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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책의 운명을 생각하다

책은 읽는 것이 아니라 장식용일 뿐인 눈물겨운 현실
[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247]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4월 23일 어제는 세계 책의 날이었다. 영국의 극작가 셰익스피어와 스페인의 소설가 세르반테스 등 두 문호가 세상을 뜬 날을 기리는 것이라고 한다. 영국이나 스페인에서는 대대적인 책 축제가 이어진다. 단 하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주일 이상 지속되고 책방이나 노점상이 많은 거리에는 관광객들이 유럽 각국에서 몰려와 책을 보고 사고 책에 대해 말하고 책을 사랑하는 시간을 갖는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날을 전후해 많은 행사를 열었다. 성황을 이룬 곳도 많았다. 다만 그들처럼 모두의 축제 느낌은 없었다.

 

 

책의 날을 맞아 나도 책을 생각해보았다. 언젠가 《책바다 헤엄치기》란 제목으로 책을 찾아다니고 읽은 이야기를 책으로 낸 적도 있지만 그동안 이사 다니면서 조금 정리를 하고도 집안 서재에 책들이 많이 있다. 이 책들은 비좁은 서재의 책꽂이에 이중으로 넣어져 있어 이제 어떤 책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책을 내가 어떻게 사서 얼마나 보았는지도 알 수 없는 채로 이 집에서 몇 년 동안 나하고 동거하고 있다. 물론 또 읽고 싶은 책들이 생기니 더 사들이기도 한다. 점점 바닥에도 쌓이고 있다. 이 책들이 언제까지나 나하고 같이 있을 수 있을까?

 

“책은 꿈꾸는 것을 가르쳐주는 선생이다”​ 라고 프랑스의 철학자인 가스통 바슐라르(1884~1962)가 <몽상과 우주>라는 글에서 이야기한 대로 사실 누구에게나 책은 단순히 지식과 정보를 얻고 배우는 지식전달 수단을 넘어서 거기서 새로운 세상과 멋진 사람들을 꿈꾸는 황홀한 공간이었다. 그러기에 집이 좁고 책을 놓을 데가 없어 2중, 3중으로 놓이고 쌓여 있어도 그 속에서 책을 만나 보면 그런 꿈을 꾸던 것들이 되살아나면서 행복해지기도 한다. 그것이 책이 주는 기쁨일 것이고 그러기에 다들 책을 사고 모으고 할 것이다.

 

그런 꿈을 가장 크게 꾸신 분을 최근 만났다. 서울 북한산 동편자락인 수유리의 2층 집에서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입구에서부터 1층 집안 곳곳, 그리고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양옆에 책들이 쌓여서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난간에 기대어 있는 것도 있고 방안 곳곳으로 돌아가면서 장르별로, 주제별로, 나라 별로 책들이 곳곳에 켜켜이 쌓여 있다. 서 있는 것, 누워있는 것, 바닥을 메우고 맨 벽을 채운다.

 

책장이 들어서서 겨우 얼굴만 들이밀 정도의 공간 양쪽으로도 책들이 꽉 차있다. 이 많은 책들의 주인은 문화관광부에서 고위급 간부로 봉직하신 8순을 바라보는 최진용 씨다. 국립극장장 등 오랫동안 주요 직책을 맡았고, 퇴직한 뒤에도 인천문화재단 이사장 등 직책을 맡아 온 이분은 책을 통해 가장 큰 꿈을, 가장 많이 꾼 분이라고 하겠다.

 

“한 7만 권쯤 될 것입니다. 이 집에만 다 둘 수 없어서 다른 데를 빌려 두기도 하고요. 집 전체가 다 책장이고 책방인데 그래도 저는 행복하지요.”

 

 

 

젊을 때부터 책을 직접 사서 모으셨단다. 사람은 하루에 한 권을 사도 100년 평생에 살 수 있는 것이 3만 6천 권 정도일 것인데 그 두 배가 된다고. 실제로 서른 넘어서부터 책을 모으기 시작하셨을 테니 50년을 잡고 날마다 4권씩 샀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니 월급을 받으면 책 사는데 다 들어간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고 그러다 보니 남들처럼 번듯한 집도 없이 은퇴한 뒤 최근에야 약간의 무리를 해서 조금 공간이 있는 옛 주택 2층집을 구해서 온 것이란다.

 

필자도 방송국 기자로 있으면서 무언가 새로운 아야기를 찾고 기삿거리를 찾고 또 관련된 정보를 얻으려니 책을 자꾸 사게 되었는데, 이분도 문화예술분야 정책을 다루는 핵심 공무원이었으니 일찍부터 관련된 책을 꾸준히 모으고 활용하신 모양이다. 그러한 책의 힘이 중요한 정책에 반영되었음을 수집된 책의 종류와 내용을 보면서 알겠다. 문화예술분야가 핵심인데, 화제와 이슈가 되었던 책들이 수십 년 전부터 현대까지 망라되어 있다.

 

미술만 해도 회화, 서화, 조각, 사진, 공예, 건축 등 부문별로 좋은 책들이 참 많다. 음악도 있고 공연도 있고 관련자료들이 끝이 없다. 나라별로도 일본과 중국, 또 영어로 나온 좋은 책들이 곳곳에서 자기를 봐 달라고 얼굴을 내밀고 있다. 중국 돈황에 대해서도 불교에 관한 것, 미술과 조각에 관한 것, 문학적인 것을 다룬 것들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문화 예술에 관해 가장 많은 자료를 갖고 있다는 자랑이 실증된다.

 

 

“제 꿈이 문화예술도서관을 갖추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그런 전문도서관이 없지요. 그것을 위해서 사실 정말 열심히 책을 모았습니다.”

 

이러다 보니 주위에는 책을 좋아하는 선후배들이 늘 같이 있으면서 공부도 하고 격려도 한다. 독서클럽 활동도 꾸준히 한다. 한마디로 책이 곧 꿈이자 밥인 셈이다. 그것을 위해 평생을 한 방향으로 달려온 것이다.

 

그런데 이 최진용 씨만큼, 아니 그보다 더 먼저 책을 모으며 꿈을 크게 키우신 분이 바로 KBS사장과 문화공보부 장관을 지내신 언론인 이원홍 씨다. 이원홍 씨는 80년대 초 KBS 사장으로 오시면서 벌써 책이 엄청 많다는 소문이 있었고 부임한 뒤 KBS의 방송 수준이 획기적으로 높아졌는데 그것은 많은 책을 통해 얻으신 소양과 정보를 바탕으로 회사를 이끈 결과라는 분석이 많았다. 특히 컬러텔레비전 시대 공영방송의 뉴스와 우수한 교양 시사 프로그램 확충에 높은 점수를 받았다.

 

마침 올해 초 이원홍 장관 댁을 방문할 기회가 있어 그 방대한 책을 직접 눈으로 볼 영광을 얻었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아파트는 일반주택보다 더 좁다. 거실만 빼놓고 사람 다닐 공간도 없이 2중 3중의 책장들이 좁은 방을 점령하고 있다. 돌아가는 베란다와 그 뒤편 창고도 꽉 차있다.

 

 

“한 3만 권쯤 됩니다. 물론 이 집에 다 둘 수가 없어 아들 집에도 두고 하지요. 일찍이 신문기자를 하면서 책을 좋아하기 시작했는데 일본 특파원으로 나가 있으면서 일본에 엄청나게 귀하고 좋은 책들이 많은 것을 보고 도쿄의 고서점가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일본 공사 시절에도 그랬고요. 이런 책들이 우리나라에 정말로 중요한 것이라서 그냥 돌아설 수가 없었지요”​

 

이 장관님의 책들은 다양하다. 정치, 경제 관련 책들이 많고 특히나 일본에서 나온 근세 역사 관련 대형 도서들이 더욱 눈에 띈다. 물론 문화통이어서 문화예술에 관한 책도 엄청나다. 우리는 생각하지 못한 2차 대전 종전 뒤 전쟁범죄자들에 대한 미국 군정의 재판기록 같은 것은 당시 일본의 책임과 국제상황 등을 소상하게 전해주는 자료다.

 

일본 외교문서를 모은 12권짜리 자료집도 귀한 자료다. 대한제국기 정책사 자료집도 있다. 이런 시사적인 중요자료들은 당시에 확보하지 않으면 우리 학계에도 큰 손실이 될 수 있기에 무리해서 모으셨다고 한다. 특파원으로서, 나중에 편집국장으로서 신문에 큰 역할을 하셨기에 그와 관련된 현대사 관련 자료들이 이렇게 모인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우리 학계가 참고하고 연구할 기본 자료들입니다. 자료가 없고 연구를 안 하면 복잡한 국제 관계에서 어떻게 효율적으로 대응합니까? 우리 학계가 가장 아쉬운 것이 이런 부분이지요.”

 

사실 이렇게 연구가나 학자 언론인들이 모은 자료들은 일반 도서관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것들이다. 최근에야 도서관이 많아지고 도서도 소장하지만,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모은 자료는 하나하나가 다 귀중하고 시대가 지나서 다시 만나기 어려운 것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책을 모으신 분들은 연로해지고 이런 책들을 개인이 계속 갖고 있을 수도 없기에 이런 귀한 도서들을 맡아줄 대형 도서관이 가장 시급하다. 이런 자료들은 아무리 다 귀해도 지금 도서관에서도 기증을 거의 안 받는다. 아니 못 받는다. 수용공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귀중한 책들이 그냥 폐지로, 불쏘시개로 사라진다.

 

 

올해 90대 중반이신 이원홍 전 장관은 어느 기관이나 단체가 이 귀한 책들을 받아서 도서관으로 만들어 일반에 공개한다면 조건 없이 내놓겠다고 하신다. 최진용 씨의 장서는 다행히 인천시에서 문화예술전문도서관으로 만들겠다고 해서 지금 추진중에 있다. 두 분만이 아니라 많은 지식인이 그동안 모은 책들을 보낼 수가 없어 고민하고 있다.

 

필자도 그 가운데 하나다. 요즈음 인터넷 시대, 전자문명시대라 책을 안 읽으려는 세대들이 많아졌고 그만큼 책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도 희박해지고 있다. 그리고 대신 집안이나 공간을 장식할 모형 책이 50여 가지나 나와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다. 책은 읽는 것이 아니라 장식용일 뿐이란 뜻이다. 책에 대한 우리의 눈물겨운 현실이다.​

 

우리들의 꿈이 담겼던 이런 좋은 도서들이 다시 번듯한 공간에 모여 우리 국민을 만나고 그들의 꿈을 키울 수 있는 길은 없는가? 정치가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가? 책의 날에 생각해 본 이 시대 책의 운명을 슬퍼만 하기에는 우리의 책과 독서 풍토가 정말 한심하다.

 

 

 

 이동식                                     

 

 전 KBS 해설위원실장

 현 우리문화신문 편집 고문