견하였다. 세계의 이름 있는 기업들이 ‘RE100’이라는 이름의 재생에너지 사용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RE100을 처음 들어보았다. RE100은 재생에너지 100%(Renewable Energy 100%)의 약자이다. 2014년에 시작된 이 캠페인은 다국적기업들이 생산 활동에 들어가는 에너지를 100% 재생에너지에서 조달하겠다는 선언이다. 2019년 현재 170개 기업이 동참하고 있다. 애플, 구글, BMW, GM, 이케아 등 유럽과 미국의 기업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데, 삼성과 LG를 비롯하여 우리나라 기업은 한 곳도 동참하고 있지 않다. 이미 구글과 애플은 풍력이나 태양광발전에서 나오는 전력만으로 생산 활동을 하는 100% 목표를 달성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정림사터 오층석탑 - 이 달 균 백제의 하늘이 내려와 놀고 있다 천년을 떠돌다 온 구름은 떠날 수 없다 조금 전 내렸던 비는 계백의 눈물이다 정림사터는 백제를 따라 걷는 순례지의 필수 코스다. 백제를 대표하는 정림사터 오층석탑, 자연과 어우러진 탑을 상상한다면 실망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시내와 가까워 방문이 쉬운 장점도 있다. 번듯한 주차장과 박물관도 있어 관람하기에 편리할 뿐 아니라 부여 시외버스터미널에서 가깝고, 주변에 부여국립박물관, 부소산성도 있어 함께 구경하기에 좋다. 우리의 탑은 늘 비극적 사연을 안고 있다. 이 탑 역시 예외가 아니다.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1층 탑신에 "大唐平百濟國碑銘"이라고 새겨놓아 당시의 수난을 엿볼 수 있다. 이 탑 옆에 서면 역사 속으로 사라진 백제를 만날 수 있다. 황산벌의 흙먼지를 느낄 수 있고, 계백의 눈물을 만날 수 있다면 오늘의 여행은 꽤나 쏠쏠한 이득을 얻은 것이다. (시인 이달균)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오늘은 드디어 이스탄불에서 아시아나 비행기를 타고 인천으로 가는 날이다. 새벽에 아잔 소리에 잠이 깨었다. 하루에 5번 빠지지 않고 기도하면 누구나 독실한 무슬림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매일 새벽 기도를 빠지지 않고 다닌다면 그 사람은 독실한 기독교인임에 틀림이 없다. 우리나라에는 전통적인 종교인 유교와 불교, 그리고 근대에 서양에서 전해진 천주교와 개신교, 그리고 순수한 토종 종교인 대종교, 천도교와 원불교 등 여러 가지 종교가 섞여 있다. 그렇지만 종교 분쟁이 끊이지 않는 중동 지역과는 달리 우리나라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고 또 여러 종교가 싸우지 않고 비교적 사이좋게 공존하는 나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적 관용과 공존이 거저 얻어진 것은 아니다. 유교 국가였던 조선에 천주교가 처음 전파된 것은 18세기 후반이다. 정조 8년인 1784년 이승훈은 베이징에서 서양 신부에게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고 돌아와 천주교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그 후 7년이 지난 1791년에 최초의 순교자(윤지충)가 생겼다. 그는 왜 사형에 처해졌을까? 부모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는 것이 죄목이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10계명 가운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어제 총대주교 친견을 위해 대기실에서 기다릴 때 주위를 살펴보니 정교회 안내 유인물이 있어서 하나 가지고 왔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 유인물을 읽어 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 쓰여 있다. “동방 교회는 예수님의 제자인 안드레아에 의해서 창설되었다. 안드레아의 제자인 스타키스(Stachys)가 비잔티움의 첫 번째 주교였다. 서기 330년에 콘스탄티노플이 로마제국의 수도가 되면서 콘스탄티노플 교회는 현재처럼 정교회의 중심이 되었고 콘스탄티노플 주교가 대를 이어가고 있다. 현재의 발도로메오 총대주교는 1991년에 제270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로 선출되었다. (필자 주: 현재의 프란체스코 교황은 로마 카톨릭의 제266대 교황이다.) 터키에서 태어나고 터키의 시민인 발도로메오 총대주교는 각국 정교회를 통합하는데 힘을 기울이고 있다. 그는 또한 타종교 곧 기독교, 무슬림, 유태교와의 대화와 화해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상당히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정교회의 법통이 예수님의 직접 제자인 안드레아에서부터 이어져 왔다는 사실이 새로웠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에서부터 이어져 온 로마 가톨릭과 견주어 보면 역사의 길이가 똑같다고 말할 수 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무장사터 삼층석탑 - 이 달 균 적막하다 새벽은 그렇게 더디게 온다 무장산 첩첩산중, 깨진 기와조각처럼 버려진 신라의 한 하늘이 나뒹굴고 있었다 오늘 난 문무대왕의 음성을 들을 것인가 통일의 염원으로 서라벌을 달리던 웅혼한 영웅의 기개를 만날 수 있을 것인가 탑 하나로 오로지 한겨울 무장사터 간간히 흩날리는 진눈개비가 추워라 가만히 역사의 문을 닫고 전설을 걸어 나왔다 우리가 찾아간 무장사터는 동장군의 서슬이 시퍼런 겨울 새벽이었다. 일찍 출발한 탓으로 여명을 한참 기다렸다. 건물은 아무것도 없고, 탑만 외로이 심산유곡에 있어 더욱 추운 기운이 밀려왔다. 절 흔적은 거의 없는데 위쪽엔 미타상을 조성한 인연을 적은 비문 무장사아미타불 조상사적비의 비신을 받쳤던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다. 여기저기 깨진 기왓장들이 흩어져있어 절터임을 말해 줄 뿐이다. 무장사의 유래는 《삼국유사》에 전해오는데,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뒤 병기와 투구를 이 골짜기에 숨겼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병장기가 필요 없는 평화스러운 시대를 열겠다는 문무왕의 결연한 의지의 표현이라 한다. 언제 어떤 연유로 폐사지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석탑은 숲 사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오늘은 이번 여행의 정점으로서 정교회의 발도로메오 총대주교를 친견하는 날이다. 친견시간은 저녁 4시 30분으로 잡혀 있다. 그래서 우리 일행은 오전에 숙소에서 걸어갈 만한 거리에 있는 돌마바흐체 궁전을 구경하기로 했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돌마바흐체 궁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소개가 나온다. 돌마바흐체 궁전은 이스탄불에 있는 오스만 제국의 궁전이다. 원래 목조 건물이었으나 대화재로 소실되자 31대 술탄 압둘마지드 1세가 1859년에 석조 건축물로 재건했다. 베르사이유 궁전을 모델로 했으며 유럽에서 보낸 수많은 헌상품과 호화롭게 꾸며진 벽들을 보면 당시 생활상을 짐작할 수 있다. 오스만 제국 후기 술탄 6명이 일부 사용했다. 세람르크는 술탄이 공무를 보고 각국 대사를 접견하던 장소로 남자만 출입할 수 있었다. 하렘은 왕실 가정으로 술탄과 가족이 살았다. 터키 초대 대통령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도 이곳을 관저로 쓰다가 1938년 11월 10일 아침 9시 5분에 집무실에서 죽었다. 아직도 집무실과 침실의 모든 시계는 9시 5분을 가리키고 있다 궁전 정원에는 베고니아, 사르비아, 금잔화 등의 풀꽃이 예쁘게 피어 있었다. 장미와 목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